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161) (161/232)

161화

늦은 밤.

나는 왼손등을 꾹 눌렀다.

입과 다르게 몸은 솔직해 ‘뭐냐!’하고 툴툴거리면서도 착실히 나타났을 신수는 잠잠했다.

‘아직 회복이 덜 됐나.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더니 아무것 같은데…….’

아무튼 미안하게 됐다. 볼을 긁적이고는 괜스레 왼손등을 토닥였다.

[―뭐? 내 힘을 빌려 쓸 수 있냐고?]

[예. 그렇습니다. 저희는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런 말, 어디 가서 함부로 하지 말아라. 여하튼, 그건 네가 약해서, ……아니지. 이제는 그 정도는 가능하겠구나.]

뭐라도 해 볼 생각으로 던져 본 말이었는데 진짜로 됐습니다.

본래는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수호 계약은 계약자에게 최대한 협력해야 하기 때문에 섭리를 피할 수 있다고 신수는 종알거렸다.

‘신수랑 대화하고 나면 진이 쪽 빠져서 잠잘 수 있는데.’

물론 저 이유로 불러내려던 건 아니다. 상태가 어떤지 염려돼서 그런 것이다.

‘잠자리가 바뀌어 낯설어서 그런가?’

그리고 머쓱해졌다. 환생한 거 알고 싱숭생숭해하면서도 잠만 잘 잔 나였다.

천장만 멍하니 보는 것도 지루해져 몸을 일으켰다. 역시 이럴 때는 서랍 구경하는 게 시간 때우기로 최고다.

애석하게도 서랍이라고 할 건 화장대 말고 없었지만, 다행스럽게도 그것만으로 차고 넘쳤다.

“보석함 발견.”

처음에는 이거 들고 냅다 튈 생각도 했었지……. 묘한 감회에 젖어 상자를 열었다.

‘읏.’

눈부셔.

난 왜 내가 쪼들린다고 생각했을까. 이 정도면 수도 저택도 살 수 있을 것 같다!

배부른 기분이 되어 열심히 구경하던 중이었다. 나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중얼거렸다.

* * *

“내가 연습 1등으로 할…….”

그때, 로르는 기묘한 기분으로 생각했다.

비슷한 말을 했던 순간이 있었던 것 같은데…….

“마침 잘 만났네.”

자리에서 폴짝 뛰어오른 로르가 가슴을 부여잡았다.

“아, 아가씨. 안녕하십니까. 에반스를 불러오겠습니다.”

아직 식사 중이겠지만 이번이 마지막 식사도 아니고, 앞으로도 먹을 날이 많다! 당장 에반스를 잡아 올 태세 만반인 그에게 샤를리즈가 고개를 까딱였다.

“아니야. 그대가 해 줄 수 있는 일이야.”

“제, 저를요?”

“그래.”

아가씨를 졸졸 따라간 곳에는 웬 평평한 바위가 있었다. 누워서 게으르게 인생을 낭비하기 실로 적합한 모양새였다.

‘이런 게 우리 정원에 있었다니.’

십 년 넘게 충성한 가문의 정원은 과연 넓었던 것이었다.

그 바위 위에 샤를리즈가 동그란 무언가를 툭 놓았다.

“이거, 칼자루로 부숴 주겠어?”

“이건…….”

막눈으로 봐도 굉장한 상급인 게 틀림없는 호박석이었다.

‘아가씨가 또 기행을 하고 싶으신가 보다.’

힐끔힐끔 아가씨를 곁눈질한 로르는 “예, 아가씨. 바로 하겠습니다!”하고는 한 손으로는 호박을 단단히 틀어쥐고 칼자루로 퍽퍽 부수었다.

‘꽤 괜찮은 훈련이잖아……?’

미끌거리고 단단해 검기를 실어도 집중력을 요구하는 고급 훈련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갈수록 진심이 되어 열심히 팍팍 부수던 로르는 다시 힐끔힐끔 아가씨의 눈치를 살폈다.

“그 정도면 됐어.”

“아직 입자가 굵은데요.”

“충분해. 고마워.”

“아닙니다.”

뿌듯하게 코 밑을 슥 훔친 로르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사라진 뒤.

샤를리즈는 함께 챙겨 온 원통형 유리 약병에 가루를 조심조심 쓸어모았다.

“비슷한가?”

그리고 잠시 후. 소소한 휴식을 즐기고 있던 정원사들이 일시에 기립했다.

“아, 아가씨!”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왔어.”

또 고생길이 열렸나 싶어 왈칵 차오르는 눈물을 삼키며 정원사는 어떤 것이냐고 물었다.

“나무 진액이 굳으면 어떻게 되지?”

* * *

나는 산산조각 난, 한때는 호박석이었던 것을 슬프게 응시했다.

“헛다리 짚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그 나무막대기 하나 빼돌려보자고 해봐야지.

코를 훌쩍이며 서글퍼하고 있던 때.

다급하게 다가오는 발소리에 의아하게 문을 바라보기 무섭게 노크 소리가 이어졌다.

“아가씨. 집무실로 가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영문 모르게 도착한 집무실에는 공작이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도 같이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는데, 공작이 무겁게 말했다.

“황후가 사망했다.”

* * *

긴 시간 병상에 누워 있던 카타리나 리닉스는 끝내 다시 의식을 찾지 못하고 사망했다.

황손을 잃은 비극에 이어 황후까지 사망하자 황성은 숨 쉬는 것조차 조심하며 침통하기 이를 데 없었다.

가주는 수감되고 여식은 피살된 상황. 리닉스 공작가 내부에서는 반등을 위해 가주를 새로이 추대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목소리가 높았다.

영원할 것 같았던 대귀족 가문의 후퇴가 손에 잡힐 듯 선명해지자 여타 귀족들은 한껏 자세를 낮추며 시류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러니까, 그때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카타리나가 이렇게 죽는다고?’

카타리나는 결국 죽기는 했다. 그러나 이렇게 난데없는 죽음은 아니었다.

카타리나를 직접 본다면 의구심이 조금이라도 걷힐 수 있을 텐데, 그건 아무래도 요원할 듯하다.

“엘루이든과 리엔타의 결합을 황제로서는 최대한 막아 볼 요량일 겁니다.”

리반이 찻잔을 내게 슥 밀며 말했다.

“이제 와서?”

“그동안은 큰 생각이 없었겠지요. 누가 봐도 공녀님께서 전하를 졸졸, 아, 실례. 사모하여 질척, 아, 실례.”

‘나 놀리려고 저러는 거 같은데?’

우아한 귀부인처럼 손으로 입을 가린 리반을 의심스레 쳐다보며 차를 넘겼다.

“지로 시작해 긋으로 끝나는 기분으로 받아줬을 뿐, 실제로 결혼까지 하겠느냐고요.”

“돌려서 말하려면 제대로 하는 건 어때?”

“충분히 돌려 말하지 않았습니까?”

새침하게 말한 리반이 덧붙였다.

“아무래도 끝이 보였으니까요.”

“흠.”

나는 손깍지를 끼고 그 위에 얼굴을 올렸다.

“뭡니까! 왜 그렇게 보시는 겁니까?”

“역시……. 소동물……. 감이 좋아…….”

“주어만 뺀다고 못 알아듣지는 않습니다.”

퉁명스레 대꾸한 리반은 차를 홀짝였다.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찻잔을 내려놓을 때까지 차분하게 기다리고 물었다.

“그러면, 리반. 지금은 어때 보여?”

“뭐가요?”

“뭐겠어.”

“아―주 행복하게 잘 사실 것 같습니다. 안타깝게 요절한 천재 사무관의 장례식장에서도 아―주 알콩달콩하실 것 같습니다.”

“덕담 고마워. 칼릭스에게 두둑한 보너스와 휴가를 강력하게 건의할게.”

“정녕 휴가도 가능하겠습니까?”

어제 본 보석들보다도 더 반짝거리는 눈을 손가락 틈새로 쳐다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리반은 참 모를 사람이다.’

눈꼴 시려하는 것 같아서 나도 눈꼴 시릴 마음을 겸허하게 갖추고 맞선을 제의하니 찌푸린 얼굴만 보게 됐다.

[저는 연애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돈이 들어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제가 무척 수전노 같지 않습니까.]

그렇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딴생각을 하는 지금은 황성을 향하는 마차 안이다.

사샤와 칼릭스는 황후의 비보가 알려진 직후부터 황성에 머무르고 있어 혼자 가는 길이었다.

‘어쩌다 보니 참석하게 됐네.’

유력 가문의 인사들이 도열해 있지 않을까 싶었건만, 틀렸다.

“제국의 태양께 리엔타의 샤를리즈가 인사드립니다. 무한한 광영과 함께 하시기를.”

‘뭐야!’

얼핏 봐도 적었다.

나 포함 겨우 열이었던 거다. 게다가 그중 신전 출신은 교황을 포함해 셋이었다.

‘의식 불명인 체까지 하며 칩거하더니 갑자기 대외 활동을 많이 하는군.’

황제도 아니고 황후의 사망이니 이런저런 핑계 대며 참석하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아무튼 리닉스 부자가 나를 죽일 듯 노려보거나 말거나 내 자리로 가서 섰다.

눈으로만 자그마하게 웃는 칼릭스에게 눈인사를 되돌린 후 사샤의 왼손을 꼭 잡았다.

“오셨어요?”

아이의 낯빛이 희었다.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많아 마주 잡은 손에 힘을 실었다. 단단한 힘에 안도를 느낀 듯 사샤는 야트막한 숨을 흘렸다.

“그가 신이 계신 곳에서 영원한 안식을 맞기를.”

추모식은 성대하게 할 테니 당연히 저건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만 친족들만 참석하는 내밀한 자리일 줄은 몰랐다.

내가 그녀에게 꽃을 주는 순서는 가장 마지막이었다. 뚜껑이 닫히지 않은 관에 누운 카타리나는 정말로 깨어날 수 없는 잠에 빠진 채였다.

‘그럴듯한 장례식은 할 줄 알았는데.’

아마도 리닉스 공작가의 현재 상황이 한몫할 것이다. 그에 내가 공헌한 바가 크지만 미안한 기분이 될 리가 없었다.

‘지금의 당신이 내게 잘못한 게 없다는 걸 알아. 그래도 좋은 곳 가라는 생각은 역시 들지 않네.’

어느 세계에서 한없이 불행해야 했던 사람들은 불행을 맞지 않게 됐다.

하지만 여전히 불행했던 사람들이 있다. 노아를 떠올렸고, 테오도르 바나첼을 생각했고, 라베트를 알았다. 내게 친숙한 얼굴들. 내가 모르는 얼굴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당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감당은, 지옥에 떨어져서 해.’

말없이 그녀에게 흰 국화를 안겼다.

뎅. 뎅. 뎅―

청아한 종소리가 울리고, 신관 두 명이 깊이 파인 구덩이에 관을 조심스레 옮겼다.

한 세계의 주인공을 뒤흔들었던 악역의 죽음은 초라했고, 간소한 장례식은 그렇게 끝이 났다.

* * *

식이 끝난 후.

리닉스 공작은 적기를 기다린 끝에 마침내 혼자 있는 샤를리즈의 팔을 거칠게 붙잡았다.

으슥한 장소까지 그녀를 끌고 간 공작이 씨근덕거리며 짓씹듯 말했다.

“네가 승리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하지만, 틀렸다. 머리를 의외로 쓸 줄은 알더군. 그래 봤자야. 설령 유르겐이 공작위에 오르게 되더라도 공작은 나고, 리닉스는 고작 그런 증거 따위로 처형당할 일은 없다.”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 발음한 그레고리 리닉스가 아직도 잡고 있던 손목을 마치 오물 뿌리치듯 던져 놓았다.

“나는 네가 가장 행복할 때 너를 무너뜨릴 것이다. 두려워 하…….”

뭐지? 리닉스 공작이 문득 말을 멈췄다.

“아, 그래?”

샤를리즈 리엔타가 눈을 빛내며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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