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아드리안에게 보낸 서신, 중간에 확인했겠지?’
조금만 뭐 해도 목숨의 위협 받기 일쑤였던 지난 세월이 눈앞을 스쳤다……. 손 안 대고 코 풀기 그거 나도 해 보고 싶었다.
그러니 리닉스 공작이 자충수를 둔다면 더 좋을 텐데, 이건 한창 사리고 있어서 어려울 것 같다.
‘리닉스가 조금 나쁜 짓 한 거 어디 없나.’
리닉스 공작 놈은 나쁜 짓 한 게 워낙 많은 데다 하나하나 악독하기 짝이 없어서 최소 사형 최대 사형뿐이었다.
칼릭스가 리닉스 공작이 흑마법사 집단에 연루되어 있다고 당장 밝히지 않는 이유도 그 목을 내 손에 쥐여 주기 위함일 터였다.
‘나쁜 놈아. 동화책 작가 놈이라도 얼른 찾거라.’
뚜둑 손을 꺾으며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신전이 자리한 방향이었다.
“이 상황에서 신탁을 공표할 수는 없겠지.”
황제가 그 꼴을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다.
‘흑마법의 재림으로 뒤숭숭한 가운데 신성력을 가진 황족의 등장이라…….’
신전이랑 황제가 치고받고 하느라 교황이 전면에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온다면 이것도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다.
‘그런데 전면전으로 번진다면 황제가 로나터스 후작가의 기사단을 사용하려고 들겠지.’
바이에르 공작은 납득시킬 수 없을 테니까.
창문턱을 검지 끝으로 툭툭 두드리다가 나는 돌아섰다.
“교황을 만나야겠어.”
리닉스 공작이 ‘그’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미래의 조각은 꼬박꼬박 리닉스 공작이라고 박아서 서술되고 있다.
놈이 모시는 인간이 교황이 맞다면 교황을 만난 후 미래의 조각이 어떤 반응을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머리를 열심히 굴려 봤다. 그러다 돌연 깨달았다.
“맞다!”
나 성축일도 까먹었을 만큼 신전에 대해 아는 거 없지!
그래서 내가 아는 사람 중 두 번째로 지식이 많은 사람을 찾아가기로 했다.
이튿날.
“공녀님!”
쪼그려서 꽃 구경을 하고 있던 때였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고, 눈이 부셔 양손으로 눈을 가렸고,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내가 실수로 필리엄 백작가를 찾아왔었나?’
그러나 빛 속에서 언뜻 목격한 자애로운 미소는 라베트의 것이 맞았다.
“하아.”
나는 흠칫했다. 짧은 숨에 울음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어색하게 눈을 굴리다가 주춤주춤 라베트의 등을 도닥였다. 내 목에 감은 팔에 힘을 더 주며, 라베트가 자그마하게 웃었다.
“역시 저를 위로해 주러 오신 거죠?”
나는 또 흠칫해 어깨를 떨었다.
‘절대 아니야. 나는 그런 성격 아니야! 네 지식을 이용해 먹으려고 온 거야!’
……저 선량한 미소를 보고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저, 괜찮아요.”
이어진 대화로 유추하자면 라베트는 황후의 이번 피습 사건 때문에 내가 왔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래도 한때는 자주 뵙던 윗분이셨는데도 이런 마음을 갖는 제가 나쁜 거겠죠. 알고 있어요.”
“잘 됐다고 손뼉 쳐도 라베트는 나쁜 사람 아니야.”
라베트가 지그시 나를 바라보더니 조금 웃었다.
“어쩌면 그 말이 듣고 싶었나 봐요.”
그렇게 엉겁결에 마음씨 좋은 사람이 되어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그렇다. 로나터스 후작까지 나왔다.
“마침 아버지께서 모레 출정하시는데, 다행이에요.”
“으응.”
나는 눈물 젖은 빵을 입 안에 쑤셔 넣었다.
로나터스 후작은 완고한 기사의 전형 같은 생김새였다. 긴 와병 생활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장대한 기골은 여전했다.
‘같은 기사 아버지인데 이렇게도 다를 수 있군.’
신기해서 힐끔 보던 때, 후작과 눈이 마주쳤다.
기다렸다는 듯 후작이 말했다.
“공녀를 직접 찾아 인사를 전해야 했는데, 늦었어. 내 공녀에게 늘 감사함을 갖고 있네.”
“아닙니다.”
“리엔타의 독녀에게 그 어떤 것이 귀하겠느냐만, 무엇이든 보답하고 싶은 내 마음을 부디 알아주었으면 해.”
이미 당신 아드님을 뺑뺑 돌리고 있습니다, 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무서운 눈이었다.
“덕택에 좋은 친우를 만났습니다.”
라베트는 싱긋 웃었고, 후작은 곰곰이 생각하는 눈치였다.
“이번 출정에서 하사품을 받게 된다면 그것을 공녀에게 주는 건 어떨까 싶은데.”
“아.”
라베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공녀님께서 유물을 좋아하셨죠.”
맞다. 그래서 아직도 데칸드 백작에게서 서신이 종종 오고는 한다. 귀여운 아인스가 그려준 그림이 동봉돼 있을 때도 있는데, 내 평판이 요즘 유달리 하락하고 있는 데다 흑마법사 놈들 때문에 만남을 자제하는 중이었다.
한나절 간 진행되는 강의를 피하려고 그런 건 절대 아니다.
‘아인스, 많이 컸겠지.’
그 애는 장군감이었다.
잠시 딴생각을 하고 있던 때, 부녀가 이야기를 나눴는지 후작이 목을 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출정을 성공적으로 끝마쳐 유물을 꼭 공녀에게 선물할 수 있도록 하겠네. 신성 시대 유물이니 공녀의 심미안도 만족할 수 있을 게야.”
“예?”
그, 그거 설마…….
“드래곤의 빈 둥지에 대한 첩보가 들어왔거든.”
“…….”
내 친구의 집을 성공적으로 털기 위한 계획을 멍 때리며 듣던 나는 순간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물었다.
“혹, 다른 가문에서도 함께 출정하나요?”
* * *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
‘수도를 잠시 비우는 동안 별일이야 있겠나.’
[비록 활로 한 곳이 어렵게 됐다지만, 부랑자들로도 오래 버틸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는 하나, 혹시 모를 일이니 문제는 없는지 확인해보는 편이 좋겠죠. 한 번 다녀오세요.]
그분이 직접 언급하시기까지 했다.
그리하여 리닉스 공작은 보고로만 확인했던 장소를 직접 찾은 차였다. 긴 여정의 불편함을 줄여줄 포탈이 설치되어 있어 수월했던 데다 눈에 들어오는 풍광 또한 아름답기 그지없었으나 이유 모를 불안감 때문에 기분은 불쾌했다.
목적지는 바로 번듯한 대저택이었다. 탈출이 어렵도록 정원 부지가 유난히 넓었지만 귀족들의 별장이 많은 휴양 도시 특성상 위화감은 없었다.
가면으로 얼굴을 빈틈없이 가린 채 리닉스 공작이 턱짓했다.
하인으로 위장한 암살자가 즉각 보고했다.
“예외 사항은 없습니다.”
“진척 상황은?”
“특정한 시일만큼만 사망한 것처럼 보이게끔 하는 데는 아직 무리가 있습니다.”
리닉스 공작이 혀를 쯧 찼다.
인질들은 튜베롯 독약의 개량을 위한 실험체이기도 했다.
“인력을 두 배로 보충해주겠다. 하니, 경비에 철저…….”
그 순간이었다.
새하얀 빛이 시야를 침범했다. 이윽고 완전히 파고들어 세상이 온통 환한 빛살뿐이었다.
“무, 무슨.”
이상 현상을 파악하고자 애써 눈을 부릅뜨며 창문으로 다가가는 암살자와 달리 점차 뒷걸음질 치는 사람이 있었다.
당연하게도 그레고리 리닉스였다.
‘이것은…….’
그는 이 현상을 이전에 한 번 목도한 적이 있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였다.
‘신탁이 내려온 새벽의 빛과 똑같지 않은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리닉스 공작은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아닐 테지. 설마 아닐 테지!’
그러면서도 내달리는 다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분이 그를 버렸을 가능성을 부인하는 머리가 재빨리 돌아갔다.
‘그럴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내가 인질들을 데리고 있다는 게 들켜서 좋을 게 뭐라고?’
‘……혹 아예 집단 자체를 버리시려고 하시는 겐가. 그래서 나를 수장으로 위장하려고?’
‘아니지. 아직 제대로 드러나지도 않았어!’
하지만 그분은 흑마법과 조금이라도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잃을 게 너무도 많은 사람이었다.
그러다 보면 뜬금없이 이곳을 직접 방문하라고 언질한 것도 이상하게 느껴졌다.
‘감히 셋뿐인 공작가의 가주인 나를 팔아먹을 생각을 한 게라면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신전에 정식으로 독대를 신청해야겠다. 협박할 수 있는 건 그 또한 마찬가지임을 알려야겠다고.
입술을 꽉 물고 후문을 연 순간, 그의 목뒤를 누군가 내리쳤다.
그리고 암전이었다.
* * *
샤를리즈는 팔짱을 낀 채 팔을 검지로 두드렸다.
마침 좋은 기회였다.
신수는 여전히 슬프게도 힘이 부족했지만, 신성 시대 유물과 성물이 가득한 공간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리닉스 공작은 어디에서든 구린 짓을 할 테니 그때 신수의 힘을 빌릴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그곳이 엔젤의 대저택이었던 건, 딱히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어차피 리닉스 공작은 하얀빛만 보게 하면 되는 거였으니까.’
[―인질들은 걔네가 무사히 구출했다고 한다. 모두 의식이 없었는데, 튜베롯 독약을 쓴 걸 그 머리 노란 놈이라면 알았겠지.]
[―……내 소중한 보물이 털릴 뻔한 걸 알려준 건 고맙다. 그런데!]
[―다시는 그런 말 하라고 하지 말거라!]
‘……로제타랑 죽이 잘 맞을 것 같다.’
냉큼 주워 먹기에는 공교로운 타이밍이었다. 나 도와주려고 그런 거 안다.
샤를리즈가 조금 웃었다.
‘그나저나 심했나?’
―감히 드래곤의 레어를 침범한 그대들이여. 참으로 용감하나 동시에 참으로 어리석구나. 개인의 사욕을 위해 뽑는 검은 이토록 보잘것없도다. 진정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잊은 눈먼 기사란 얼마나 애처로운가.
리반이 써 준 건데…….
사샤의 생일 파티곡 작사 실력을 높이 사 그에게 부탁한 거였는데, 신수 취향은 아니었나 보다.
뚱한 표정으로 비스듬히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던 녹안이 일순 가늘어졌다.
규칙적인 박자가 멎어 들었다. 상대가 깨어났다는 것을 눈치챈 즉시였다.
“깨어난 거 압니다. 이만 눈뜨시지 그래요.”
수도 엘루이든 대공저의 지하 감옥에서 눈을 뜬 사람은 다름 아닌 리닉스 공작이었다.
“솔직하게 만드는 가루를 준비했어요. 변명을 듣고 싶진 않거든요.”
간과할 수 없는 말이었다.
리닉스 공작에게도 흑마법이 걸려 있는 탓이다. 자칫하다가는 이대로 죽을 수도 있다는 데 생각이 닿자 공작은 감정을 애써 감추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공녀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네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군. 그래, 공녀가 묻고 싶은 게 무엇인가. 내 모두 말해 주겠네.”
샤를리즈 리엔타가 도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서는 어차피 공녀의 말을 듣기는 해야 했다.
‘어리고 우둔해. 어렵지 않다.’
그 어리고 우둔한 것에게 잡힌 상황이 치욕적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리닉스 공작이 이를 악물었다.
“하나, 공녀는 반드시 책임져야 할 걸세. 부친의 권위만 믿고 행동한 대가가 어떨지!”
거센 노호가 공간을 울렸다. 샤를리즈가 허리를 조금 숙였다. 마주친 눈이 선연했다.
“틀렸어.”
이윽고 선고처럼 떨어진 말이 있었다.
“무슨 대답이든 원하는 대로 할 테니 제발 내 목숨만큼은 살려달라고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