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엘루이든 대공저의 정원사들 사이에서 중앙 정원 관리는 속칭 꿀보직이라고 불렸다.
사교계 주요 인사들과 친분을 유지해야 하는 책무가 있는 안주인이 부재한 덕택이었다.
중앙 정원이니만큼 배치된 정원사는 많지만 주인의 취향에 맞게 푸르른 잎사귀만 유지하면 되었던 그 쉬운 일은, 고귀한 아이가 등장하고 다소 복잡해졌다.
때문에 한때 기피되었으나, 정말로 잠시였다.
“너무 예뻐요.”
차마 꽃잎에 손도 못 대고 쪼그려 앉아 감탄하는 모습에 그 누가 뿌듯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촉박한 시일 동안 꽃밭을 갈아엎느라 두 번째로 기피되었던 시일도 퍽 잠시였다. 주인이 엄청난 보너스를 지급한 덕택이었다.
그리고 이제 막 그 세 번째 기피 순간이 다가오고 있는지도 몰랐다.
챙이 넓은 모자를 푹 눌러쓴 사내 여럿이 떨리는 시선을 주고받았다.
‘리엔타 공녀님께서 그렇게 조경에 관심이 지대하셨다던데.’
‘여, 역시.’
‘어쩐지 자주 시찰하시는 듯하였어!’
‘그럼 시작하시는, 그런, 그런 건가…….’
마른침을 꿀꺽 넘기는데, 돌연 공녀가 물었다.
“흰 꽃밭이 이 근처가 아니었나?”
“아. 그 꽃밭은 꽃이 모두 져서 정리하였습니다.”
“졌다고?”
녹안이 미끄러지듯 닿았다. 어쩐지 상체에 힘이 빡 들어가 정원사는 허리를 곧추세웠다.
“예! 그렇습니다. 본래는 꽃이 지기 전에 정리하는 편이나, 주인님께서 가만두라고 하시어서…….”
말끝을 애매하게 흐리고 만 이유는, 공녀의 표정 때문이었다.
네 긴 대답 따위는 관심도 없다는 듯 심드렁한 얼굴을 보고 서둘러 부연 설명을 끊어 낸 선택이 과연 정답이었던지 공녀가 한 걸음 발을 뗐다.
“그 자리로 안내해 주겠어?”
“예!”
삐걱거리는 시간은 다행히도 짧았다. 금세 도착해 재깍 비켜선 정원사는 그 유명한 공녀로부터 “고마워.”라는 답을 듣고 또 삐걱거리고 말았다.
그래서 보지 못했는지도 몰랐다.
너무도 잘 정돈된 토양을 보고 손끝을 날카롭게 세웠던 공녀가 어딘지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는 것을.
* * *
땅을 파헤치며 또 혼자만의 의식을 가져 볼까 했는데 너무도 잘 관리된 토양이었다.
‘어쩔 수 없지.’
아무리 마정석으로 토양 온도를 유지한다고 해도 일 자체가 수월하진 않았을 터다.
이미 정원사라는 직종에 대한 업보는 쌓을 만큼 쌓았다.
‘나, 다녀올게.’
[리닉스 공작이 흑마법사와 접촉한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며 리반은 신기한 듯 나를 힐끔 쳐다봤다.
……이해한다.
‘내가 머리 못 굴릴 것처럼 막살긴 했지.’
카타리나 황후도 나를 그렇게 단정 지었다.
그렇지만 이래 봬도 아카데미를 차석 졸업했는데, 라는 생각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리반도, 칼릭스도 모두 수석 졸업을 한 수재였기 때문이다.
내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칼릭스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지만, 세상일이란 게 원래 그런 법이다.
나도 선택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에 안 들어왔…….
……을지는 모르겠다니.
내가 한 생각에 새삼 충격받으며 도피하듯 과거를 얼른 반추했다.
[대신 손 놓고 보고만 있으라고 하진 말아 줘.]
그러며 칼릭스는 뭉근히 웃었다.
그 순간, 나는 칼릭스 엘루이든의 다양한 표정을 앞으로도 많이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기도 했다.
‘내 목숨이 영순위가 아니면서도 영순위가 되어서 영순위를 유지하는 상황…….’
터덜터덜 옮긴 걸음의 끝은 사샤의 방문 앞이었다. 놀랍게도 리반이 차례를 양보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수감되실 수도 있으시겠지요. 아무렴 리엔타 공작 각하와 전하께서 빼내려고 눈에 불을 켜겠지만 한두 시간은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지 않으시겠어요…….]
‘한때 나도 리반을 동정해 차례를 양보했었는데.’
선택이 겹치다니 신기해서 말해 볼까 하다가 리반의 얼굴값은 앞으로도 변치 않을 테니 감추기로 했다.
아무튼, 다행이었다.
동화책의 다음 권이 오늘 도착한다는 소식을 들은 탓이다.
‘사샤가 동화책은 밤에만 읽는 아기라서 다행이야.’
오늘의 디저트는 딸기색 생크림 케이크였다.
‘딸기. 처음 소풍 갔을 때 사샤 얼굴이 복숭아색이었…….’
나는 후딱 정신 차렸다.
이건 꼭, 죽기 전 과거를 회상하는 꼴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가뜩이나 아슬아슬한데!’
여기는 엄연히 소설 속이다. 괜히 일종의 복선 같은 행동했다가 큰일 날 수 있다!
케이크를 두 번 만에 전투적으로 해치우고 적당히 식은 홍차도 때려 부었을 즈음.
“우응.”
사샤가 입가에 초코 크림을 가득 묻힌 채 울상을 짓고 있었다.
나는 기어코 중얼거리고 말았다.
“아기.”
“아기 아니에요.”
사샤가 얼른 반박했다.
“그냥, 입이 조금 작을 뿐이에요.”
“그래. 사샤는 입이 조금 작은 형님이야.”
울적한 아기를 열심히 얼렀다.
“동생이 태어날 때까지 연마하면 돼.”
“곧 사십구 년…….”
“공부 열심히 하더니 숫자도 잘 세네.”
“네에. 열심히 배웠어요.”
아이가 배시시 웃었다.
절반만 남은 케이크를 열심히 먹는 사샤를 헤벌레해져 바라보다 보니 시간은 금세 흘렀다.
칭찬에 신이 나 열심히 숫자 공부하는 사샤 옆에서 그림책을 탐독하고, 밥도 먹고, 간만에 침대에도 같이 누웠다.
사샤는 벌써 가물가물 눈이 흐릿했다. 동그란 이마에 입술을 꾹 눌렀다.
“좋은 꿈 꿔.”
“네에. 샤를 님도…… 요…….”
잠이 든 앳된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째려보는 시선의 종착지는 당연히 동화책이었다.
‘이 자식.’
『왕녀님은 깨달았습니다. 용사님과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믿은 이유는, 용사님과 마찰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다음 권의 집필을 위해서는 새로운 국면이 필요하겠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했다.
아이들이 벌써 이런 비극을 알게 하다니!
‘두 주인공, 응원했는데…….’
서글프게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다.
『“네 연인의 곁으로 가기를 바란다면 말해. 도와주지.”
이제는 왕녀가 아닌 왕녀님이 웃었습니다.
“이상하지 않아? 왜 내가 한 달도 보지 않은 용사와 사랑에 빠질 거라고 모두가 생각한 걸까. 혼자 갇혀 있던 거면 모를까, 그동안 네가 있었는데.”』
『용은 표정 없는 얼굴로 왕녀를 가만히 응시할 뿐이었습니다.』
이 작자를 더 미워하게 된 바다.
‘리닉스 공작은 이 인간 못 찾았겠지?’
그럼 리닉스 공작이 아직 살아 있을 때 흑마법사를 굴려봐야겠다.
다시 화르르 투지를 불태우며 동화책을 소리 없이 닫고 책장에도 꽂고 왔다.
자그맣고 따끈한 몸이 한 바퀴 빙글 돌아 품에 들어왔다. 보들보들한 머리카락이 볼을 간지럽혔지만 더 깊이 아이를 안았다.
무심코 생각했다.
‘어른이 된 네가 보고 싶어.’
그건 꿈을 통해서도 볼 수 없다. 나는 그 전에 죽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천천히 자랐으면 좋겠어.’
매일매일이 추억으로 빼곡하게 채워져서 밀도 높은 유년기를 보냈으면 했다.
그리고는 품에서 조심스레 떼어냈다.
또 코피가 날지도 몰랐다.
* * *
신전을 어지럽힌 주범이 자수했다는 소식은 수도 전역에 빠르게 번져 나갔다.
여느 때라면 ‘그랬다네요?’ 정도로 끝났을 사안이 주요하게 화두에 오르는 이유는 단연 신탁의 영향이 컸다.
“그래서 신탁은 무슨 내용일까요?”
“곧 발표될 줄 알았는데, 아쉬워요.”
“제 추측으로는 이번 사건과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 싶어요. 사상자도 없었잖아요?”
호사가들도 입맛을 다셨다.
“간만에 큰 내기판이 나올 뻔했는데.”
얼마 뒤, 리엔타 공녀가 수도 경비대에 드나들었다는 이야기도 퍼졌다.
그것은 딱히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간 공녀가 조용하게 살았다는 소식이 놀랄 일이라면 모를까, 저것은 새삼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던 탓이었다.
* * *
“파커 경, 고마워.”
“아닙니다. 도움이 될 수 있다니 기쁩니다.”
저번에 경황없이 당혹스러워하던 제이의 모습은 아직도 뇌리에 박혀 있다. 그래서 이번에는 파커에게 동행을 부탁한 차였다.
막 마차에 오르려던 때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왼쪽을 휙 돌아봤다.
‘어라?’
에반스가 몹시도 충격받은 얼굴로 멀거니 서 있었다.
“……공녀님께서 오늘 수도 경비대를 향하신다고 하셔서.”
맞다. 그래서 어제 내일은 달리기를 쉬자고 했었다.
“그래서 왔습니다…….”
“배웅해 주러 온 건가?”
고마우면서도, 굉장히 멋쩍었다!
‘좋은 일도 아니고 이런 일로 배웅받는다…….’
유도한 방향이긴 하지만, 그래도 건실하기 그지없는 기사에게 경비대 동행도 모자라 경비대 배웅까지 해 보게 만들다니 씁쓸한 기분이 되어 있던 것도 잠시.
‘어?’
에반스는 망토까지 두르고 있었다.
‘……이거 혹시?’
혹시가 맞다는 듯 에반스가 침울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어쩐지 변명을 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경에게 또 슬픈 추억이 남게 될까 봐 그랬어.”
“슬프지 않습니다. 익숙하기도 하고요. 아가씨께서도 그래서 저를 동행…….”
에반스가 불현듯 아리송한 얼굴을 하더니 돌연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외출도 조금 하셨고, 검술 훈련도 어제부로 세 번, 달리시는 데 제가 꼭 필요할 리는 없으시겠지요.”
내 나태함을 증명받고 있다.
“……아가씨.”
‘뭐, 뭐야.’
저 눈을 보아하니 분명 무슨 착각을 거하게 하는 것 같은데, 뭔지 몰라서 해명을 못 하는 상황이었다!
흘긋 에반스를 쳐다본 파커가 슬쩍 뒤로 빠지며 잘 다녀오라고 먼저 인사했다.
그렇게 언제나처럼 에반스와 함께 경비대를 가게 되었다.
혹시 단서를 흘리진 않을지 마차에서 그를 힐끔힐끔 쳐다봤는데, 에반스는 커다란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넓은 어깨를 옹송그리고 있었다.
‘……도대체 뭐지.’
‘역시.’, ‘그때, 마침 서신이 왔었는데.’까지는 귀 쫑긋 세워서 들었는데 입을 가리고 있어 더 이상은 무리였다.
그때, 마차가 정차했다.
신속하게 내린 에반스는 언제 가녀린 낯빛을 하고 있었냐는 양, 주변을 매섭게 둘러봤다.
‘군기가 바짝 들었는데?’
흠.
‘……여기서 무슨 착각 해서 이러냐고 하면 성질 내지 채근으로 들리겠지?’
이래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
‘마침 잘 만났네.’ 같은 말을 해도 문자 자체의 의미로만 해석되는 칼릭스처럼 말이다.
조금 기운이 빠져 터벅터벅 발길 닿는 대로 대강 걸은 끝에 애석하게도 썩 익숙한 장소에 도착했다.
“아, 안녕하십니까. 리엔타 공녀님.”
“리엔타 공녀님을 뵙습니다.”
꿈을 이룬 경비대장과 꿈을 이루게 해 준 일리든이 의자에서 일어나며 인사했다.
‘황제도 알았나 보다.’
하긴 그래도 황제인데 소식통 없으면 그게 더 이상하지.
경비대장이 조심스레 나를 관찰했다.
그 김에 내 눈동자 안에 담긴 순백의 결백도 보라며 눈 크게 뜨고 있는데, 보람도 없이 경비대장이 눈을 피했다.
“얼마 전, 신전에 소동을 일으킨 범인이 자수했다는 소식, 혹시 들으셨을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