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칼릭스는 왜인지 샤를리즈가 로나터스 후작을 꺼림칙하게 여기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로나터스 후작저를 방문할 예정입니다.]
초연한 듯 텅 빈 눈이라든가, 자꾸 허공을 더듬는 시선이라든가.
혹시 무슨 일이 있었나 싶어 무례임을 알면서도 함께 로나터스 후작저를 찾았다.
그러나 그 대단한 외골수는 단어 선택까지 고르고 고르며 샤를리즈에게 시종 조심스러웠다. 본래 성정이 조금만 더 누그러졌다면 경어를 쓰겠다고 나섰을지도 모를 만큼.
‘샤를리즈가 홀로 방문했던 때와 반응이 다를 수도 있겠어.’
세간에 퍼진 악명의 절반만큼이라도 실제라면 다행일 텐데, 안타깝게도 샤를리즈는 왜 저번과 다르냐며 빈정거릴 성정이 아니었다.
그래서 칼릭스는 로나터스 영식의 표정을 종종 살폈다. 동생에 비하자면 확연히 표정 관리에 서투른 그를 통해 무언가를 얻어낼 수 있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식은 눈알을 굴리며 샤를리즈를 훔쳐보기를 반복했다.
칼릭스는 어쩐지 미묘한 기분이 되어 그 꼴을 관망했다.
시선을 느꼈던지 반사적으로 그를 쳐다본 영식이 화들짝 놀라더니 거의 접시에 얼굴을 처박았다.
로나터스 후작의 축객으로 모두 물러가 더는 영식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때에도 칼릭스는 그 순간 느낀 감정을 곱씹고 있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조소했을 때.
테이블에 묵직한 물건이 놓였다. 고급스러운 벨벳으로 감싼 상자였다.
“…….”
언제 동요해 멈칫했냐는 듯 샤를리즈의 손가락 끝을 가볍게 누른 칼릭스는 다시 멈췄다. 손에 힘이 들어갔음을 스스로도 알았다.
“소문이 파다해 공녀도 이미 들었겠지만…….”
상자가 열리고, 내부에 든 것이 고스란히 시야에 펼쳐졌다.
“이 또한 용의 안배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판단은 적합한 사고방식을 거치지 않았다. 논리도, 근거도 필요 없었다.
행동의 이유조차 알 수 없었다.
다만 이래야 한다는 생각만이 극에 달한 경종처럼 뇌리를 울렸다.
칼릭스는 샤를리즈가 그것을 보지 못하도록 그녀의 눈꺼풀을 손으로 덮었다.
[―그나저나 인간의 몸으로 소화되더냐?]
[기억이 온전하지 않더군.]
[―아직 남은 신성력이 그렇게 너를 보호했구나. 제 주인 생각하는 착한 아이들을…….]
얼마 전. 들으라는 듯 혀를 끌끌 차는 것도 모자라 힐끔거리며 곁눈질하던 소년은 ‘쳇’하고 혀를 차더니 허공에 털썩 앉았다.
칼릭스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왜, 내 힘이 부러우냐? 그리워?]
[이전이라면 네가 이리도 태평하게 있지는 못했겠다는 생각은 드네.]
[―저, 저, 저 끼리끼리의 표본 같으니라고!]
[샤를리즈와 내가 잘 어울린다는 뜻인가?]
[―그래! 그래! 그래!]
[고맙다고 말해두지.]
그때 그는 조금 웃었다.
[그러니 나도 한 가지 말해주겠어. 네가 했던 그 말, 언젠가 분명 후회하게 될 테니 일찍 해결하는 게 좋을 거야. 알겠지만, 인간은 백 년을 살기도 힘들거든.]
[―내가 한 말, 틀린 거 하나 없다.]
아니, 이것은 용의 안배가 아니다.
“어서 의원을 불러라! 어서!”
로나터스 후작이 벌떡 일어나 문으로 고개를 돌린 채 외쳤다.
무너지는 샤를리즈를 품 안 가득 안으며, 칼릭스는 제 기억에 없는 성물을 집요하게 노려봤다.
깨진 거울이었다.
* * *
눈을 떴다.
“아, 아가씨. 단잠을 방해해 죄송하오나 약속 시각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일견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는 시녀의 손은 벌벌 떨리고 있었다.
‘이른 시간부터 열심히 일했나 보군.’
아무튼 약속이 있다니 물었다.
“약속?”
“예. 신관과의 약속인지라 아무래도 늦으면 아가씨께 좋지 않을 듯하여…….”
“신관과 약속이라고.”
이상하다.
나는 처절하게 거절당해 그런 약속 잡은 적 없다.
그런데 더 이상한 건, 여기가 리엔타 공작저의 내 방이라는 것이다.
“아가씨. 그럼 세안을…….”
“말 끊어서 미안한데, 거울을 부탁해도 될까?”
“예? 예? 아, 예!”
기어코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시녀가 거울을 건넸다.
동그란 거울 안에 있는 여자는 샤를리즈 리엔타가 맞았다. 단 한 번도 풀어진 표정을 해 본 적 없을 것 같은 서늘한 얼굴은 살이 많이 내린 탓인지 이제는 싸늘하기까지 했다.
‘여기, 설마…….’
생각한 동시에 채비를 서둘렀다.
그렇게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아가씨, 제 손을……. 아가씨?”
에반스는 없었다. 나는 이름 모를 리엔타의 기사를 지나쳐 달렸다.
약속 장소는 신전의 깊은 곳에 있는 응접실이었지만, 그보다 더 깊은 곳이 내 목적이었다.
지금이 정확히 원작 속 어떤 시기인지는 몰랐다. 어쩌면 사샤를 두고 거래하러 가던 길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이후일 수도 있겠다.
그때, 머릿속에 정보가 떠올랐다.
‘나는 사샤를 도저히 죽일 수가 없어서 칼릭스에게 거래를 제안했어.’
이 길의 끝에 분노한 교황이 있다면 오히려 환영이다.
내달리던 발은 점점 늦어져, 이제는 느긋하게 걷는 걸음이 되었다.
헥헥거리며 나를 쫓아오던 신관이 앞장섰다.
“시간이 촉박하지 않아 걸어가셔도 괜찮습니다.”
나는 줄곧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교황을 만날 수 있을지 말이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곧 수석 신관님께서 오실 겁니다.”
“…….”
‘그’ 샤를리즈가 달리기까지 했는데 약속 상대는 늦게 온다니 불호령이 떨어지기라도 할까 봐 두려운 듯 신관은 재빨리 나갔다.
‘……, 99, 100.’
신관이 적당히 멀어졌을 즈음 자리에서 일어났고, 동시에 문이 열렸다.
“이런. 환대해주시는 겁니까?”
로단테가 아닌 남자가 웃었다.
가만히 바라보자, 그가 “음.” 하며 곤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제가 늦었습니까?”
“아니요. 늦지 않았습니다.”
로단테는, 그 성실한 아이는 아무리 흑화했다고 해도 귀찮다는 이유로 가짜를 내세우진 않을 거다.
애초에 저 남자는 낮은 지위의 신관 같지 않기도 했다.
‘연기할 가치도 느끼지 못한 건가. 아니면 그저 대외적인 시선만 피할 뿐 샤를리즈에게 숨길 생각은 없었을 수도 있겠군.’
“그런데…….”
남자의 자홍색 눈이 그 순간 가늘어졌다.
“만남을 청하기는 했습니다만, 정녕 걸음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나는 일단 침묵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쪽은 ‘신의 날개’라는 별칭이 있는 꽃까지 불태웠는데, 공녀님께서는 약조를 지킬 생각이 전혀 없으시지요.”
“지킬 생각이 없는지 어떻게 압니까.”
“선황자가 독약을 먹었다는 소식에 혼비백산해 달려가더니 살려내셨지 않아요.”
“독약이라면 나보다 엘루이든 대공이 해결했겠죠.”
남자가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그래서 알았다.
‘……튜베롯 독약이었나.’
과연 남자는 말했다.
“튜베롯을 보관하기라도 하셨습니까? 공작가의 재력이라면 가능하겠군요.”
재배가 아니라 보관을 말했다. 신전 외의 장소에서 키운 꽃은 효과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제 기억으로는 공녀께서 아카데미에 재학할 때 꺾은 꽃 말고는 달리 없는데…….”
이쯤 해서 나는 눈물을 머금고 일어났다.
이 성질머리에 괜히 미주알고주알 대답했다가는 오히려 의심을 사 가짜 정보나 듣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진실인지 거짓인지 헷갈리느니 정확한 진실만 알아 두는 게 나았다.
“불쾌하군. 취조가 하고 싶다면 차라리 날 고발하지 그래.”
“취조라니요. 아닙니다.”
남자가 양손을 들어 올렸다.
“어차피 해독 방법을 공녀님만 알고 계신 것도 아니니까요. 실제로 공녀님께서도 깨어나셨지 않습니까.”
남자가 애석하다는 듯 시선을 내렸다.
나는 멈칫했다.
“아버지께 해독 방법을 알려준 게 신전이었나?”
“부녀간 소통이 짧은가 봅니다.”
나는 성큼 거리를 좁혀 물었다. 떨리는 손을 말아쥐어 가렸다.
“대가로 아버지에게서 무엇을 가져갔어.”
“대가를 물으시면서 정작 대가를 주실 생각은 없으신 건 아니겠죠?”
남자가 조금 웃었다.
“튜베롯이 공녀의 수중에 없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엘루이든에도 마찬가지였겠죠. 그런데.”
그가 내 팔목을 붙잡았다. 의도치 않은 동작이었던 듯 금세 다시 떼어졌지만, 짧은 순간 전달된 강렬한 힘만큼은 숨길 수 없는 진심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독하신 겁니까?”
“그게 왜 궁금하지? 해독제가 시중에 풀리기라도 할까 봐 두려운 사람도 아니고.”
“신전은 장사치가 아닙니다. 다만, 공녀로서도 대답하시는 편이 좋을 텐데요. 맹독의 유일한 해독제를 불태우셨지 않습니까. 아무리 공녀의 평가가 밑바닥이라도 이건 사안이 다르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대안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진짜 밑바닥을 전전한 기억은 사샤와 나의 공통점이다. 또 다른 공통점은, 그래서 이런 쪽으로는 눈치가 빠르다는 거다.
나는 피식 웃었다.
“어떻게 해독했냐고? 울었어. 아주 볼썽사납게 소리 내어 엉엉 울었지. 그래서 신이 내가 불쌍해 기도를 들어주신 모양이야.”
내 말이 진실임을 알아보려는 듯 남자가 나를 주시했다. 이윽고 묘한 미소가 그의 입술에 걸린 순간.
나는 튕기듯 공간 밖으로 빠져나왔다.
* * *
그리고 다시 눈을 떴다.
달빛만이 시야를 밝히는 밤이었다.
방의 조명을 켜 내부를 확인할 생각으로 상체부터 일으키는데, 무언가 툭 떨어졌다.
곱게 접힌 흰 수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