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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150) (150/232)

150화

짧은 침묵이 흘렀다.

시선이 맞부딪혔다. 누구도 물러서지 않는 대립이 금세라도 끊어질 실처럼 팽팽했다.

“하.”

헛웃음 치며 리닉스 공작이 마른세수를 했다.

“어디서 또 해괴한 소문을 듣고 이러는지. 공녀는 주변을 제대로 솎을 필요성이 있겠어.”

“썩어빠진 물을 마시며 사는 당신보다는 낫겠지.”

갈라진 손가락 틈으로 얼핏 보이는 공작의 적안이 분노로 일렁였다.

그것을 관조적으로 바라보며 샤를리즈는 작은 주머니를 허공으로 던졌다가 잡기를 반복했다.

다분히 과시적인 행동은 누군가에게 조롱의 일환으로 읽히기 충분했다.

‘그럼에도 참고 있다.’

집단의 2인자에게도 예외 없이 흑마법이 걸려 있는 것이다.

저 집단의 수장이 신전의 고위 신관급 이상임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고, 신탁을 조작한 건으로 확신하게 됐다.

그래서일까. 며칠 전, 칼릭스가 짚은 의문이 문득 생각났다.

[흑마법은 유지하는 자체로도 정기적으로 대가가 필요하다고 해.]

[단순히 정체를 완벽하게 숨기기 위함이 아니라 어차피 대가를 주기적으로 필요로 하는 일이 있을 수도 있겠군요.]

‘그래.’하고 대답한 칼릭스는 얼마간의 적막 후에야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광석, 신성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어. 짐작하건대 신성력을 가진 사람과 닿으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 모양이야.]

[공녀가 발견한 광석이었고. 본래라면 공녀가 만졌을 테고.]

[그들은 공녀를 대가로 바치려고 했지.]

[그대가 주기적으로 복용한 약, 신수의 말로는 신성력과 관련되어 있다더군. 아마 좋은 쪽은 아니었겠지만.]

그때 이름 모를 광석을 만진 사람은 칼릭스였다.

‘칼릭스도 신성력이 있었던 건가.’

원작에서는 언급된 바 없었지만, 신성력을 가졌다고 해도 딱히 놀랍지는 않았다.

그냥, 칼릭스는 그럴 것 같았다.

다만 샤를리즈는 그때 잠시 어떤 생각을 했을 뿐이다.

‘칼릭스와 로단테를 통해 미래의 조각을 볼 수 있는데 해가 뜬 시간 동안에만 가능하며, 그것은 신전의 어절과 비슷했고.’

공교롭게도 그 셋 모두 신성력과 관계있다.

무감각한 녹안에 묘한 빛이 스쳤다. 손색없이 아름다운 얼굴이 살짝 기울어졌다.

[언뜻 아무 관련이 없는 듯하지만 규칙성이 보여. 아이러니하게도 흑마법이 아니라 신성력이야.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

업무를 볼 때 자주 착용하던 안경은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았다. 기울어져 있던 벽안과 아무런 가림막 없이 맞닥뜨렸다.

[흑마법은 그 수장이라는 사람에게 목적을 이루는 과정에서 부수적이지 않을까, 하고 말이야.]

손 안에 감기는 주머니를 말아쥐며 샤를리즈가 철장을 검지로 가볍게 두드렸다.

“시간은 충분히 준 것 같은데. 어때, 생각은 달라졌나?”

리닉스 공작이 눈앞에 놓인다면 그를 몇 대 때리고 시작하지 않을까 싶었다.

리엔타 공작의 몫, 내가 마음고생 한 몫. 그런 것들을 차근차근 작성하며 훌쩍인 시간이 샤를리즈에게 있었던 탓이다.

그러나 몰아치는 거센 감각은 모두 스노우 볼 안의 것 같았다.

그것은 리닉스 공작 하나 처리한다고 해서 모두 끝나는 게 아니라고,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일 터였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 침착할 수 있었다.

샤를리즈가 물었다.

“네가 흑마법사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 수장이 누구야.”

“그건 또 무슨 말인지.”

리닉스 공작은 자신이 살아나갈 것을 확신했다. 그랬기에 판을 짰다. 면책권을 회수할 수 있는 방편을 말이다.

‘저것이 시인하는 답을 한 번이라도 한다면 승산이 있지.’

참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는 도구는 만들면 됐다.

무릇 실언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감정을 요동치게 만드는 것이 우선이었다.

“이토록 자신하는 걸 보니 출처가 공녀의 부친이기라도 한 건가? 그렇다면 리엔타 공작도 많이 죽었어. 추측도 사람을 봐 가며 하고, 말도 사람을 봐 가며 나눠야지. 예전부터 그게 문제였어. 제 자식을 위해서라면 죽기라도 할 것…….”

예고 없이 뻗어 나온 손이 그의 목깃을 틀어쥐었다.

콰앙―!

힘으로만 따지자면 공작이 우세하나, 워낙 민첩했던 탓에 공작은 창살에 얼굴을 박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크윽, 너……!”

“아쉽지만 지금은 버릇을 하나하나 교정해줄 시간이 없어. 네게는 다행스럽게도 말이야.”

샤를리즈가 이를 드러내며 목을 울렸다.

“면책권을 회수하려고 판을 짜는 것도 네 말대로 상황을 봐 가면서 하는 건 어때? 이러다가 내가 네 답을 듣는 것을 모두 포기하고 마냥 괴롭히기만 할 수도 있잖아.”

그제야 리닉스 공작은 샤를리즈가 분노를 짓밟고 서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대화가 그의 기대처럼 쉽게 풀리지 않으리라는 것 또한.

한 번 눈을 감았다 뜨는 것만으로 다시 무감각해진 얼굴로 샤를리즈가 물었다.

“지금도 충심을 지킬 작정인가? 어차피 너는 끝났어. 그 저택에 있던 사용인들을 모두 포박했고, 강도 높게 고신하고 있지.”

저 말에 리닉스 공작은 동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은 그의 이름을 절대로 언급할 수 없다.

“용의 둥지에 들어선 기사들은 용언과 함께 저택으로 이동했다지. 신전의 반응이 어땠을 것 같나?”

“같은 말을 하게 만드는군.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만.”

“그 용의 둥지, 조사해 보니 신수의 것이던데. 하필 네 주군의 명을 듣고 향한 장소로 신수가 기사들을 이동시키다니,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

공작의 목젖이 미세하게 일렁였다. 이미 그가 갖고 있던 의문이었다.

‘그분께서는 나를 버리실 이유가 없다. 아니, 그 인질들을 버릴 이유도 없다. 개량을 한창 진행하고 있는데 갑자기 모두 버릴 이유가 없어!’

다시 마음을 가다듬은 순간.

“탄로 나기 일보 직전인 수하와 벌써 두 번이나 해독된 독약을 뭘 믿고 더 쓸 수 있겠어. 그러니 함께 폐기 처분하기 딱이었겠지. 그러면서 신성력을 내보여 신전의 위신을 세운다면 꽤 괜찮은 그림이었을 테고.”

샤를리즈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네 수장, 교황에게 말이야.”

* * *

손 안 대고 코 풀기를 염원했다.

이번 인질 건이 그렇게 풀렸다.

사람 목숨 갖고 도박하기는 뭐하다. 조금만 더 뒷공작 하면 인질들이 갇힌 장소로 리닉스 공작을 유도할 수 있었을 테지만, 번거로워지던 차였다.

급습하기 전까지 내부 상황을 눈여겨보고, 대규모 인원이 머무를 장소를 수배하는 것 말이었다.

‘타이밍이 좋았어.’

아무튼 이 사건은 크게 알려졌다.

애초에 흰 빛을 목격한 이들이 적지 않았던 데다가 용이 ‘그런’ 말을 하며 기사들을 이동시켰다 보니 일종의 호승심을 깨운 모양이었다.

대부분이 인질들의 보호를 자처해, 수도에도 사건의 전말은 금세 닿았다.

‘아드리안과 그 외는 잘 탈출했겠지.’

라베트가 휴양 도시로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마 해결책도 함께 갖고 갔을 터다.

모쪼록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면 좋겠다.

그래서 이번에는 주도적으로 저질러 봤더니만…….

‘수장이나 교황 둘 중 하나만 말할걸 그랬나.’

그럼 뭐 때문에 기절했는지는 알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기절한 리닉스 공작을 발로 툭툭 치던 것도 마흔다섯 번. 발길을 돌렸다. 깨어 있을 때 하는 게 더 재밌다.

오랜만에 맞는 듯한 지상의 빛은 찌들었던 몸을 정화시켜 주는 듯했다.

‘흠. 기분 탓.’

해답은 역시 하나뿐!

나는 당장 에반스에게 달려갔다.

그는 텅 빈 연무장에서 쓸쓸하게 연습하고 있었다.

‘……친화력 대단한 줄 알았는데.’

멈칫한 나는 조심조심 걸음을 뗐다.

“에반스.”

“아. 아가씨.”

“……내가 자주 올게.”

“예?”

“매일 아침저녁마다 함께하자.”

“……예?!”

그러자고 힘차게 대답하는 걸 보니 에반스도 내심 외로웠나 보다.

나는 고개를 굳세게 끄덕이며 함께 체력 단련을 하고, 잔뜩 지친 채 내 방에 도착했다.

“…….”

리엔타 공작의 걱정 어린 서신이 와 있었다. 저번에 그 약제사가 돌팔이인 것도 모자라 영 구린 사람인 것 같다고 했더니 공작은 내 몸에 이상이 생겼다고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샤를리즈, 아가. 네 필체가 맞는 거냐? 이렇게 삐죽빼죽하다니. 혹시 가까스로 쓰고 있는 게냐? 에반스 경은 네가 건강한 것 같다고 했지만, 그런 말을 하게 하려고 데려간 건 아닌 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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