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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156) (156/232)

156화

돌계단을 밟는 소리가 다소 불규칙했다.

‘예상보다 늦었군.’

리닉스 공작은 느긋한 기분이 되어 메마른 돌벽에 등을 기대었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건 그가 생각한 사람은 비록 아니었으나, 아주 생뚱맞은 얼굴도 아니었다.

“무슨 일로 또 여기까지 오셨나?”

그는 이미 샤를리즈의 목줄을 하나 확보한 상태였다.

공녀로서는 기도실 폭파 건을 비밀에 부칠 수 있겠다고 과신했을 터다. 유일한 관련자도 결국은 협조한 셈이니 밝혀지는 일은 없으리라고 말이다.

제 딴에는 머리를 굴렸지만 한참 모자랐다.

‘공녀가 모르는 게 있지.’

흑마법사들은 그레고리 리닉스에 대해 발설할 수 없도록 제약이 걸려 있다.

신전 기도실 폭파 주범. 꽤 거창한 타이틀은, 리엔타 공작이 면책권을 사용해 목숨은 건진다고 해도 지워지지 않을 낙인으로 공녀에게 남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그레고리 리닉스는 여기서 살아서 나가지 못할 것이라고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때, 불쑥 이질감을 느꼈다.

꽤 길게 혼자만의 생각을 하고 있었음에도 공녀는 아무런 대답이 없던 것이다.

‘뭐지?’

창살 바로 앞까지 다가오더니 자리에 털썩 앉아 그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그건, 마치 구경거리가 된 듯해 굉장히 치욕스러웠다.

리닉스 공작이 얇은 입술을 비틀었다.

“이건 또 뭐 하자는 거지?”

샤를리즈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이상하게도 불길한 기분이 되었다.

“뭐 하자는 거냐고 물었어!”

쩌렁쩌렁한 노호가 막힌 공간을 울렸다.

공작이 뒤늦게 혀를 짓씹었다. 과민하게 반응한 게 맞았다. 수세에 몰려 있다고 보여봤자 좋을 게 없음에도.

그러나 피식 웃는 얼굴을 본 순간. 패착은 옅어지고 그만큼의 분노가 자리를 메웠다.

샤를리즈가 느릿느릿하게 말했다.

“그래. 어디 한번 해 봐.”

그게 끝이었다.

미련 없이 일어선 인영이 멀어졌다.

‘한번 해 보라고?’

그리고 그 밤.

투웅―

창살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있던 자물쇠가 저 홀로 부서지더니 돌바닥에 추락했다.

* * *

청춘남녀가 연애 한번 해 보자는 게 이렇게 비장하고 무거워질 일인가 싶었던 게 바로 오늘 아침이다.

그러나 내가 간과한 게 하나 있었다.

여기는 바로 막돼먹은 소설 속이라는 거다!

‘사람 죽이려는 것들이 둘러싸고 있으니 뭐든 불안하고 걱정되는 게 당연한 거였어!’

운 좋게 부잣집 딸로 태어난 건 좋은데, 괜히 얻는 건 없다고 도처에 내 목 노리는 것들이 산재했다.

‘흑.’

비탄을 자양분 삼아 생에 대한 의지를 다지는 유익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때였다.

나는 먹이를 낚아채는 한 마리의 매처럼 고개를 번쩍 올렸다.

리반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의 눈꺼풀이 통통했다.

못 본 척 다시 고개를 수그렸다. 꼴 보기 싫어서 그런 건 절대 아니다.

그런데 슬쩍 사라질 줄 알았던 사람이 정작 다가왔다.

“공녀님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리반은 또 놀랐다.

‘많이 퀭한가.’

잠을 좀 못 자긴 했는데.

“왜 이렇게 살벌……, 아닙니다. 다음에 인사드릴까요?”

“지금 해.”

“감사합니다.”

리반이 깍듯하게 허리를 숙였다.

“공녀님 덕택에 기사들이 그 저택으로 워프된 게 아닙니까. 용이 공녀님의 기도에 감명받아서요.”

리반에게 용을 설득시키자며 꼬시긴 했다.

[흑마법은 신성력과 상반되는 힘이지. 악랄한 것들이 용이 잠잠한 틈을 타 활개 치고 있어. 그러니 ‘이래야 하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하는 의미로 용의 입장에서 할 만한 말을 써 보는 게 어떤가 싶은데. 리반의 생각은 어때?]

[괜찮은 것 같습니다.]

[좋아. 흠……. 그런데 대뜸 쓰기에는 어렵겠지. 마침 용의 레어로 가는 기사들이 있으니 그 상황으로 연습해보자.]

‘어라…….’

나는 눈을 굴리다가 대답했다.

“그런 거라면 리반의 공이 가장 크지. 용에게 할 말을 써 준 게 바로 그대잖아.”

“아닙니다. 공녀님이 대단하십니다.”

그렇게 ‘네가 더 잘났다’고 금칠해주는 시간이 흘렀다.

“우리 둘 다 잘했어.”

“그렇습니다. 다 잘했습니다.”

대충 합의점을 찾아 악수도 했다.

리반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맞잡은 손을 흔들다가 “아”하고 서두를 열었다.

“상세한 이야기는 아직 듣지 못하셨지요? 선황비 전하께서는 저택의 지하에 계셨고, 현재 대외적으로는 엘루이든과 무관한 저택에 머무르고 계십니다. 아직 의식을 찾진 못하셨고요.”

리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랬다. 선황비는 그 저택에서 발견됐다.

‘인질에 거취에 대한 정보를 얻고도 이상한 느낌 받았던 게 이것 때문이었나 봐.’

과연 멘탈을 탈탈 흔들 수 있었겠다.

나도 어두운 얼굴로 물었다.

“리반은 잉잉 운 것 같고, 칼릭스는 괜찮아?”

“잉잉이라뇨!”

언제 격분했냐는 양 리반이 다시 다소곳하게 대답했다.

“방금 전, 귀택하셨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선황비 전하의 상태 자체는 문제가 없는 데다 해독 방법을 달리 아셔서 그런지 평소처럼 일정을 수행하고 계십니다.”

공교롭게도 칼릭스와 나는 어젯밤 다른 해독 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사샤는?”

“사샤 님께서는…….”

리반의 낯빛이 한층 어두워졌다.

“기억이 없으시니까요. 일단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럼 나는 가 볼게. 리반이 칼릭스 곁에 있어 줘.”

“공녀님께서는요?”

슬프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방인이 대뜸 끼어들면 더 힘들 거다. 같은 시간을 공유한 사람이 나을 것이다.

살짝 고개를 젓자, 리반은 조심스레 인사하고는 다시 사라졌다.

조금 이상했던 건, 왔던 길로 돌아간다는 것이었다.

‘나한테 이야기하느라 휴식 시간 다 까먹은 건가?’

허어…….

나는 마른 눈가를 구부린 손가락으로 찍어 냈다.

어쩐지, 리반과 돈독해진 느낌이 들었다.

“샤를리즈는?”

“뵙는 건 거절하셨습니다. 아마도 전하가 걱정돼 그러신 것이겠지요.”

“맞아.”

“잠시만요. 저 나가 있겠…….”

“우리는 서로를 많이 걱정하거든.”

마치 사탕을 입 안에서 굴리듯 말한 칼릭스는 달아나는 리반의 뒷모습을 보고 조금 웃었다.

이김에 휴식 시간을 연장하겠다는 야무진 다짐이 엿보였지만, 넘어가기로 했다.

이윽고 선황비를 떠올려 다시 가라앉은 벽안이 기울어졌다.

[신성력일 수 있겠네요.]

아직은 그 단계까지 개량되지 않은 듯했다.

그렇다면 해답은 한 가지뿐이었다.

* * *

그 밤.

수도 리닉스 공작저의 집사가 마부석에서 허겁지겁 뛰어내렸다.

“가주님.”

문지기로부터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어찌나 놀랐는지 모른다.

공작은 초췌한 얼굴에 더러워진 옷을 입은 채 약간의 악취까지 풍겼지만 어쨌거나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하인에게 미리 말을 해 둔 대로 목욕물은 준비돼 있었다.

대략 한 시간 뒤.

늦은 석찬 중인 리닉스 공작은 말끔한 차림새였다.

먹는 모습이 게걸스럽지는 않았으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건 맞는 듯했다.

“카타리나의 상태는 어떻던가?”

“아직 의식이 없으십니다. 다만, 황손께서는…….”

배 속에 어차피 있지도 않은 아이였다. 공작이 입매를 비틀었다.

“황비를 간택하려는 움직임은 있나?”

“잠잠합니다.”

혹자는 황제가 황후를 사랑해서 황비를 들이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뭐, 어떻게 보면 사랑에 근거한 선택이긴 했다. 제 아이에게 칼릭스 엘루이든 같은 존재를 겪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기반이었으니 말이다.

와인잔을 비운 공작이 물었다.

“선황비는 어떻게 되었고?”

“선황비에 관한 이야기는 일단은 퍼지지 않았습니다만…….”

선황비는 저택 지하에 있었다. 각 가문의 가주들도 포함된 출정이었으니 선황비의 얼굴을 기억하는 이들도 분명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잠잠하니 발견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고, 묵인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저택 잠입 가능성은?”

“어렵습니다. 성기사들의 감시가 삼엄합니다. 용의 기적이 도래한 장소라며 지키는 것이지요.”

“핑계도 거창하군.”

익숙한 장소에 있자 다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듯했다. 코웃음 친 리닉스 공작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의 눈치를 살피며 집사가 덧붙였다.

“현재 신도들의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얼마 전 신탁과 저번의 일, 그리고 기도실이 잇따라 공격당하니 집결한 눈치입니다.”

리닉스 공작이 입을 늘려 웃었다.

“적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겠어.”

* * *

햇볕이 유독 따뜻한 겨울날이었다.

리반과 대화를 나누고 슬금슬금 유리 온실로 기어들어 가 낮잠 좀 잔다는 게 벌써 밤이 됐다.

모두가 부지런한 대공저에서 유일하게 게으르고 방탕한 사람은 굉장히 멋쩍은 기분으로 눈을 떴고.

‘어라…….’

모두가 부지런한 대공저에서 가장 부지런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긴 눈매가 물결치듯 접혔다.

“일어났어?”

일어났을 때 잠든 얼굴 보는 것도 개안한 기분이라 좋았는데, 눈 뜬 얼굴이 최고로구나.

요즘 코피가 자주 나는 터라 슬쩍 닦았더니 깨끗했다.

‘어라…….’

어쩐지 하나도 안 추워서 유리 온실 덕택인가 싶었는데 담요가 아래로 툭 떨어졌다. 그런데 내게는 아직도 두 벌의 담요가 더 남아 있었다.

걸치고 있는 하나를 칼릭스에게 내밀고는 떨어진 담요를 야무지게 덮었다.

‘어라…….’

어쩐지 목이 가장 따뜻하다 싶더라니 목도리도 하고 있었다!

“그 목도리를 좋아한다고 했던 게 떠올라서.”

맞다. 그랬었지.

더듬거려 보니 머리 깨질까 봐 칭칭 두르고 있던 그때랑 똑같은 모양새였다.

“나는 네가 주는 건 다 좋아.”

“공녀님께서는 아직 주무…….”

무언가가 툭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리반이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어어. 어어어?”

“뭐야.”

“그보다, 샤를리즈. 차를 마시는 게 좋겠어. 그래도 바깥에 오래 있었으니 말이야.”

“제가 놀랐는데 그보다라니요! 아니, 그보다!”

리반이 빠르게 달려왔다.

“언제 이렇게 가까워지신 겁니까?”

‘이것이 질투?’

하긴, 리반은 오래도록 칼릭스의 곁을 거의 독점하고 있었으니…….

“아니지. 그보다!”

‘어어?’

* * *

이튿날 오전. 한 사내가 수도 경비대를 제 발로 찾았다.

“성전의 기도실을 폭파하라는 명을 받아 수행했지만, 제게 있던 신실한 마음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라는 말을 하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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