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데?”
경비대장은 굉장히 곤혹스럽다는 듯 연신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그으, 그 범인이 말입니다. 공녀님께서 주모자라고 증언하여 절차상 공녀님께 연락드리게 되었습니다.”
일리든이 눈매를 미세하게 찌푸렸다.
“하.”
나는 상체를 그들 쪽으로 가까이 숙였다.
“뭐야. 고작 그런 말 하나 때문에 나를 부른 건가?”
“절차상입니다. 절차상. 헛소리로 제 선에서 치부하기에는 공녀님도 아시다시피 사건이 크지 않습니까.”
‘흠.’
사정사정하는 경비대장으로 보아하니 대다수가 헛소리로 치부하는 모양이었다.
‘시간 끌기는 싫은데.’
“아니야. 그럼 이제 가 봐도 되나?”
“저어…….”
슬쩍 내 뒤를 올려다본 경비대장이 안절부절못하더니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았다.
“신전을 함께 가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 * *
신전에 한 무리로서 도착한 네 명은 가지각색이었다.
한 명은 고고한 기사의 전형이었고, 한 명은 어딘지 군기가 바짝 들어있으며, 한 명은 연신 왼쪽―그렇다. 일리든 포르테가 있는 방향이었다―을 흘깃거렸으며, 한 명은…….
‘히이익!’
검 한번 잡아본 적 없을 금지옥엽의 뒤로 무슨 일인지 검푸른 오라가 보이는 느낌이었다!
안내를 위해 다가온 신관은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인사하고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응접실로 안내하겠습니다.”
응접실은 신전의 퍽 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자 왜인지 모두들 샤를리즈의 눈치를 살피게 되었다. 머지않아 도착한 장소는 간결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곧 대신관님께서 오실 겁니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대신관이라는 사내는 완고한 인상의 중년인이었다. 그러나 혼자가 아니었다.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햇살이 부서지듯 밝은 백금발이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경비대장이 화들짝 놀라 일어섰다.
“교, 교황 성하를 뵙습니다.”
“아.”
저 머저리가.
교황, 라우드가 인자하게 웃었다.
조금 더 시간을 끌며 차분히 샤를리즈의 반응을 이끌어 내고자 했던 본 계획은 망가졌지만, 소득은 있었다.
공녀는 그를 아는 눈치였다.
‘그리 신실한 인물은 아니었는데.’
뱀처럼 간교한 빛이 어린 눈이 제게 인사하는 공녀의 머리를 한 번 스치듯 지나가고.
“모두 고개를 드세요. 범인이 주모자로 지목한 이가 공녀라는 말에 마음이 쓰여 왔을 뿐입니다.”
자홍색 눈이 막냇동생을 바라보듯 퍽 다정하게 기울어졌다.
“공녀와 저는 그대가 모르는 인연이 있답니다. 아직 세상에 태어나기 전, 공녀의 모친에게 축복을 드렸거든요. 그래서일까요. 이렇게 다시 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한편, 샤를리즈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모르는 척보다 아는 척하는 게 나을 것 같기는 했는데, 쟤 개자식이네.’
공작은 저 이야기를 끝의 끝까지 숨겼다.
가뜩이나 공작비의 죽음이 샤를리즈의 탓이라고 몰아간 주변인마저 있던 상황이다. 제 탄생으로 모친의 죽음이 촉발되었음을 확신하게 될까 봐, 가지지 못한 것이라곤 황위뿐인 권력가는 그토록 두려워했다.
‘애초에 저게 축복이긴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말이다.’
순진하게 받아들이기에는 걸리는 게 많아졌다.
본인이 한 말대로 샤를리즈를 찬찬히 바라보던 교황이 이내 웃었다.
“그럼 지체하지 않고.”
그렇게 갑자기 신전 투어가 시작됐다.
도착한 곳은 교황의 기도실이었다.
한때 스테인드글라스로 영롱했던 부분은 엉망진창으로 깨져 있었고, 으슥한 분위기까지 풍겼다.
‘……뭐지. 부서진 잔해를 보며 내 얼굴에 죄책감에 떠오르는지 아닌지를 보려고 이러는 건가?’
샤를리즈가 떨떠름히 생각했다. 결국 표정 관리를 해야 하기는 했다.
신성력으로 보호받는 공간을 가로지른 만큼 꽤 강렬했을 흑마법이 조금이나마 공간에 배어 있던 탓이다.
‘아, 속 쓰려.’
교황이 그 집단과 관계된 게 맞다면 흑마법에 반응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데려온 것일 수도 있다.
슬쩍 살핀 대신관의 표정은 역시 아무렇지도 않았다.
‘흑마법에 크게 데여야 반응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신성력이 있어야 성립하는 것 같으니까.’
신성력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그 낯선 원석이 문득 떠올랐다.
원석은 다시 확인해 보니 산산조각 나 있었다. 입자가 날카로운 모래처럼 되어 버린 그것은 더는 어떤 판별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때였다.
얕은 생각에 잠겨 있던 녹안이 일순 예리한 빛을 띠었다.
망가진 공간을 고요히 살피던 교황이 불쑥 걸음을 떼었기 때문이다.
“범인은 이 일을 계기로 신실함을 깨달았다고 하였다지요.”
“예, 그렇습니다.”
샤를리즈를 상대한 것도 모자라 예상치 못한 거물을 영접한 탓에 넋이 반쯤 나가 있던 경비대장이 삐걱거리며 대답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성하의 자비를 바라며 한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완전히 거짓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기도 합니다.”
날카로운 쇠붙이는 단 한 번도 쥐어 본 적 없을 것 같은 손이 감히 신을 조각한 상을 어루만졌다. 신과 이어질 수 있는 교황만의 특권이기도 했다.
그 순간 닫힌 공간에 보드라운 봄바람이 스친 것도 같았다.
공간은 재정립됐다.
새하얀 빛살 아래, 허공에 비산한 무수한 조각이 그것의 자리를 찾아갔다.
신상에서 손을 떼며 라우드는 다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마치 시간을 돌리기라도 한 듯 말끔해진 공간을 나직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물어보고 한다는 것을. 마음이 조급했습니다. 이제는 참상을 보존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예? 예! 예. 그렇, 그렇습니다.”
기적과도 같은 순간을 목격한 경비대장이 겨우겨우 대답했다.
자애롭게 웃으며 라우드는 우연처럼 샤를리즈를 응시했다.
공녀의 녹색 눈이 짙었다.
* * *
돌아가는 마차 안은 고요했다.
이번에는 에반스가 맞은편을 살폈다.
‘아가씨께서 그런 사특한 일을 하셨을 리는 절대로 없어.’
한번 한 말은 반드시 지키는 분이셨다.
부친으로부터 충심을 지키기 위해 기사위를 사직할까 봐 그를 염려하기까지 한 분이시다!
마음이 기분 좋게 뜨거워졌다.
다시금 의지를 불태우던 때였다.
“에반스 경. 이제 공작저로 돌아가도 돼.”
‘아가씨…….’
“저는 아가씨 곁을 지키고 싶습니다.”
“아니야. 내가 너무 오래 경을 낯선 곳에 데려다 두었어.”
“괜찮습니다.”
“경.”
거스를 수 없는 목소리였다.
“행복하게 살아.”
이상한 기분이 되고 마는 말이었다.
에반스가 말문이 막힌 사이. 마차는 정차했다.
“현관까지 데려다주고 싶지만, 미안하게 되었어. 여기서 내리도록 해.”
리엔타 공작저의 철제 대문 앞이었다.
아가씨가 어떤 기분으로 저 말을 하셨을지 짐작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며칠 후였다.
* * *
신전에 또다시 내린 빛으로 수도는 시끌벅적해졌다.
“그래서 풍비박산나 있던 기도실이 교황 성하의 신성력으로 복구됐다는 거 아니야!”
“그런데 왜 여태까지 가만히 두셨대?”
“그, 그거야 나도…….”
“이 사람아! 이유가 있으셨겠지!”
시끄럽기로는 살롱과 클럽도 마찬가지였다.
“그러고 보니, 자네. 리엔타 공녀가 포르테 경과 함께 신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을 봤다지 않았나?”
“그랬지.”
그래서 근처에서 빛을 볼 수 있었다며 뻐기듯 덧붙인 사내에게 다른 남자가 의심스럽게 말했다.
“그날이 정확히 언제였나?”
“이틀 전이었어.”
“그때라면, 공녀가 경비대에 출석한 날이잖나?”
아닌 척 귀 기울이고 있던 영식이 끼어들었다.
‘공녀라고?’
구석에서 술이나 퍼먹고 있던 에리히가 반응한 것은 그 순간이었다. 술잔을 턱 내려놓고 곧바로 접근하는 귀에, 경악 어린 말소리가 잡혔다.
“에이, 설마.”
“그런데 정말 이상하지 않나? 공녀가 난데없이 포르테 경과 신전을 방문할 일이 무엇이 있는데?”
의문점이 있는 소문이란 자고로 가장 구미가 당기는 법이었다. 하물며 자극적이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그것이 파다하게 번지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 * *
[교황이 신성력으로 기도실을 복구했습니다.]
“저 정도 신성력이라면 황후도 회복시킬 수 있을 터.”
하지만 그렇게 되면 약점을 잡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교황의 신성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증명이나 하는 꼴이 될 터였다.
안토니오 황제는 기어코 펜을 내던지고 말았다.
입술을 마구 짓씹으며 분을 삭이던 중, 누군가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무언가!”
“죄송하오나, 폐하. 세간에 퍼진 소문이 하나 있사온데 확인하시는 편이 좋으실 듯합니다.”
소문이나 귀담아들어야 하는 자리던가.
다시 노성을 터뜨리려던 때.
“리엔타 공녀와 관련된 소문입니다.”
그렇게 바로 불러들여 확인한 소문은, 과연 들어둬야 할 만한 내용이기는 했다.
“공작은 어떻던가?”
“잠잠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긴 하겠다.
‘줄곧 거슬리던 것을 없앨 기회일지도 모르겠어.’
“내 아우의 부인이 될 사람이 이런 괴소문에 시달리다니 마음이 아파져 오는군.”
연극 하듯 과장되게 얼굴을 구긴 황제가 말을 이어갔다.
“이 오명을 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이미 경비대에서 관련이 없다고 변호했다지만, 소용이 없지 않아.”
시종이 눈치 빠르게 말했다.
“그렇다면 공개적으로 반론하는 방법밖에는 없지 않겠는지요.”
“그래. 공개 재판이 어떤지 의사를 물어보게.”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무마해달라고 리엔타 공작이 사정하겠지.’
그러나 돌아온 것은, 수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