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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147) (147/232)

147화

그때 나는 집사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식후 산책을 하던 중이었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역시 그것이 좋을 듯합니다.”

“집사. 집사의 생각도 괜찮지만 내 생각은 달라. 그것보다는 그것이 더 좋을 것 같아.”

“공녀님의 말씀도 일리가 있으시지만, 그것보다는 역시 그것…….”

한창 대화가 오가던 때였다.

하인이 허겁지겁 달려와 손님이 찾아왔음을 알렸다.

“나?”

“예. 노아라고 전하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어쩔 수 없이 집사와의 팽팽한 설전은 이로써 1승1패1무로 끝맺고, 나는 후다닥 응접실로 향했다.

‘노아가 무슨 일이지?’

막 응접실 복도로 접어드는데, 벽에 기대어 있는 리반이 보였다.

나는 조심스레 접근했다.

“리반, 서식지를 바꿨어?”

“무슨 말씀이십니까.”

리반은 어쩐지 기운이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힘든 일이 있었나 보군.’

나는 힘내라고 속으로 응원하며 응접실 문을 두드리고는 벌컥 열었다.

‘어?’

안에는 노아만 있는 게 아니었다.

반갑게 인사하려던 나는 멈칫했다.

엔젤이 영 수상쩍다는 표정으로 무언가를 곱씹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가씨, 오셨습니까.”

“안녕. 무슨 일이야?”

대답한 사람은 로단테였다.

“선황자 전하께 신탁이 내려왔다고 들었어요.”

“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나 보군. 그래, 내려왔어. 아직 정식 공표는 되기 전이지만 말이지.”

잠시 머뭇거린 로단테가 물었다.

“무슨 내용이었는지 물어도 될까요?”

“선황자의 신성력이 완전히 개화되기 위해서는 신전의 보호가 필요하다.”

“말도 안 돼.”

엔젤이 입술을 짓씹었다.

“사샤, 아니, 선황자 전하를 보내실 거예요?”

“아니. 안 보내.”

정말이지 공교로운 타이밍으로 내려온 신탁이었다. 거기 보냈다가는 사샤는 신전이 아니라 웬 어두운 공간에 갈 게 뻔하다.

단호하게 답하자 엔젤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 온 김에 사샤 만나는 건 어떠냐고 말하려는데, 로단테의 얼굴이 자못 창백했다.

“로단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대공 전하께서는…… 지금 계세요?”

“조금 전에 외출하셨어.”

칼릭스는 일이 많이 바쁜 모양이었다.

‘맞다.’

나도 원래 바빠야 했다!

‘아버지 봬야 하는데. 깜빡하고 있었어.’

가서 내가 뭘 얼마나 잘 구별하는지 물어봐야 했는데 말이다.

부자가 되고 싶은 소망은 목숨 앞에서 자꾸 까먹게 됐다. 동기부여도 할 겸 값비싼 찻물을 속에 때려 부었다.

엔젤이 쿠키를 오독오독 먹으며 중얼거렸다.

“공녀님. 그 보좌관이라는 사람, 좀 이상해요.”

“이해해 줘. 업무에 찌들어서 그래.”

나는 엔젤의 어깨를 다독이고는 시녀를 불러 사샤에게 안내를 부탁했다.

노아는 잠시 로단테를 돌아보았다가 엔젤을 데려다주고 오겠다며 같이 일어났다.

방문이 닫힌 후, 로단테가 입을 열었다.

차분한 음성이었다.

“공녀님. 저, 신전의 숲을 다녀오고 보름간 깨어나지 못했어요.”

“뭐?”

쿠키를 꼭 쥐고 있던 손이 망연하게 풀리고, 허겁지겁 달려가 로단테의 얼굴을 요리조리 살피는데, 소년이 부스스 웃었다.

“괜찮아요. 그냥 긴 꿈을 꾼 것 같은 기분이거든요.”

나는 굳었다.

묘한 기시감을 주는 문장이었다.

내 침묵을 채근으로 받아들였는지 로단테가 이내 말을 이었다.

“그런데 꿈에서…….”

로단테가 눈을 깜빡였다. 당혹스러움이 번지는 얼굴을 보며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기억 안 나?”

“……분명 마차까지는 기억하고 있었는데.”

혼란스러워 보이는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기를 잠시. 굳이 해야만 할 필요가 없어 하지 않고 있던 말을 나는 읊었다.

“나도 종종 그런 꿈을 꾸고는 해. 그냥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생생한데, 진짜로 일어났을 리는 없는 꿈 말이야.”

혼돈으로 물든 주홍색 눈이 노을 지는 하늘처럼 일렁였다.

“나는 꿈은 모두 기억하는 대신에 특정한 부분이 검은색으로 가려져 있더군.”

그러니까, 너는 이상한 세계에 혼자 떨어진 게 아니라고.

정작 원작의 여자 주인공인 이리안이 아니라 언급되지도 않았던 로단테가 비슷한 꿈을 꾼다니 의아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의아할 것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나는 칼릭스와 로단테를 통해 미래의 조각을 목격하곤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해가 뜬 동안에만 보이지.’

그게 신전의 유명한 어절과 유사한 건, 그저 우연일까.

로단테는 나를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너무도 일찍 어른이 되어버린 소년의 머리통을 슥슥 쓰다듬었다.

‘아니면 셋 다 빙의자인데 나만 여기가 책 속 세상이란 걸 알고 있는 건가?’

은근히 그럴듯했다.

그러다 손에 순간 힘이 들어가 화급히 허공으로 손을 붕 띄웠다.

‘원작이랑 동화책 쓴 놈 잡아야 하는데.’

살고 사는 게 바빠 후순위로 미뤘을 뿐 내 분노는 여전하다.

‘내가 손 쓰기는 아무래도 영 그렇고…….’

고요히 불타오르다가 나는 음흉하게 웃었다. 로단테의 눈이 흔들렸던 걸 보아 과연 간악한 것이었을 게 분명했다.

마침 잘 됐다. 로단테는 나를 너무 좋게 봐서 문제였다.

나는 사악한 표정을 유지한 채 무언가를 써서 내밀었다.

다른 의미이긴 하지만, 로단테가 마침 잘 찾아왔다.

“이거, 아버지께 전달해 주겠어?”

* * *

아버지. 빛이 깃드는 보육원을 후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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