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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151) (151/232)

151화

머쓱하게 손등으로 코 밑을 슥 훔치려던 때였다. 먼저 다가온 손이 있었다.

“가만히.”

언제 다가왔는지 칼릭스가 손수건을 대주었다. 내가 잡고 있겠다는 뜻으로 슬쩍 손을 올리자 칼릭스가 돌연 물었다.

“몇 번째야, 샤를리즈?”

‘뭐가요?’의 뜻을 담아 쳐다본 얼굴은 무감했다. 단어 그대로였다. 아무 감정도 깃들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가 화가 난 것 같다는 감상을 받았다. 마치 폭풍이 몰아닥치기 전의 기이한 평온과도 닮아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칼릭스가 고개를 숙인 그대로 눈만 들어 올렸다.

아니다. 그는 화가 난 게 아니었다.

“코피를 쏟거나, 피를 토하거나, 감각이 둔중해지거나. 그런 것들 말이야.”

엄청나게 무서운 말을 익숙하게 묻는 목소리 때문일까. 나는 흠칫 떠는 대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흑마법 때문에 몇 번 그런 적은 있습니다.”

“……그래.”

머리 하나는 차이 날 정도로 키가 훌쩍 큰 남자는 분명 담담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나는 묘한 기분이 되었다.

“저는…… 제가, 죽을병 걸린 것도 아닌데요. 그리고 설령 걸렸다고 해도 저는 반드시 오래오래 살 겁니다.”

어설프게 주섬주섬 말하며 깨달았다. 그를 위로해 주고 싶은 거였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럴 수 있다면.”

칼릭스가 나를 안아 들었다. 몇 번이나 안겨 본 품인데 왜인지 어색해 뻣뻣하게 상체를 세우고 있자 가벼운 웃음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놀림 받고 있다.’

칼릭스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서다. 내 기분을 풀기 위해서가 절대 아니다.

예고 없이 퍽하고 기댔는데도 칼릭스는 미동 하나 없었다. 몸에서 힘을 완전히 풀어 무게를 증량시켜도 마찬가지였다.

뚱하니 있을 무렵,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래. 이렇게 기대면 돼.”

……먼 산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젖혀 칼릭스를 올려다보았다. 그 얼굴은 괜찮아 보였다.

다시 시선을 내렸고, 그래서 보지 못했다. 나를 향한 짙은 감정을 말이다.

* * *

늦은 시각. 엘루이든 대공저.

가주의 집무실은 서랍을 여는 소리도 들릴 만큼 고요했다.

웬만한 영지의 반년 치 예산과도 맞먹을 물건은 형편없이 망가진 채였다.

턱을 괸 채 칼릭스는 금이 간 안경알을 다른 손으로 굴렸다. 이면 너머 진실을 보여 주는 마도구는 제 한계치를 넘어선 순간 깨져 버리고 말았다.

‘얼굴을 긁히지 않아 다행이지.’

샤를리즈가 제 얼굴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걸 칼릭스는 알았다.

대체로 심드렁히 무표정한 녹안이 길게 닿는 의미를 지난 시간 모두를 통틀어 똑똑히 깨닫게 된 덕택이다.

얼굴만이라도 상관없었다. 그저, 훼손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과거의 어느 순간과 맞닿은 벽안이 깊어졌다.

[저,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샤를리즈가 오랜 기간 복용한 약을 제조한 약제사가 고개를 마구 저었다. 그게 거슬려 더는 도리질 칠 수 없도록 고정시켰다.

[저는 그저 공녀님의 건강이 좋지 않으시다고 들어서…….]

[어느 건강이.]

[타고나신 생명력이 적으셨습니다.]

무의미하게 움직이던 손가락이 불현듯 멈추었다. 칼릭스는 더는 착용할 수 없게 된 마도구를 내려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은 모두 생명력과 마력을 타고……, 이, 이 이야기는 관심 없으신 것 같으니 생략하겠습니다. 그리하여 공녀님이 갖고 계신 생명력의 소실을 최대한 막고자 하였습니다.]

감언이설로 속인 것이든 무엇이든 저 과정으로 신성력도 함께 갇혀 보존된 것이다. 일개 약제사의 힘으로는 어림도 없으니 신전의 개입이 분명 있었을 터.

더 이상 들을 게 없음을 알면서도 그 순간 칼릭스는 물었다.

시간을 다시 돌려도 하고 말았을 질문이었다.

[그건 섭리를 거스르는 것이 아니던가.]

[애석하게도 타고 난 양 자체는 달라질 수 없습니다. 일평생으로 고르게 나눠 준 것이지요. 절반은 건강하게 살고, 절반은 와병 생활을 하는 것보다는 일평생 조금 체력이 약한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시간이 아주 오래 흘렀는데, 저런 생각은 그대로였다. 사람은 모두 타고난 시간이 있으며, 절대로 바꿀 수 없다고 말이다.

칼릭스는 지독할 만큼 겪어 하나의 법칙이 되어 버린 무언가를 부정했다.

걸음이 마침내 멈췄다. 종착지는 언제나 같았다.

칼릭스가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었다.

눈을 감은 작은 얼굴은 무표정했다. 정말 잠을 자고 있는 게 맞는지,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저는 반드시 오래오래 살 겁니다.]

그래, 그러자.

잃고 싶지 않은 손을 붙잡았다.

* * *

칼릭스의 집무실을 끝으로 기억이 없는데, 내 방에서 일어났다.

‘옮겨줬나 보군.’

세수해 물기가 묻은 얼굴을 수건으로 야무지게 닦던 중 레아가 갸웃했다.

“아닌데…….”

난 자그마한 호기심을 해소하고자 사색에 잠긴 사람을 방해하는 그런 사람 아니다.

물기를 훔치는 데 집중하고 있자 레아가 또 갸웃했다.

“아가씨. 오늘 사샤 님의 간식 시간을 함께하기로 변경되셨어요?”

나는 눈을 번뜩였다.

“그랬어?”

“아니시죠?”

“……으응.”

푸시시 식어 수건을 든 손을 축 내리자 레아가 받아 갔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기운이 넘치시나 생각했어요.”

“아. 오늘 바나첼 후작을 만나거든.”

“……바나첼 후작 각하를 만나기로 해서 기운이 넘치신다고요?”

“응. 맞아.”

투지에 불타야만 하거든.

약속 시간이 일찍 잡혀서 서둘러야 했다. 옷을 갈아입는데 옆에서 도와주는 레아의 손이 무슨 일인지 한 박자씩 늦었다.

‘무슨 일 있나?’

일찍부터 사색에 잠기고, 멍하다니.

‘이 증상은…….’

“레아, 잠시 쉴래?”

“네?”

“친구도 만나고…….”

“아가씨. 저는 친한 사람이 없어요.”

동지애가 샘솟았다.

‘휴가 넉넉하게 줘야지.’

레아는 기간 한정이라고 해도 아무튼 내 전속 시녀이니 휴가도 내 독단으로 줄 수 있었다.

나는 코를 쓱 훔쳤다.

“집은 대공령에 있겠지? 그럼 보름 정도…….”

“친한 사람이 없어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아요.”

언젠가부터 표정이 다양해진 레아가 울멍울멍한 얼굴을 했다.

“그러니까, 부디 휴가를 주신다는 말만은…….”

“……유급인데.”

레아는 굳건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일하는 게 좋아요.”

참 신기했지만 이 저택은 주인부터가 일 중독이었다.

“그래. 알겠어.”

“네!”

다부지게 대답한 레아가 내 머리카락을 매만져주었다. 간간이 ‘너무 아름다우신데.’, ‘너무 잘 어울리시는데.’ 하는 자그마한 소리가 들렸다.

아부할 만큼 일을 좋아하는 독특한 사람을 보던 것도 잠시. 머리카락을 만지는 시간이 길어져 슬슬 감기던 눈을 번쩍 떴다.

“레아. 나 오늘 기운 넘쳤다고 대공 전하께 말씀드려줘.”

“예?”

“그러기야?”

레아는 마른 입술을 축이다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좋았어.’

나는 속으로 후후후 웃었다.

* * *

리반은 집무실 문을 열었다.

마치 문을 열어주지 않기를 바라듯 솜털같이 작은 소리라서 헷갈리느라 조금 늦어졌다.

‘누구지?’

의아했던 리반은 양손을 모으고 있는 레아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레아?”

“아가씨께서 가주님께 전하시라는 말씀이 있어서요.”

“……공녀님께서요?”

‘어쩐지 느낌이 영 안 좋은데.’

샤를리즈가 들었다면 ‘역시 소동물.’하고 고개를 근엄하게 끄덕였을 생각을 하며, 리반이 “들어오십시오.”하고 비켜섰다.

이대로 복도로 탈주하고 싶었지만, 레아의 성격을 아는지라 차마 상관과 두고 갈 수 없어 리반은 불안하게 눈을 굴리며 문을 닫았다.

“저어, 가주님. 샤를리즈 아가씨께서 전해 달라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레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 * *

그 시각.

나는 테오도르 바나첼을 만나고 있었다.

“그대의 가족을 해한 범인에 대해 말하고자 해.”

눈빛을 달리 한 테오도르는 숨을 고르는 듯하더니 물었다.

“누구입니까?”

나는 순간 어두워진 안색을 감추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간단하고도 당연했다.

아마 테오도르도 한 번쯤은 의심한 적이 있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그러지 않고서야 아무리 카타리나 황후가 결코 범인을 찾아주지 않으리라고 확신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돌아설 수는 없었을 거다.

“카타리나 리닉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손에 핏줄이 섰다.

나는 그의 표정을 기억하지 않기로 했다. 그가 괴로움을 삼키느라 더 힘들지 않도록 고개를 푹 숙였다.

‘카타리나 리닉스는 부친 때문에 예전부터 자금난이 있었지.’

그녀로서는 당연히 미술품을 생각했을 것이다. 수요가 끊이지 않는 사치품 시장의 전형이었으므로.

사람들의 이목을 더 끌 수 있는 재주를 가진 데다 가문도 제법 괜찮은 적합자.

“그대의 잘못은 결코 없어. 그것만은 잊지 마.”

“리닉스 공작은 역시 공녀님의 손에 있습니까?”

“그래.”

“공작을 아직도 조용히 처리할 생각이십니까?”

영민한 남자는 본인을 탓하는 대신 정확한 대상을 찾았다.

나는 빙그레 웃었다.

“아니.”

시야에 들어온 테오도르는 날이 선 검날처럼 시리도록 새파란 낯빛이었다.

“생각이 달라졌어.”

* * *

그리고 나는 신전에 알현 신청을 했다. 당연하게도 알현의 대상은 교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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