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그래서 이곳이 엘루이든 대공저임을 알았다.
‘보자, 보자.’
검지로 이마를 꾹꾹 눌렀다. 직접적 수단을 거쳐 발굴된 기억은 이윽고 선명해졌다.
로나터스 후작이 보인 물건을 보고 그대로 기절했다. 크게 보면 익숙한 패턴이었다.
‘성물이었나 보네.’
하긴, 용의 둥지에서 발견한 것이니 성물이 아닌 게 더 이상하긴 하겠다.
‘이번에는 칼릭스 보고 기절한 게 아니라 바로 기절했고, 꿈속에서 평소랑 다르게 내 의지대로 움직였지.’
그곳에서 눈 떴을 때는 꿈 버전 원작이라고 의심 없이 받아들였는데, 일어나 돌이켜봐도 개꿈 같진 않았다.
‘개꿈이라고 하기에는 저놈이 나를 죽이려고 했을 때 깨어난 게 기가 막힌 타이밍이기도 했고.’
사람 죽이려고 하기 직전에 웃다니 아주 상종 못할 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무튼 내 목적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여기는 경험상 칼릭스의 침실 같은데, 어두워서 그런지 현실인데 영 현실이 아닌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곤란해.’
꿈속의 나는 칼릭스에게 한창 반말 중인 시기다. 자칫하다 입에 밴 대로 착각해 싸가지를 말아먹을 수 있다!
……심지어 최근에 이미 전적도 있다.
다만, 그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협탁을 샅샅이 살폈는데, 쪽지는 보이지 않았다.
‘머쓱하군.’
사실 불을 환하게 켜서 여기는 현실이라며 머리에 알리는 것도 칼릭스가 옆에 있으리라고 생각해 그런 거였다.
‘더 머쓱해졌어.’
뻘쭘하게 침대 아래로 발을 내린 순간이었다. 테라스 문이 열리고, 달을 등진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역광 때문에 표정은 알 수 없었다.
“일어났어, 샤를리즈? 이틀만이야.”
목소리가 다소 낮았다. 마치 아주 긴 말을 하고 난 직후의 것처럼.
“몇 번이나 내가 곁에 없어야 깨어났으니, 이번에도 혹시 그러진 않을까 싶었는데.”
칼릭스가 짧게 웃었다.
“더 쉬도록 해. 이틀 동안 잠을 잔 건 아니니 많이 피곤할 테지.”
여기는 칼릭스의 침실이다.
나가야 하는 사람은 나였다.
‘많이 피곤한가 보다.’
완곡한 축객령에 어쩐지 머쓱하면서도 조금 섭섭한 기분이 되어 슬금슬금 일어났다.
“어딜 가?”
이윽고 칼릭스는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아.”
당황한 듯 마른 입술도 축였다.
아주 짧은 순간, 바라보고 있어 목격할 수 있었던 광경이 어쩐지 도착적이라는 감상은 내 머리가 썩어있어서 그런 게 맞다.
“미안해. 나가라고 한 말이 아니었어.”
이틀간 칼릭스는 아무래도 잠도 안 자고 일만 했나 보다. 이 일이 마무리되면 칼릭스에게 휴식의 즐거움을 알려 주고 싶다는 단기 목표가 생겼다.
“아닙니다. 어차피 라베트 서신 확인하려면 가야 돼요.”
“엔젤의 그 사건 때문인가?”
“예.”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직후 새삼 묘한 기분이 되었다.
‘엔젤. 서신.’
기억은 하고 있지만 자주 떠올리지 않은 탓에 낯설었기 때문이다.
‘엔젤에서 시작되었다는 행운의 편지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발신인 불명이기까지 했다.
내가 행운의 편지를 보내거나 이딴 거 왜 줬냐고 잡아낼까 봐 겁이 나 치밀하게 굴었다고 생각한 건, 처음에만 그랬다.
‘수상하긴 해.’
“그 건이라면 나도 알고 있어.”
목소리보다도 내 손을 잡은 온기가 먼저였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칼릭스는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줄곧 느낀 묘한 위화감의 정체를 그제야 알았다. 그는 이상하게도 조급해 보였다.
여상한 목소리로 이어진 말은 다소 뒤늦었다.
“아직 의식을 찾지 못한 이들도 있다고 하더군. 튜베롯이 원료인 극독은 맞지만, 개량된 모양이야.”
[튜베롯을 보관하기라도 하셨습니까? 공작가의 재력이라면 가능하겠군요.]
로나터스 후작은 후작저의 정원에 핀 튜베롯을 통해 의식을 찾았다.
그렇다면 자홍색 눈의 남자가 말한 저 시기는 신전 내의 것으로만 가능하도록 개량이 된 이후였던 모양이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꿈을 꿨는데요. 아마 성물 덕택인 것 같아요.”
신빙성을 더하기 위해 슬쩍 덧붙여 보고는 목격한 것을 설명했다.
칼릭스는 긴 이야기를 잠자코 경청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량을 계속하는 이유는 보다 다양한 효과가 목적일 수도 있겠지만 해독이 신전의 것으로만 가능하도록 하는 게 아닌가, 하고요.”
그 남자는 내 말이 진실임을 알아보려는 듯 내 눈을 주시했다. 그래서 나도 그를 관찰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마지막에 스친 찰나의 희열을 목격했다.
“신전 외부와 내부 토양의 차이.”
잠시 생각하듯 눈을 여닫은 칼릭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튜베롯은 품종을 개량하기에는 별칭 때문에 인위적으로 손을 대기 어려워. 그렇다면 키워드는 신전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어.”
“신성력일 수 있겠네요.”
외부의 신성력뿐만 아니라 내부의 신성력으로도 해독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
“그럼 개량한 독을 통해 신성력을 보유한 사람을 찾을 수도 있겠습니다.”
신성력 보유 여부 자체를 구별하기는 쉽다. 문제는 신전의 성물로만 판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방법은 다소 품이 들지만 신전의 눈에 띄지 않고 신성력을 가진 사람을 확보할 수 있다.
그때, 칼릭스가 문득 생각난 듯 “아.”하고 나직한 탄성을 내었다.
“그러고 보니 교황이 의식을 찾았어.”
마치 봄이 오니 꽃이 폈다는 투의 무심한 목소리였다.
교황의 얼굴 특징을 묻자, 답은 금세 돌아왔다.
“머리카락은 백금색이야. 대대로 교황은 그런 머리카락 색이었지.”
신수가 은색 용이다 보니 비슷한 신성력을 가졌을 때 그런 계열의 머리색을 교황으로 예비한다는 정보도 습득하게 됐다.
“눈동자 색은 짙은 붉은색이라 자주색에 가까웠지만, 색이 더 짙어졌을 수도 있겠군.”
나는 눈을 깜빡였다.
“꿈에서 본 그 신관이 교황이었어요.”
‘성격 엄청 안 좋아 보이던데…….’
한때 나 또한 성격 파탄자였다. 단순히 성격 안 좋다고 의심하는 게 아니라 근거가 하나 더 있다.
‘튜베롯 독약에 대해 잘 알고 있었어.’
안 돌아가는 머리 굴리느라 이제야 알았다. 칼릭스가 고요했다.
또 묘한 위화감이었다.
쳐다보자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웃었다. 그래서였는지도 몰랐다. 기어코 유려한 얼굴선을 감싸고 말았다.
“나 봐요. 무슨 일 있는 거죠?”
한참 뒤 눈꺼풀이 위로 올라가고,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의 푸른 눈은 언뜻 무감했다.
감정을 갈무리한 뒤라 흐릿해졌으나 마치 오래도록 겹겹이 퇴적된 무언가와 닮은, 그것의 본질을 알 수 있었다.
어렵지 않았다.
그건 나도 가지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 * *
샤를리즈가 쓰러진 직후, 칼릭스는 곧장 귀택했다.
더는 게릭을 부르지 않았다.
“나타나. 네게 묻고 싶은 게 있어.”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대고 한 말이었으나 대답은 오래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길게는 못 있는다.
“내 말을 들을 수 있는 걸 보면, 샤를리즈와 계약했나 보군.”
―그래. 맞다.
도마뱀의 형태로 현신한 신수가 코를 찡긋했다.
―그런데 진짜 묻고 싶은 건 달리 있지 않아? 어느 정도는 대답할 수 있다.
“샤를리즈가 감추고 있잖아.”
칼릭스는 샤를리즈의 손을 내려다봤다. 감히 만지지는 못했다.
“그러길 바라고 있으니 나는 아직 몰라야 해.”
변수를 용납하지 않아 모든 귀족가의 정보를 획득하고 분석하고 기억한 남자가 되뇌듯 혼잣말했다.
―……너도 짐작했겠지만, 그 성물. 내가 쥐여 준 게 아니다.
“그래. 알고 있어.”
칼릭스는 무감각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 성물, 기억에 없었는데 혹시…….”
―그만.
신수가 다급하게 말허리를 잘랐다.
눈꺼풀에 가려졌다 드러날수록 무감했던 푸른 눈동자에 감정이 하나씩 새겨졌다.
잠이 든 샤를리즈에게 그가 말할 수 있는 모든 정보를 속삭였다.
하루가 흐르고, 이틀이 지났다.
샤를리즈의 두 눈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다.
그 모습이 언젠가를 떠올리게 했다.
[후회할 거다. 후회할 거라고! 여자 하나 때문에 영생을 포기해?]
아쉬운 건 영생이 아니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태어난 것은 모두 사그라들기 마련이다. 때로는 영원하지 않아 영원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기한이 정해져 있어서, 미룰 수가 없어서, 그래서.
흰 꽃밭이 있던 자리를 눈꺼풀 안쪽에 아로새기며, 칼릭스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녹안과 마주쳤다.
자리를 비운 건 아주 짧은 시간에 불과했는데.
그것이 마치 그가 곁에 있는 것을 샤를리즈의 본질이 거부하는 것 같았다.
그것을 이해했다.
“시작보다도 끝이 먼저 더 보였어요. 그래서 망설였어요. 끝이 예고된 관계를 시작한다는 것 말이에요.”
언제나 변함없는 녹안이 그를 응시했다.
그건 우연히 발견한 이정표였다. 우연을 더는 우연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은 언제일까.
그것은 다음을 기다리고 말게 될 때였다.
다시 만나기를 바라며 걸음을 이어갔다. 이윽고 끝나지 않는 삶의 목적이 됐다.
그래서 그 눈이 가려지는 게, 그토록 싫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는 아직도 두려워.”
“…….”
“하지만 언젠가의 두려움을 오늘도 계속 곱씹으면, 나는 당신과 헤어질 때까지 매일 두려울 수밖에 없어.”
“나는…….”
하려던 말은 혀 위에서 사그라들고 말았다. 이제는 할 수 없게 된 말이었다.
그래서 안도했다. 샤를리즈는 몰라도 되는 무게가 무의식적으로라도 새어 나가는 일은 없게 되었으니까.
“……나도 너를 잃을까 봐 두려워.”
평범한 사람처럼 산다면 평범한 사람과 같은 수명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근거 없는 희망을 붙잡아 볼 만큼.
“사람은 모두 죽습니다. 하지만.”
샤를리즈가 말했다.
“죽음 앞에서 끝의 끝까지 발버둥 치겠다고 약속할 수 있어요.”
눈에 보이는 증표가 없어도 믿고 싶은 맹약이었다.
칼릭스는 마침내 웃었다.
“그러지 않아도 괜찮아.”
손 안의 온기가 빠져나간다. 뒤늦게 그것을 잡으려고 했으나, 기어코 놓치고 말았다.
무엇이 틀렸지? 다음에는 잘못하지 않을 수 있었다.
기억을 마구 헤집는 순간 다가온 것은 익숙한 온기였다. 그의 목을 감싸는 팔이 보드라웠다. 가까워졌다. 그것은 낯선 촉감이었다.
숨결을 공유하는 감각은 규정된 단어로 표현할 수 없었으나, 동시에 설명할 수 있었다. 샤를리즈는 지금 정말로 살아 있다고. 그의 곁에 있다고.
이보다 더 가까운 거리에서 볼 수 없을 눈동자가 이윽고 내리뜬 눈꺼풀 아래 가려졌다.
한 가지 의미로만 뇌리에 새겨져 있던 동작은 다른 의미로 덧씌워진다.
그건 일종의 신호탄과도 닮아 있었다.
이상하게도 많은 것을 잊게 됐다. 오직 더 깊이 맞닿고 싶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칼릭스는 샤를리즈를 항상 데려가는 세상에서 그녀를 감추듯 절박하게 안은 채였다.
* * *
어쩌면 우리는 몽글몽글하고 애틋하기만 하지 않은 게 당연한 것 같기도 하다.
계속 엇갈리다가 겨우 맞닿았으니 다시 엇나갈까 봐 걱정하는 건, 그래서 두려운 건 그만큼 좋아하고 있다는 방증 같기도 한 것이다.
‘그래도 로제타한테 한 번 물어봐야지. 리반은 모를 게 분명해.’
아무튼 눈을 번쩍 떴다.
‘좋았어. 내가 먼저 일어났어.’
이전 생의 특기를 살려 스르르……라고 하기에는 다소 거쳐야 하는 단계가 있기는 했으나 어쨌거나 문 앞까지 도착했다.
그리고 쾅쾅쾅!
‘야이씨!’
후다닥 밖으로 나오자, 희게 질린 얼굴의 제이가 나를 반겼다.
“공녀님……? 아, 죄송합니다. 제가 방을 착각했나 봅니다.”
깍듯하게 사과하고 돌아서는 제이에게 나는 눈물을 머금고 달려갔다.
‘아이고, 나 죽는다.’
“전하의 침실 맞아.”
제이는 그러니까, 정신이 없어 보였다.
나는 무슨 일이 있냐는 뜻을 담은 눈빛을 보냈다.
경황없는 얼굴로 입을 몇 번 여닫은 제이가 멍하니 문을 바라보며 가까스로 말했다.
“선황비 전하와 관련된 사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