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칼릭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 애?”
“샤를리즈 말이다.”
“언제부터 그렇게 친했지?”
익숙한 말에 어쩐지 그리운 기분이 되었다. 그런 느낌을 받았다는 데 충격받았다. 소년은 일부러 더 넌더리를 쳤다.
“친하기는 무슨! 걔가 워낙 격 없이 굴 뿐인 것을!”
그는 아직도 샤를리즈가 그를 빡빡 씻기고 웬 물속에 담갔을 때를 기억하고 있다.
[―이게 뭐냐?]
[반신욕이라는 겁니다.]
[―이걸 왜 해야 하는 게냐?]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런가 하고 솔솔 올라오는 허브향을 맡으면서 찻잔에 느긋하게 기대 있던 때를 떠올린 소년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게졌다.
“아무튼! 심각한 이야기다. 걔, 약물을 주기적으로 먹어 왔더구나.”
“어떤.”
“내가 알아챈 거면 하나뿐이지. 신성력이다.”
칼릭스는 오래된 정보를 떠올렸다.
“교황이 리엔타 공작비를 독대한 적이 있어. 은밀한 만남이었기 때문에 정확한 내용까지는 파악하지 못했지만 공작비에게 축복을 선사했다고 하더군.”
소년이 얼굴을 구겼다.
“교황이 타인의 태중 신성력을 느꼈다고? 승계식 때 나도 놈을 봤다. 그 정도로 특출나진 않았어.”
“그 약물, 몸에 해가 되는 건가?”
“모른다. 그런데 상관없지 않아? 어차피 곧 죽을 텐데.”
소년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번에는 다를 수도 있지.”
“이미 확인하지 않았나?”
그리고 소년은 순식간에 허공으로 도약했다. 웬만한 복층 높이의 공간인 덕택에 볼썽사납게 천장에 머리를 박진 않았으니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칼릭스는 여전히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입술만 올려 웃고 있을 뿐이었지만, 소년은 간담이 다 서늘했다.
‘저, 저거 그대로잖아.’
“그래. 이미 확인했어.”
“그런데!”
“하지만…….”
칼릭스가 문득 눈을 깜빡였다.
“모두 같지만은 않으니까.”
부르르 몸을 떤 소년이 “걔한테는 모른다고만 했으니까 네가 알아서 처신해봐라!”하고는 쌩하니 사라졌다.
시야를 잠식하듯 새하얀 빛살을 눈도 깜빡이지 않고 응시한 칼릭스가 문득 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은 아직도 늦은 밤이었다.
* * *
‘흠. 오버하는 거려나.’
나는 뒷짐을 진 채 계단을 어슬렁거렸다.
로단테가 비록 꿈의 내용은 기억하지 못해 전해 듣지는 못했으나, 짐작은 갔다.
리엔타 공작은 남매에게 분명 별관에 꼭꼭 숨어 있으라고 엔젤을 불렀을 테다. 엔젤로부터 전해 들었을 텐데도 답지 않은 고집을 부려 올 정도라면 꽤나 동요할 만한 내용이었겠지.
그러니 꿈을 꾸는 또 다른 한 사람이 생각나지 않을 수가 없는 거였다.
“끙.”
관자놀이를 검지로 꾹 누르다가 눈을 부릅뜨고 결심했다.
‘문에 귀 대고 있다가 뭐 안 들리면 돌아가자.’
……어쩐지 환생을 떠올리기 이전의 행태와 비슷한 것 같지만, 다르다고 치자.
그렇게 마지막 계단을 오른 때였다.
“…….”
가주의 침실 문 옆에 등을 기대어 앉은 형체가 있었다. 익숙한 사람이었다.
직업병을 살려 살금살금 다가가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
흩어진 머리카락 아래 흰 얼굴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저 눈만 감고 있는 듯 무표정한 얼굴은 언뜻 평온한 듯했다.
“왜 이러고 있어.”
나는 아주 자그마하게 중얼거렸다. 나조차도 제대로 듣지 못했을 만큼 미약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검은 속눈썹이 조금 떨리고, 이윽고 나비의 날갯짓처럼 나붓이 올라갔다. 잠기운이라고는 전혀 엿보이지 않았으나 왜인지 흐릿한 벽안은 꼭 어딘가를 헤매고 있는 것만 같았다.
문득 생각했다. 그는 무엇을 찾아 헤맸던 걸까.
“와 줄 것 같아서.”
습관적인 미소를 그리려던 입술이 결국 비틀어졌다.
“너에 관해서라면 늘 내 예상이 맞았어. 그러니까…….”
칼릭스가 희미하게 속삭였다.
“네가 죽는다는 단언은 틀렸어.”
* * *
신탁의 내용을 은밀히 전달받은 안토니오 황제는 그야말로 길길이 날뛰었다.
“하필, 하필 이때!”
[황손은? 황손은 어찌 되었는가?]
[……황손께서는…….]
황손을 잃었다. 황후는 여전히 의식 불명인 상태다. 이러다 꼼짝없이 황태자 자리를 조카에게 넘기게 생겼다.
‘신성력이라니. 황족의 신성력은 모두 사장된 것이 아니었던가!’
심지어 그의 형마저도 신성력이 없었다.
닫힌 문 너머로도 여실히 들리는 파열음에 시종들이 벌벌 떨었다.
정작 이성을 잃고 광분하던 안토니오 황제는 금세 안정을 되찾았다. 그런 것 같았다.
“그래. 차라리 엘루이든보다는 신전이 낫지.”
호위도 대공가의 것보다 허술할 게 틀림없다. 신전에서 황족이 두 번이나 해를 당한다면 어쩔 수 없이 숙이고 들어올 터.
그렇게 되면 줄곧 손톱 옆 거스러미처럼 신경 쓰였던 것 하나가 해결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바로 신전의 황위 승계 인정 말이다.
“이 기회에 교황도 쳐내야겠다.”
다 짜여진 판에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줄도 모르고 간계를 꾸미는 머리는 유독 약삭빠르게 돌아갔다.
* * *
신전에 내려온 새벽녘의 빛 오름을 목격한 이들이 많았다.
드문드문 저들끼리 추론하던 때.
마침내 신전이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기로 내정한 전날.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소식이 수도를 뒤흔들었다.
“지, 진짜예요?”
“진짜라니까요?”
“말도 안 돼요! 흑마법이라니요!”
“대공 전하께서 황제 폐하께 기사단을 요청하셨대요.”
“그럼…… 혹시 흑마법사가 황후 폐하를 그, 그렇게 한 걸까요?”
“그러시겠죠. 그러니까 아시게 된 것 아니겠어요?”
“무서워요!”
“그리고 이건 뜬소문일 수도 있지만요. 흑마법은 대가가 필요한 사술이잖아요?”
“설마…….”
“그래요. 부랑자들이나 보육원에서 충당했대요!”
“세상에나!”
그 모든 소란을 리닉스 공작은 빠짐없이 전해 듣고 있었다.
“내부에 세작이 있는 게 틀림없다.”
그게 아니고서는 말이 안 되는 속도였다.
리닉스 공작은 유례없이 초조해졌다.
“아니, 어쩌면…….”
어쩌면 칼릭스는 이미 흑마법사 집단의 정체를 파악하고 있었고, 이 기회를 틈타 뿌리 뽑으려고 하는지도 몰랐다.
대공이 눈치챘으리라고 짚이는 시점이 하필 있는 탓이다.
“그때부터 짐작하고 있었나?”
제 자리를 빙빙 돈 공작이 짜증스레 얼굴을 구기며 손에 쥐고 있는 작은 종이를 확인했다. 샤를리즈 리엔타가 세냑의 사생아에게 보낸 것이었다.
어차피 탄로 난 거라면 한시바삐 그분의 명을 완수하는 게 낫다.
그러면, 그분께서 손을 써 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가 발각돼 비참하게 처형당하지 않도록 말이었다.
리닉스 공작이 부릅뜬 눈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어느새 제 페이스를 잃었다는 사실은 미처 눈치채지 못한 채였다.
* * *
에반스, 내 아들. 잘 지내고 있느냐? 날이 많이 추운데 실외에서 훈련하고 있을 테니 걱정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