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사샤는 볼을 발갛게 물들인 채 연신 주변을 둘러보았다. 식이 끝나자 황제와 리닉스 일가는 사라졌지만, 어디선가 나타나 뒷정리하는 시종들과 신관 몇몇이 있었다.
“숙부님. 내려주세요…….”
자못 처연한 얼굴로 칼릭스가 눈꺼풀을 반쯤 내린 채 뇌까렸다.
“사샤의 온기가 필요한 건 역시 어른 자격 실격인 걸까.”
“아니에요!”
화드득 놀란 아이가 제 온기를 마구 나눠주려는 듯 칼릭스의 목에 팔을 두르고 답삭 안겼다. 필사적인 애정의 발로에 칼릭스는 무심코 웃었다.
“샤를리즈는 곧 올 거야.”
“네.”
“춥지는 않니? 마차에서 기다릴까?”
“아니요. 괜찮아요.”
슬쩍 고개를 떼며 아이가 칼릭스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숙부님은 추우시면 마차에 먼저 가 계세요.”
“음. 조금 춥기는 한데.”
“그럼…….”
고심하느라 뾰족해진 입술이 마침내 움직였다.
“제가 이렇게 온기를 계속 나눠 드릴게요.”
“고마워. 사샤가 있어 다행이야.”
사샤가 수줍게 웃었다.
들썩거리는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칼릭스는 생각했다.
‘많이 놀라지는 않은 것 같아 다행이지.’
이 나이대의 아이라면 시신에 꽃을 건넬 때 무섭다며 바락바락 울어도 이상할 것 없었다.
꽃을 안기고 묵념하듯 눈을 꼬옥 감았던 앳된 얼굴을 떠올린 칼릭스의 눈이 가라앉았다.
그때였다.
다가오는 인기척을 눈치챈 벽안이 일순 날카로워졌으나 금세 갈무리되었다.
“지체 높은 신분이시라고는 하나, 아직 어린 분이시니 걱정이 되어 이렇게 찾게 되었습니다.”
자못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교황이 빙그레 웃었다.
저를 부른 듯한 목소리에 사샤는 엉겁결에 뒤를 돌아보았다. 자애로운 얼굴이 보였다.
“선황자님. 며칠 낯선 곳에서 생활하시었는데 피로하시지는 않으신가요?”
“괜찮아요.”
“선황자님은 대견하시네요. 하지만 피곤하다면 피곤하다고 말씀하셔도 된답니다.”
상황을 관전하듯 침묵하던 칼릭스가 조금 웃었다.
“내 조카는 겸손하지만 거짓말은 하지 않습니다.”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교황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무감각하게 쳐다보며 칼릭스는 “음.”하고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피로하기로는 성하께서 그러실 테지요.”
라우드는 순간 침묵했다. 어딘지 뼈가 있는 말이었으나, 미형의 얼굴에서는 어떠한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
조카에게 더는 신경 쓰지 말라는 축객으로 받아들이는 편이 타당했다. 그런데도 어딘가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이것을 외면해 좋은 일을 본 적이 없었다.
‘대공은 분명 신성력이 없을 터인데…….’
“신경 써 주시어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려야 하겠군요.”
가늠하듯 가늘어진 눈을 미소로 숨겼다.
때마침 신관이 뒷정리를 마쳤다며 적절하게 다가왔다.
“그럼 이만.”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으니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면 되는 일이었다.
돌아서는 뒷모습을 칼릭스는 짧게 바라보았다. 그다음 순간.
“어!”
아이가 외마디 탄성을 작게 내질렀다. 그 의미를 알았다.
조심스레 내려준 두 발이 땅을 짚기 무섭게 아이는 박차고 달려 나갔다.
“샤를 님.”
제 다리를 꼭 껴안은 아이의 머리를 샤를리즈가 쓰다듬었다.
이윽고 시선이 마주쳤다.
기분 좋게 웃으려던 칼릭스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얼굴이었다.
* * *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황후의 죽음이 심상치 않습니다.”
단순히 일국의 황후씩이나 되는 인물이 이렇게 죽어서가 아니다.
원작에서는 굵직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 뭐한 것도 없이 죽어서도 아니다. 그 원작, 내가 말아먹은 지 한참 됐다.
“그래서 리닉스 공작과 대면하고 싶다고 했던 거야?”
“어느 정도는요.”
칼릭스가 짧게 웃었다.
“황후의 죽음을 빌미로 다른 목적을 해결하려는 사람이 있었어?”
“예.”
“짐작하는 바가 있는 것 같은데.”
“교황이 마지막에 모두에게 축복을 주지 않았습니까.”
의례적인 식순이지만, 거절할 수 없기도 했다.
영 찝찝한 기분이 되어 내 차례를 기다리던 때, 마침내 이마에 닿은 교황의 손은 꽤 따뜻했다.
“그거, 평범한 축복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나는 고뇌했다.
“설마 저주였을까요?”
아기한테도 저주를 걸다니 천하의 몹쓸 놈 같으니라고. 칼릭스 덕택에 잘 알게 된 신전이 있는 방향을 노려보았다.
“왜…….”
무어라 말하려던 칼릭스는 입을 닫았다.
“샤를리즈. 어째서 평범한 축복이 아니라고 생각했지?”
“기분이 더러웠습니다.”
이마를 꾹 누르며 칼릭스가 웃었다.
“아. 긴장이 풀린 느낌이야.”
“긴장했어요?”
칼릭스가 긴장을 하다니. 나는 바짝 긴장해야 할 것 같다. 잔뜩 졸아붙어 있는데, 여전히 웃음기 가득한 눈으로 칼릭스가 물었다.
“다시 질문할게. 축복을 받고 몸의 변화를 느꼈어?”
“음. 이마만이 아니라 몸 전체가 뜨끈해지더군요.”
“샤를리즈, 손을.”
나는 칼릭스의 손 위에 내 손을 냉큼 얹었다. 눈을 내리뜬 채 칼릭스는 침묵했다.
이윽고 다시 올라간 눈꺼풀 아래, 벽안은 얼핏 사나운 빛을 띠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축복이 아니라 그 이상의 신성력을 전달한 모양이야.”
나는 잠시 눈만 깜빡였다.
‘그럼 본인 신성력을 축내는 일 아닌가? 신수 보면 금방금방 채워지진 않는 것 같은데.’
그리고 깨달았다.
“타인의 신성력은 금세 사라져. 그러니 신성력을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을지 확인해 본 것일 수도 있겠어.”
칼릭스가 고요히 웃었다.
“물론 오랜만에 등장한 황족의 신성력 크기를 교황이 제 신성력을 버려가면서까지 확인하려던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툭툭. 모양 좋은 손가락이 책상을 느리게 두드린 뒤. 뒷말이 이어졌다.
“너를 확인할 이유가 없잖아.”
이쯤 되면 흑마법사 집단과 교황이 연관 없을 수도 있다고 계속 생각하는 것은, 조심스러운 접근이 아니라 겁에 질린 외면이 됐다.
“서둘러야 하는 일이 있는 거로군요.”
“그래. 하지만 들킬 가능성을 상정하지 않았을 수도 있어.”
칼릭스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보통은, 알아채지 못할 수법이거든.”
* * *
금제가 걸린 탓에 명확히 전달할 수 없으나 뉘앙스는 가능했다. 과연 포착했는지 샤를리즈는 그를 물끄러미 주시했다.
“그렇군요.”
덤덤한 반응으로 끝이었다.
“그럼 튜베롯을 꺾으러 가면 되겠습니다.”
샤를리즈가 눈을 사납게 빛냈다.
“그 나쁜 놈들은 선황비 전하의 잠든 얼굴만 보고 있으라며 행방을 넘긴 것일 수도 있고, 해독법을 알면서도 옴짝달싹 못 하는 이쪽을 보며 비웃고 있을 수도 있지만.”
후자라면 튜베롯 군락을 훼손하지 않는 이유는 단연 함정일 테고 그건 신전이 사샤를 보호하려는 초석일 것이다.
비밀을 유지해도 의미가 없다. 교황이 선황비의 의식 불명을 흑마법과 연관되어 있다며 몰아갈 테니까. 신전의 꽃으로 의식을 차릴 수 있게 되는 독이라니, 과연 그럴듯하겠다.
“상황도 이만큼 파악했겠다, 함정이 함정이란 것을 알고 있으면 더는 함정이 될 수 없는 법이니까요.”
샤를리즈가 짧게 웃었다.
“이쪽이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알려줘야 그쪽에서도 대응해 보이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견 무심하나 조심스러운 애정이 담긴 눈이었다. 손에 잡힐 듯 선명한데도 손 안에 가둘 수 없다는 것이 애석했다.
“선황비 전하를 기다리셨잖아요.”
* * *
며칠 후.
엘루이든 대공가의 인장이 박힌 마차가 신전에서 정차했다.
그 안에 든 건 바로 나다.
오늘 아침, 나는 칼릭스를 통해 미래의 조각을 목격했다.
“……대공 전하께서도 그러실 줄은 몰랐어요.”
“리엔타 공녀에게 물드신 거겠죠?”
“그건 왠지 굉장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