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여행이요?”
따끈한 수프를 먹던 사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어쩌다 보니 혼자 가게 되었어.”
“네에.”
스푼을 꼭 쥔 채로 잠시 눈을 깜빡인 아이가 조심스레 물었다.
“언제 가세요?”
“일주일 후쯤.”
“그럼…….”
“응.”
“일찍 오실 거예요?”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리 길지 않을 거야.”
잘했다는 듯 아이의 볼을 쓰다듬으며 나는 신선한 채소를 포크로 찍어 눌렀다. 어쩌면 한동안은 이게 가장 멀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샤는 빈 스푼을 호록 마시고 있었다.
‘사샤랑 같이 못 가서 아쉽다.’ 같은 말을 해야 할 타이밍이지만,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아기가 감옥 가면 안 돼!’
흑마법으로 배 뚫리고 카지노에 이어 예비 철창신세라니. 못 해볼 것 빼고 다 해보고 죽을 수 있을 것 같아 아주 좋았다. 아주 이 세상에 여한이 없을 것 같다.
‘루카스한테 미리 입단속 해달라고 부탁해둬야겠어.’
그 애는 장차 걸출한 정보상이 될 게 분명하다.
‘공녀님, 감옥 간다며?’가 아스라이 들려오는 기분이라 오싹 소름이 돋았다.
‘아니야. 안 갈 수도 있어…….’
열심히 입을 움직이며 오순도순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풀 쪼가리만 먹은 탓인지 벌써 배가 고팠다. 비틀거리며 겨우 칼릭스의 집무실이 있는 층에 도착한 때였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익숙한 남자의 옆모습이다. 잘 정돈된 차림새의 칼릭스는 창문 너머를 응시하고 있었다.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슬쩍 다가가 확인했지만 보이는 거라고는 대공저의 정원뿐이었다.
“신전을 보고 있었어.”
시선은 여전히 저 너머에 고정한 채였다.
“교황의 움직임이 포착됐거든. 공개 재판에 참석할지도 모르겠는데.”
뒷말을 살짝 끈 칼릭스는 물었다.
“어떻게 할까?”
칼릭스가 내 눈을 응시하며 웃었다.
“교황이 참석하지 못하게 만들면 될까?”
문득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이전의 칼릭스라면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을 것이다. 그 찰나의 생각이 문득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이전과 지금의 구분선이 무엇인지.
눈을 조금 더 마주하고 있다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자꾸 마주치는 게 더 나을 테니까요.”
“응.”
“그리고 그렇게 너무 무리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칼릭스의 입술이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편하게 말해주는 줄 알았는데.”
“그때그때 편하게 말하기로 했습니다.”
“어떨 때 편하게 하고, 어떨 때 말을 높이는지는 이번에는 내가 맞추면 되는 거야?”
하얀 꽃밭 앞에서 했던 대화를 칼릭스가 입에 담았다. 나는 어쩐지 아주 옛날 같은 기억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칼릭스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웃었다.
“보상은?”
열렬히 고민하다가 고개를 쳐들었다.
“사샤와의 오후 디저트 1회권을 양도해드리겠습니다.”
“아.”
칼릭스가 낮게 탄식했다.
“엄청난 보상이네.”
“그렇죠? 이 저택에서 모두가 원하는 상입니다!”
얼마나 유익하고 즐겁고 보람찬 시간인지 설명해주려던 때, 칼릭스가 내 머리카락을 왼쪽 귀 뒤로 넘겨주었다.
왼편에 집중된 시선이 문득 기울어졌다. 푸른 눈이 가늘게 웃었다.
“그리고 잊었어, 샤를리즈? 나는 원래 네 뒷바라지하는 걸 좋아했어. 그러니 무리가 아니야.”
그것참…….
“제 기사와 비슷하시네요. 그 친구도 호…… 남에게 퍼주기를 좋아하는 기질이 있거든요.”
“음.”
키 차이가 많이 나는 탓에 아직도 조금 기울어진 미려한 얼굴에 묘한 빛이 깃들었다.
“우리는 남이 아닌데.”
한 몸이 아니면 다 남이지 않은가 싶었으나, 반박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 말이었다.
일주일 후 있을 공개 재판을 준비하느라 마주 앉아 차를 마시는 시간보다는 함께 서류에 고개를 박은 시간이 더 길지만.
그러니까, 우리는 연애 중이다.
* * *
언제 눈이 내렸냐는 듯 유독 화창한 오후였다.
퍽 많은 사람들이 피크닉을 고대하는 아이처럼 수군거리며 기다린 이 날은 바로 공개 재판 당일이다.
명목상으로는 신전 폭파범의 처형을 결정짓는 자리라곤 하나, 그쪽에 관심을 둔 이들은 거의 없었다.
“어떻게 공녀가 재판에 출석하기는 하네요…….”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은 알았지만…….”
“진짜로 오다니…….”
부채로 가로막은 탓에 귀부인들의 목소리는 뒷말이 뚝뚝 끊겼다.
“공녀가 공개 재판은 수락했어도 불특정 다수에게 구경거리가 되어야겠냐며 반박했지만 거절당했다고 들었어요. 진짜일까요?”
“그랬을 것 같기는 한데…….”
“경비대에 제 먼 친척의 부인의 동생이 근무하는데요, 경비대장이 진땀을 뺐다던데요?”
한편, 신사들은 자못 근엄한 체하며 앉아 있었지만…….
“어머나.”
쪼르르 달려온 자체로 속내가 뻔히 보여 그녀들의 비웃음을 사기나 했을 뿐이다.
그런 미묘한 분위기 속에서 황제가 등장했다.
황제의 얼굴은 짐짓 그늘이 져 어두웠다.
[섣부른 짐작일지도 모르지. 그럼에도 어쩌면 황후의 변고와 아예 무관하진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어.]
넋두리처럼 중얼거렸다더니 과연 황후의 친부 리닉스 공작도 황제의 지척에 자리를 잡았다.
말끔하게 면도하고 머리카락을 뒤로 빠짐없이 넘긴 리닉스 공작은 날카로운 안광이 돋보였다.
도박 중독으로 몰락했던 과거, 그 이전의 냉철한 공작 그 자체였다.
‘……어쩐지 화가 나 보이세요.’
‘그러실 만도 하죠. 황후 폐하께서 아직도 사경을 헤매고 계시니…….’
“모두 착석하게.”
그리고 드디어 재판이 시작됐다.
고루한 시대극처럼 이어지던 재판은 주인공이 교체되는 절정으로 접어들었다.
“그러니까, 샤를리즈 리엔타의 사주를 받고 자행한 일이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부르튼 입을 씰룩이며 사내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참고인으로 참석한 샤를리즈 리엔타의 변론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재판장이 수락의 의미로 나무망치를 한 번 두드렸다.
마도구 증폭 장치가 되어 있어 공간을 커다랗게 울린 소음 때문이었을까.
샤를리즈는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한쪽 눈을 찡그리고 몸을 일으켰다.
이곳의 귀족들은 누군가의 몰락 초입을 구경하기 위해 걸음 했다. 대부분은 ‘공개 재판이니 자리를 채워야지 않겠나!’ 하며 눈치를 살피면서도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기웃거렸으나, 개중 사교 시즌이 끝나 지루한 와중 모처럼 제대로 된 ‘소식’에 고양감을 이기지 못하고 소곤거리며 열렬히 추측한 이들도 있었다.
신전을 경애하는 의미로 순백색 드레스를 입었을 테고, 그럼에도 그 특유의 사나운 표정은 여전할 것이라고.
그러나 정작 공녀는 고풍스러운 진녹색 드레스 차림새에 시큰둥한 얼굴이었다.
알아서 비켜주는 사람들 덕택에 거침없이 내딛던 걸음이 마침내 멈췄다.
“샤를리즈 리엔타는 변호하시오.”
“이쯤 되니 제가 앵무새인지 사람인지 모르겠군요.”
샤를리즈가 뇌까렸다.
“같은 말만 반복하게 할 거라면 굳이 제가 나오는 대신 녹음용 마도구를 제출할 걸 그랬습니다.”
“공녀! 정숙해야 할 공간이오!”
“누구보다 정숙하고 있지 않나요?”
유리알처럼 맑은 녹안이 미끄러졌다.
“그러니…….”
단단히 포박된 사내가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이번에는 제가 물어보고 싶어지는데요.”
성큼 거리를 좁힌 희고 고운 손이 사내의 멱살을 거칠게 틀어쥐었다.
“컥!”
“공녀!”
“내가 정말로 네게 신전을 폭파하라고 명령했던가?”
“그러, 시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정말로 그랬다고?”
기사가 조심스레 다가오자 샤를리즈는 손에 오물을 쥐었던 것처럼 멀리 던지듯 툭 놓았다. 반동으로 몇 걸음 뒷걸음질 친 사내가 결후를 어루만지며 대꾸했다.
“제가 가책을 느껴 더는 할 수 없다고 했을 때도 윽박지르시지 않으셨습니까.”
“가책?”
단순히 따라 하듯 읊는 목소리였지만 어딘지 스산한 느낌이 감돌았다.
아니, 그것은 단순히 스산하다는 표현보다는 한겨울의 깊은 침엽수림을 가르는 바람의 온도에 가까웠다.
‘……어?’
사내는 의아했지만, 샤를리즈는 돌아선 뒤였다.
“미리 검수를 거친 물건을 사용하기를 청합니다.”
“불가하네.”
재판장이 엄숙하게 말했다.
“사특한 물질을 재판정에 들일 수는 없는 법일세.”
유착 관계인 재판장을 포섭해 그 가루의 사용을 사전에 막은 리닉스 공작이 지그시 웃었다.
어떤 수를 써도 그의 이름을 끌어낼 수 없을 테지만, 샤를리즈가 계획한 대로 상황이 돌아가도록 좌시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였어.’
느긋하게 등을 기댄 채 별것 아닌 승리의 순간을 만끽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알겠습니다.”
싱거울 만큼 단조로운 목소리였다.
‘……뭐지?’
리닉스 공작의 등허리가 저도 모르게 의자 등받이에서 떼어졌다.
“신문하는 것까지 불허하지는 않으시겠지요.”
“폭력과 겁박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재판장이 다소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본래는 당장 묵살할 법한 요청이었으나 상대가 워낙 고위급 인물인 탓이다.
까딱 고개 숙인 샤를리즈가 곧바로 돌아서자 사내는 마른침을 삼켰다.
‘비록 나는 영예로운 시작을 볼 수 없으나, 우리의 대업은 이어지리.’
이성보다 투지에 불타 어설픈 성격이었다. 그랬기에 리닉스 공작이 꿀 바른 말을 적선처럼 흘리며 개중 선택한 것이기도 했다. 버릴 패로 말이다.
결의를 다진 눈이 샤를리즈를 쏘아보듯 쳐다봤으나, 가당치도 않다는 시선만 되돌려받았다.
그러니까, 대뜸 이런 말을 들으리라고는 예상도 못 했다.
“조사해 보니 너, 꽤 흥미로운 배경이더군. 흑마법사라니 예상도 못 했어.”
“그, 그걸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생각이 아니었다. 사내는 입술을 짓씹으며 눈알을 굴렸다.
‘공녀가 갑자기 저런 말을 터뜨려서, 그래서 순간 당황해서 그랬나?’
사위가 소란해지자 재판장이 나무망치를 연신 두드렸다.
“모두 정숙하시오!”
여전히 싸늘한 겨울을 담은 목소리가 이윽고 다시 질문했다.
“너, 나랑 만난 적이 있나?”
그렇다고 대답하고자 입을 열었는데, 정작 나간 말은 정반대였다.
“없습니다.”
“서신을 나눈 적은?”
“없습니다.”
‘혹시 공녀가 사술을 다루는 건가?’
생각과 달리 이렇게 정반대로만 말하게 된다니 제가 한 추론이 꽤 그럴듯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진실을 말하기로 결심했다.
그때, 샤를리즈가 예고도 없이 불쑥 한 걸음 다가왔다.
거리가 좁혀진 동시에 어째서인지 속이 헤집어지는 격통이 일었다.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 하나만이 뇌리를 가득 메웠다.
“자. 쓸데없는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자. 누가 네게 진짜로 명령했지?”
그러나 저 어이없을 만큼 순진한 질문을 듣자니 코웃음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말할 리가 있겠어?’
그런데 정말로 이상하게도.
벌어진 입 사이로 말소리가 퍼져 나갔다.
마치 수면 아래로 깊이 잠겨 들 때 포말이 터지듯 막을 수가 없었다.
“……리, 리닉스.”
리닉스 공작이 손마디가 새하얗게 질릴 정도로 팔걸이를 거세게 움켜쥐었다.
“그런데 왜 내가 했다고 거짓말했을까…….”
이번에는 말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았으나 결코 다행이 아니었다.
‘그야 네가 주군께 부탁한 일이니까!’
주군이 포함된 문장인 탓에 입은 봉인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이게 맞았고, 조금 전이 틀렸다.
당혹감에 빠진 사내의 두 눈이 가장 신용하는 사람을 향했다.
하필 이 타이밍에 무수한 시선 속 저를 바라보는 멍청한 행태에 리닉스 공작은 이를 악물었다.
경악스럽고도 혼란스러운 침묵에 재판장이 망치를 내리쳤다.
“항변의 시간은 끝났소. 자리로 돌아가시게. 그리고 처벌은…….”
“리닉스 공작 각하는 왜 항변하지 않습니까?”
허공을 꿰뚫는 화살이 지나간 후처럼 소란이 일시에 걷혔다.
말허리가 잘린 재판장이 불쾌하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증좌라고는 저자의 말뿐…….”
“그건 저도 마찬가지였는데.”
선득한 녹안이 무저갱에서 기어오르듯 위를 향했다.
“이상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