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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160) (160/232)

160화

한편, 당사자가 아님에도 누구보다 진중하게 상황을 주시하는 눈이 있었다.

[성전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지요. 하나, 제가 직접 모습을 드러낸다면 파장이 예상되는바.]

평범하게 고급스러운 복장의 소년은 바로 교황에게 자처해 참석한 신관이었다.

‘흐, 흑마법사라니!’

분위기가 술렁였다.

주변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빗발치자 소년 역시 동요해 눈을 굴렸다.

‘아차.’

그러다 이 자리에 참석한 진짜 목표를 뒤늦게 떠올려냈다.

티 나지 않게 주변을 살핀 어린 신관은 천으로 감싼 상자를 조심스레 확인했다. 그 안에 있는 것은 주먹보다 조금 큰 동그란 수정 구슬이었다. 특이점으로는 중심부에 오팔과 유사한 원석이 있다는 것이겠다.

[세간의 재판이란 인간의 판단으로 결정되는 것. 억울한 자가 나오지 않는다는 건 오만한 착각이겠지요.]

신전을 어지럽힌 진범이 떳떳하게 돌아다닌다고 생각하면 소년도 화가 났다.

‘자수한 저 사내가 하는 말이 진짜라면 수정이 초록빛으로 물든다고 하시었지.’

수정 구슬은 원석의 빛깔 때문에 햇빛을 받으면 마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빛나는 통에 아주 조그만 사이로 확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힐긋힐긋 내려다보던 소년의 눈이 휘둥그레 뜨여진 것은 이 대목에서였다.

“리, 리닉스.”

‘어?’

혹 착각이었나 싶어 살짝 더 열자 수정 내부를 가득 채운 초록빛 연기가 곧 전체를 물들이는 것이 선명했다.

‘성하의 말씀이 옳았어!’

서둘러 상자를 닫은 소년이 썩 매섭게 재판장을 노려보았다. 저자는 그간 잘못된 판단으로 얼마나 많은 죄 없는 이들을 궁지에 몰아넣었을까.

그것도 잠시. 소년의 얼굴이 침울해졌다.

‘성하께서는 또 마음 아파하시겠지.’

아직은 온전히 몸 관리에 전념하셔도 모자라는데……. 상자 모서리를 매만지는 소년은 그만 풀이 죽고 말았다.

성하는 몹시도 선량한 분이셨다. 보육원에서 자란 소년은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했다.

왜냐하면, 직접 동화책 낭독 봉사까지 해 주셨으니까.

[신이 세상을 다스리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시절은, 참 좋았을 것 같았다.

* * *

리닉스 공작은 표정 관리에 가까스로 성공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였는데, 이상하네요.”

‘어떤 모략을 획책한 것이냐.’

순순히 공개 재판을 수락한다 싶더니 처음부터 이럴 속셈이었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처음부터 이것을 노리고 공개 재판까지 일이 커지도록 부풀렸을 수도 있겠다.

재판장이 헛기침하고는 제법 엄숙한 투로 말했다.

“판결은 재판장의 고유한 권한이오. 이의를 제기하고 싶다면 정식으로 신청하시오.”

차라리 하지 않는 게 더 나았을 구질구질한 말이었다.

“그래, 그러면 되는가?”

그때 누군가 일어섰다.

흉흉한 녹안을 빛내는 사람은 과연 그 벨리악 리엔타였다.

“그렇다면 내 딸은 그간 덧씌워진 오명을 모두 씻어낼 수 있게 되나?”

나직한 목소리가 마도구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공간을 선연히 울렸다.

지금의 리엔타 공작은 공녀로부터 종종 엿보였던 위압감이 유전이라는 증거 그 자체였다.

재판장은 꼬리가 말린 개처럼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아.”

마치 비웃듯 외마디 탄성을 중얼거린 샤를리즈가 제가 들어왔던 문을 바라본 건 그다음 순간이었다.

“그런데 제가 준비한 증좌는 말 한마디는 아닙니다.”

‘뭐?’

마뜩잖은 기분으로 공녀의 술수를 곱씹던 리닉스 공작은 샤를리즈의 시선이 향한 방향을 확인했다.

“저자의 정체를 파악한 뒤, 영 수상쩍어 더 파고들다 보니 이런 걸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다름 아닌 테오도르 바나첼이었다.

‘테오도르 바나첼이라면 카타리나의 수하가 아니던가.’

그런 그가 어째서 샤를리즈의 아랫것이라도 된 양 구는지 알 수 없었다.

‘……카타리나가 의식 불명이 되기 전, 명한 것인가?’

“과연 사특한 족속들답게 이런 것을 보관하고 있더군요. 이들 사이에 믿음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봅니다.”

샤를리즈의 말이 끝나자 테오도르가 마도구를 작동시켰다.

잠깐의 공백 뒤, 말소리가 시작됐다.

[교황의 기도실을 폭파해.]

의구심에 가득 찼던 리닉스 공작의 안색이 일변했다.

저 때라면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우습네. 어차피 버릴 거, 직위도 썩 괜찮겠다 신전을 드높이기 위한 성대한 쇼의 제물로 적합하겠다 싶어 너를 골랐다는 생각은 들지 않던가?]

[나는 처음부터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보기보다 굉장히 순박하네.]

저 말을 믿은 건 단연코 아니다. 아닐 것이다.

그저 사람을 살살 긁는 게 아주 열이 받아서…….

[예? 하오나 신전은…….]

[대가가 아무리 많이 들어도 시행해! 감히 나를 농락한 벌로는 이것도 약소하지.]

저가 한 일이 모두 감당해야 할 몫으로 돌아온 걸 알게 된 얼굴을 보며 소리 높여 웃어 줄 작정이었다.

“저건…….”

“리닉스 공작 각하의 목소리잖아요?”

리닉스 공작이 곧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말도 안 되네! 내가 교황 성하께 무슨 억하심정이 있겠나! 그간 리닉스의 이름으로 신전에 헌납한 기부금만 봐도 아니란 걸 알 수 있을 걸세.”

“제가.”

샤를리즈가 으르렁거리듯 물었다.

“증거를 조작했다는 말씀이십니까?”

* * *

그렇다. 조작은 안 했다.

티 나지 않게 슬쩍 들어 올렸던 발을 다시 내렸다.

어른은 원래 비겁한 법. 그걸 두 번이나 반복했음에도 내 양심은 이렇게나 살아 있다.

눈을 내리깐 테오도르는 감정을 삭이고 있었다. 그 옆모습을 보다 나도 함께 감정을 삭였다.

‘내가 딸 목이었는데…….’

[그레고리 리닉스가 애착하는 대상은 오직 자신뿐입니다. 소속된 가문보다도 중요해, 가문의 명망이 땅에 처박힐 게 분명함에도 도박 중독 행세를 했지만 정작 그런 모습을 내비치기는 싫어했지요.]

그러니까, 테오도르는 평민은 물론이고 어느 선 이하의 귀족은 같은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 리닉스 공작의 완벽한 몰락을 원하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귀족이 정적에게 할 법한 선택이었다.

길바닥 자아가 더 강한 나로서는 아직도 아무도 목격하지 않는 비참한 죽음 쪽이 더 끌린다만, 어쨌거나 저러기로 결정한 바였다.

“그만.”

황제가 한 손을 들어 올리자 웅성대던 사람들이 일시에 입을 닫았다.

“리닉스 공은 황후의 부친이자 내 장인이 되는 위치.”

‘사설이 길다.’

나는 느긋했다.

황제가 이걸 날려 먹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공작가 하나 무너뜨릴 수 있는 기회라고.’

그것도 외척 가문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제국법에 예외는 없어야 하는 법.”

무엇보다도 황족이라는 자의식이 원체 강한 인간이다 보니 오직 직계 황족만 가능한 치외법권의 지대가 침범되는 건 조금도 참아줄 수 없던 거다.

“고신은 허가하지 않겠네.”

그렇게 리닉스 공작은 두 번째로 수감되었다.

* * *

“크훙……. 우리 샤를이 그런 일까지 겪고…….”

리엔타 공작에게 손수건을 챙겨 주며 집사도 연신 눈가를 찍었다.

“절대로 용서하셔서는 안 됩니다. 가주님.”

“그럼. 내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게야!”

“아가씨께서 얼마나 힘드셨으면 기운도 없어 보이십니다…….”

“내 그것들을 그냥!”

나는 시방 소파와 일심동체다.

근처에 과자가 있는데도 손을 들 힘도 없다.

무려 다섯 시간 동안 계속된 검사 때문이었다. 친절한 예고를 주치의의 과장이라고 생각한 나는 깨달았다.

‘다섯 시간이나 할 검사가 있구나!’

젠장…….

과거의 불효를 씻어내고 효자로 변신하는 참회의 시간이었다.

“그것도 그렇지만 검사도 한몫했을 거랍니다.”

시녀장이 내 입에 청포도를 넣어 주었다. 씹을 힘도 없어 느릿느릿 해치우니 다음에는 딸기가 들어왔다.

“그래도 샤를이 아플 수도 있다는데 하지 않을 수는 없지 않아.”

“옳은 말씀입니다.”

“이것도 본래 여덟 시간으로 예정되었던 것을 줄인 게야.”

“어떤 검사를 제외할지 참으로 어려운 선택이었지요.”

공작과 집사가 주고받듯 말했다.

한 번 한숨을 폭 내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멜리사 부인이 대답했다.

“그랬죠. 그래서 여덟 시간을 모두 하자고 다시 간청할까 생각도 여러 번 했어요.”

‘……잠깐만. 시녀장은 다른 거 아니었어?’

딸기를 씹던 나는 충격에 잠겨 굳었다.

과연 시녀장 역시 삼인방 중 하나인 것이었던 것이었다…….

“우리 아가씨, 건강하셔야 하는데.”

나는 우물우물 말했다.

“검사 결과, 다들 봤잖아. 나 건강해.”

“그래. 샤를은 건강하다! 앞으로도 건강할 거고 말고.”

공작이 약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검사는 이제 하지 맙시다, 아버지.’

눈물 젖은 청포도를 씹었다.

* * *

신전에 도착하자마자 어린 신관은 교황에게 달려갔다.

“성하! 수정의 색이 초록빛으로 물드는 것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럼 이제 필요 없겠네.”

작은 목소리는 어떤 내용인지 잘 들리지 않았다. 다만 어딘지 차가운 듯한 어조에 신관이 의아하게 고개를 들어 올리자 교황이 웃었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이 기분 좋아 소년은 볼을 붉혔다.

“그대가 잘해주었다는 말이었답니다.”

허공을 바라보는 자홍색 눈은 과연 흡족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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