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휴.”
나는 음울하게 마차 창문에 볼을 대었다.
원작에서, 칼릭스는 바나첼 후작가의 비극에 큰 관심이 없었다. 우연히 알게 된 단편적인 정보를 끝으로 더는 파고들지 않았다.
그 당시 칼릭스가 포착한 실행자는 바나첼 후작에게 열등감을 가진 모 남작이었다.
원작의 정보는 거기까지였지만, 그 정도만으로 충분했다. 그러니까, 노아에게 말이다.
“에효.”
리닉스 공작을 두고 열렬히 구상했던 이것저것 요것조것을 모두 할 수 없게 되니 마음이 아파 눈물이 찔끔 나올 것만 같다.
‘내가 딸 목이었는데…….’
가족을 몽땅 잃은 테오도르 앞에서 가족을 잃을 예정이었던 내가 소유권을 주장할 수는 없는 법이지 않은가.
그건 너무 나쁜 놈이다.
울적하게 창문에 이마를 툭툭 박기를 얼마간. 대공저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쏜살같이 달려가 한 지점을 기웃거렸다.
그렇다. 사샤의 방 앞이었다.
‘또 공부하고 있으려나.’
사샤는 정말이지 공부에 중독돼 버렸다…….
[샤를 님도 아카데미 다니셨어요?]
[그래, 대공 전하랑 같이 다녔지.]
아주 진득한 과거였단다……. 잠시 먼 산을 바라봤을 뿐인데, 그새 사샤는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결의에 차 주먹을 꼭 말아쥐고 있었다.
[저도 아카데미 입학할 거예요.]
아주 예전에, 볼모랍시고 약소국의 왕이 자식을 보내자 인접국에서도 자꾸 보내는 바람에 황제의 명으로 아카데미 입학 가능 나이가 여덟 살로 조정됐다고 한다.
저 이후로 딱히 재조정할 이유가 없어 아직도 유지 중이었다.
아카데미의 비사를 졸업한 지 한참 지나 알게 될 줄이야. 역시 인생은 모를 일이다.
뭐, 그렇게 리반이 손수건에 눈물을 찍었다는 이야기다.
다시 울적해졌다.
‘예정된 행복이란 없나 봐.’
집사랑 사샤의 내년 생일 파티와 관련해 한참 이야기를 나눴는데 정작 아이가 곁에 없을지도 모른다니…….
복도에 기대어 흑흑대고 있던 때, 문이 조심스레 열렸다. 그 사이로 빼꼼 얼굴을 보인 아이가 입술을 우물거렸다.
“샤를 님. 들어오셔도 돼요.”
“들렸어?”
“네에.”
사샤가 또 공부해. 일명 사또공을 중얼중얼거린 소리를 듣다니 사샤는 귀도 밝았다. 숙부 닮아 대단한 기사의 자질이 엿보였다.
‘엄청엄청 작은 아기였는데.’
나는 새삼스러운 기분이 되어 사샤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 앉았다. 푹신한 소파가 돌연 자그마하게 흔들거렸다.
사샤가 내 옆에 폴짝 뛰어올라 앉은 것이다.
“샤를 님?”
옆을 돌아보자 아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아니라며 고개를 젓고는 말랑한 손을 조물조물했다. 얌전히 손을 내어주고 있던 아이가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일 있으신 거예요? 걱정이 있는 얼굴이에요.”
“아무…….”
‘아무 일도 아니야.’라고 하려던 말을 삼켰다. 아이는 무릇 아무 걱정 없이 해맑게 자라나야 한다.
그러나 사샤는 애석하게도 그저 해맑기만은 할 수 없는 아이였다. 진심 어린 걱정으로 촉촉한 눈망울은 아이의 것이라도 외면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조물조물.
말랑말랑.
“그게 사실은 말이야.”
“네!”
고작 저 서두만으로도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를 보며 최소한 사샤를 상대로 이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받았다.
“안 친한 사람을 만나야 하는데, 그 사람은 계속 집에만 있어. 그래서 어떻게 해야 만날 수 있을지 걱정이야.”
“으응.”
사샤가 심각하게 고민했다. 입술을 꼭 앙다물어서 그런지 볼이 한층 토실해졌다.
“그럼……, 선물을 주는 건 어떠세요?”
“선물?”
“네에. 선물이요. 좋아하는 선물이면 만나러 나오지 않을까요?”
“만나러 나온다고…….”
나도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이내 웃었다.
“제가 도움이 되었어요?”
“응. 아주 되었어.”
양 볼이 내 손바닥으로 짜부라진 채 아이가 수줍게 웃었다.
그러다가 돌연 눈을 크게 떴다.
“샤, 샤를 님!”
‘아, 또 코피가.’
심장에 지나치게 치명적인 광경이긴 했지. 그래도 좋아.
천사의 얼굴을 목도한 대가라면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나는 놀라 파닥거리는 아이를 품에 안은 채 일어났다.
“손수건은 책상 위에 있어요!”
“공부하다가 힘들 때 찔끔 눈물 나오면 닦는 용도야?”
“아, 아니에요!”
피식 웃고는 손수건을 코 밑에 대었다.
“오늘 무리했더니 조금 피곤했나 봐. 외출했거든.”
사샤의 머리꼭지에 턱을 괴었다.
공부가 재밌어서 하는 거라면 막을 이유가 없지만, 목표를 위해 감내하는 거라면 아직 어렸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
“그러니까 사샤도 무리하지 마. 아카데미 입학도 좋지만, 행복한 사샤가 되기로 나랑 먼저 약속했잖아.”
“힘들지 않아요.”
사샤가 내 옷을 꼭 잡았다.
“모두 하셨으니까요.”
“그리고 모두 사샤보다 나이가 두 배는 많았지. 루카스도 아직 아카데미 입학 못 했어.”
‘루카스야. 미안하다.’
다음에는 카드놀이에서 처참하게 져 주겠노라고 속으로 약속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루카스를 동년배 최고로 치고 있는 사샤가 주저하더니 고개를 들었다.
나는 하늘색에 가까운 벽안을 똑바로 보며 한 번 더 말했다.
“루카스도 지금 아이답게 살고 있어.”
놀고 있다는 이야기다.
바이에르 공작은 루카스의 예법을 제외한 모든 교육을 중지시켰다고 한다. 루카스가 괜히 대공저를 자주 드나든 게 아니다.
“그리고 사샤는 더 놀아도 돼.”
나는 아이의 동그란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누구보다도 많은 것을 타고난 아이는 이미 많은 것을 잃었다. 그중 다시는 되찾을 수 없는 것들도 많았다.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감촉이 느껴졌다.
너무 겁주는 말인가 싶어 머뭇거리다가 덧붙였다.
“그리고 너무 공부하면 리반처럼 된다?”
사샤는 또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 * *
이튿날 오후.
리반은 샤를리즈를 찾아 저택을 종횡무진했다. 그 얼굴은 참으로 묘하기 짝이 없었다.
당장이라도 뒷목을 잡을 것처럼 파리하기도 했고, 금세라도 푸하하 웃을 것처럼 입꼬리가 파들거리기도 했다.
샤를리즈가 봤더라면 ‘역시 변장이 덜 된 증거…….’라고 중얼거렸을 꼴이었다.
아무튼 리반은 기어코 샤를리즈를 찾아냈다.
“……뭐 하십니까?”
“보면 몰라? 겨울을 느끼고 있어.”
과연 찾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만했다.
정원을 침대 삼아 하늘을 이불 삼아 누운 샤를리즈를 해괴하게 쳐다본 리반이 “그건 그렇고.” 하며 외면했다.
“공녀님 소행이지요?”
샤를리즈가 심드렁히 눈을 떴다.
“교황의 기도실을 망가뜨린 거 말입니다!”
화창한 오전. 때아닌 소동이 고요한 신전을 깨웠다.
마치 폭사라도 된 듯 오색 빛의 스테인드글라스가 무참히 깨져 나뒹굴었다. 다급히 안으로 달려간 고위 신관은 다행스럽게도 피해가 없다고 밝혔다.
“교황이 정말 의식불명인지 확인해 보려고 그러신 겁니까?”
“비슷해.”
“자칫하다가는 신탁의 내용을 밝히며 사샤 님을 신전으로 들이라는 신의 뜻이라고 상황을 몰아갈 수도 있습니다.”
“리반도 알잖아. 그러기에는 신전이 잃을 게 너무 많아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단기간의 손실을 각오하고 있을 수도 있지요.”
“이번은 그럴 수 없을 거야.”
더 말해 보려던 리반은 입을 닫았다.
설령 샤를리즈의 예상이 빗나가더라도 사샤가 신전으로 끌려가도록 결코 두고 보지 않을 칼릭스가 있으니 아무래도 괜찮은 일이었다.
리반은 대신 샤를리즈를 힐끔 쳐다봤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샤를리즈가 눈썹을 밀어 올렸다.
“뭐야. 왜 갑자기 귀여운 척 쳐다보고 그래. 이거 봐, 소름 돋았어.”
“그러게요. 소름이……. 제가 언제 귀여운 척했다고 그러십니까! 저는! 공녀님께서 바나첼 후작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셨는지 궁금했을 뿐입니다!”
[아가씨께서 바나첼 후작 각하와의 약속이 있어 기운이 난다고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리반이 실실 웃었다.
칼릭스가 말을 잃은 순간은 굉장히 진귀한 광경이다. 때문에 기억의 서랍에 애지중지 보관했다.
레아가 후다닥 나가고 난 뒤, 그다음 상황은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말이다.
[큼, 큼. 주군, 괜찮으십니까?]
[응. 괜찮아.]
칼릭스는 과연 사르르 웃었다.
[내가 걱정할까 봐 컨디션이 좋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했잖아.]
‘……때로는 정신 승리가 심적으로 평온을 주기 마련이지.’
조금 짠한 기분이 되어 리반은 코밑을 슥 훔쳤다.
그때, 샤를리즈가 다시 물었다.
“리반, 교황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어?”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가물가물합니다. 워낙 신실하게 기도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리반이 비꼬듯 말했다. 성축일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교황이지만 그럼에도 반발은 적다.
교황이 신에게 기도할 때마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 어느 정도씩은 해소된 덕택이다.
“차라리 튜베롯 군락에 불을 지르셨다면 덜 충격적이었겠습니다.”
교황을 끌어내기 위함이라면 ‘신의 날개’라는 애칭까지 있는 꽃들이니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었을 것이다.
샤를리즈가 눈을 부릅떴다.
“무서운 이야기하지 마.”
“교황 전용 기도실 폭파시킨 것보다 더 무서울까요?”
코웃음 친 리반이 털썩 주저앉았다.
“그럼 앞으로도 계속 폭파할 생각이십니까? 길면 꼬리가 잡힐 텐데요. 아니, 애초에 어떻게 하신 겁니까, 그거?”
샤를리즈가 웃었다.
“희망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