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163) (163/232)

163화

‘날이 화창하군.’

일어나자마자 후다닥 밖을 확인하고, 나는 다시 후다닥 채비했다.

“오늘은 야외 수업이다.”

“네에.”

어린이용이라고 하얀 거짓말을 한 유아용 장갑을 끼고 모종삽을 든 채로 사샤가 고개를 다부지게 끄덕였다.

“앗.”

그러다 챙이 넓은 모자가 앞으로 흘러내려 내가 슥슥 정돈해 주었다.

그렇게 총 스물두 송이를 심는 중노동을 마친 우리는 시원한 레모네이드를 석 잔 비웠다.

주방 사용인들이 싸 준 도시락을 도란도란 까먹다 보니 시간은 금세 오후가 됐다.

내 허벅지를 베고 낮잠 자는 아이의 이마를 괜히 쓸어보다가 아까 심은 꽃을 날카롭게 쳐다봤다.

‘나머지는 사흘 정도면 시들겠지?’

그래서, 이튿날.

나는 다시 사샤의 방을 찾아갔다.

“샤를 님!”

아이가 종종걸음으로 나를 맞이했다. 여전히 자그마한 손은 펜을 쥐고 있었다.

‘누구는 인성도 탈부착하는데 사샤는 펜도 탈부착하지 못하게 되다니…….’

나는 눈에 힘을 빡 줬다.

“오늘은 인성 수업이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리엔타 공작저였다.

“샤를! 연락도 없…… 안녕하십니까, 선황자 전하.”

“안녕하세요. 공작 각하. 잘 지내셨어요?”

“예. 전하께서는 무탈히 지내셨습니까?”

쪼르르 달려온 공작은 위통을 직감한 듯 벌써부터 배에 손을 대었다. 준비성이 저리도 철저하니 어디서 쉽게 죽을 리는 없겠다.

울멍울멍한 눈을 보며 이제라도 공손히 물었다.

“잠시 저택 탐방을 하려고 하는데, 괜찮을까요?”

“샤, 샤를. 여기는 네 집이다. 이제 네 집이 아니게 되기라도 하는 건 아니지? 그치?”

“세상일은 어떻게…….”

“그만. 그만! 그 말이 이제 나는 무섭다!”

아무튼 바쁜 공작은 사라지고, 나는 사샤와 둘이 오붓하게 저택 구경을 시작했다.

“저긴 꽃병이 있던 자리야. 바다 건너 왕국의 유명한 도예가가 유품으로 남긴 도자기였다고 하는데, 내가 여덟 살 때 깨뜨렸지.”

“네에.”

“저 협탁은 원래 맨 위 칸에도 서랍이 있었는데, 내가 아홉 살 때 땔감으로 써서 없어졌어.”

“비어 있어서 더 예뻐요.”

“이 금 코끼리는 내가 열한 살 때 진짜 금인지 확인해 보겠다며 깨물어서 아직도 그 자국을 달고 있어.”

코끼리 코를 손으로 매만진 사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특별한 예술품이 되었어요!”

총 스무 번을 비슷한 말을 반복한 뒤, 나는 허리에 양손을 척 얹었다.

“자. 오늘 수업의 마무리는 이거다.”

사샤가 품에 곰 인형을 꼭 안은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저 친구는 내가 일곱 살 때 하도 눈에 박힌 보석을 빼서 구슬치기를 하는 바람에 평범한 자수 눈을 갖게 되었다.

“아이는 원래 사고뭉치로 자란다는 거야.”

나는 지나치게 사고를 쳐대기는 했지만, 그런 사소한 문제는 지나가기로 하자.

“그리고 첫 번째로 본, 꽃병이 있던 자리는 내가 깨뜨린 다른 도자기들이랑 조금 다른데 차이점을 알겠니?”

“음.”

열심히 고민하던 아이가 “아.”하며 눈을 깜빡였다.

“그곳에만 아무것도 없어요.”

“훌륭해.”

사샤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같이 팔을 나풀나풀거리는 곰 인형보다도 깜찍했다. 실로 습관적으로 코 밑을 훔치게 되는 광경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내가 꽃병을 깨뜨리고 몰래 치워보겠다고 하다가 크게 다친 적이 있어서 그래.”

아이의 보슬보슬한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다치기 전에 모두 말해 주기로 해. 실수한 것도, 무서운 것도, 이상한 것도.”

사샤는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나는 그 눈을 깊게 바라보았다.

“원래 아이는 그런 거니까.”

[보통은, 알아채지 못할 수법이거든.]

칼릭스는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행간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이 세계의 남자 주인공이라서 꿈을 꾸는 게 아니었어.’

설명할 수 없던 로단테의 능력과 꿈도 일부분은 이해할 수 있다.

신성력이었다.

그러니까, 이 아이도 어쩌면 비슷한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 *

꼭 열흘 만이다.

또 그 꿈이었다.

성별도, 나이도 알 수 없는 목소리가 귀에 새겨지듯 박히는 꿈.

하지만 아이는 더는 그것이 속삭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럴 수 있게 됐다.

[숙부님은 나를 많이 아끼세요.]

단호하게 대꾸하자 그것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저 제 형의 자식이니 아끼려고 노력할 뿐이라는 걸 왜 모르지.]

한때는 저 말에 말문이 막힌 적도 있었다.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 맞았다.

[맞아요. 내가 숙부님의 조카라서 사랑하게 된 거지만, 결국은 나를 사랑해 주세요.]

[네가 형의 자식이 아니었다면 보기나 했겠어?]

[왜 내가 숙부님의 형의 자식이 아니었으면 하고 생각해야 하는 거예요? 그리고…….]

아이는 몽글거리는 가슴을 손바닥으로 꼬옥 눌렀다. 아무것도 아니었을 때도 애정을 준 사람이 있었다.

그 애정을 말하고 싶지 않아 입을 꼭 다물었다. 세상에는 반박할 필요가 없는 진실이 있다.

[너…….]

그것이 말을 길게 끌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한 걸음 간격으로 조명이 켜지듯 시야가 환해졌다.

마침내 그것의 발치까지 밝혀지자 무심코 발을 바라본 아이가 눈을 깜빡였다.

[행복한 걸 너무 티 내지 마. 행복은 한순간이거든.]

그것은 자신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 * *

‘사샤는 잘 자고 있겠지?’

이제 사샤는 동화책을 세 페이지만 읽어도 금방 잠드는 일찍 자는 어린이가 되었다.

‘그 작가 놈이 다음 동화책은 낼 수 없도록 막고 만다.’

동화책은 잘 때만 읽어야 한다는 철칙이 있는 아이는 다음 내용이 궁금해 끝까지 꾸벅꾸벅 참다가 잠들기 일쑤였다.

‘리닉스 공작 좀 이용해 보려고 했는데, 이건 아무래도 안 될 것 같고.’

사흘째 힘겹게 버티다 잠에 든 아이를 보며 밤새 골몰한 끝에 나온 계책이 하나 있긴 하다.

사람은 절박해지면 뭐든 할 수 있다더니 생각도 마구 샘솟는다는 교훈을 얻게 된 시간이었다.

그놈은 나를 조롱했지만 어디서든 하도 조롱받았다 보니 딱히 새롭게 다가오지 않아 동기 부여가 덜 되었는데, 이번은 단연 달랐다.

‘내가 그 동화책에 열광한다고 티 내 보자.’

일명 ‘네가 다른 사람의 손에 있는 건 참을 수 없어.’ 전법이다. 시중에 있는 건 모두 내 수중에 넣는 거다.

‘어린이들아, 미안하게 됐다.’

그리고 그놈도 내 손에 넣는 것이다…….

‘후후후.’

이런 못된 생각을 하며 향하는 곳은 선황비가 지내는 저택이었다.

“샤를.”

마차에서 막 내리려던 차, 칼릭스가 나를 안았다. 아니다, 안겼다.

마차 계단을 밟고 있어 시야가 엇비슷했다. 그래서 서로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잘 지냈어요?”

“어땠을 것 같아?”

칼릭스가 웃으며 내 목덜미에 묻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나는 그 얼굴을 꼼꼼히 살폈다. 오늘도 백 점 만점에 백만 점이다.

“아주 잘 지내셨군요.”

고개를 크게 끄덕이자 칼릭스는 애석하다는 듯 눈을 휘었다.

“나, 사흘째 잠을 못 잤는데.”

이럴 수가. 퇴폐미 만점의 정체가 저것이었다니.

‘이런 건 리반의 발등만큼만이라도 따라간다면 좋을 텐데…….’

나는 아쉬운 마음을 담아 칼릭스의 얼굴을 매만졌다. 그가 양순하게 눈을 감았다.

그랬다. 칼릭스는 이미 사흘 전부터 이 저택에 머무르고 있었다.

나를 가볍게 안아 지면에 훌쩍 내려 준 칼릭스가 안내하듯 반걸음 앞서 걸었다.

“여기에 계셔.”

아무리 깔끔하게 정리하고 관리해도 사람이 오래 머물지 않은 느낌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어서, 쓸쓸한 분위기가 감돌기 마련이다.

그곳에 선황비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선황비 전하. 리엔타 공작가의 샤를리즈라고 합니다. 올해로 스물한 살이 되었고, 곧 스물두 살이 됩니다.”

“후년에는 스물세 살이 될 거예요.”

“내후년에는 스물넷…….”

칼릭스가 눙치듯 짙게 웃었다. 타박하고 싶어지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래,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살아!’라고 응원하고 싶어지는…….

‘그만.’

속으로 이마를 빡 치고, 나는 다시 진지하게 자기소개를 이어갔다.

“칼릭스와 약혼한 사이입니다. 그리고 제 평판 듣고 처음에 놀라실 텐데, 이래 봬도 개과천선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품에서 조심스럽게 주머니를 꺼내 칼릭스에게 건넸다. 묘한 표정으로 받아든 칼릭스는 주머니를 열지 않고 잠시 내려다보기만 했다.

아마도 선황제를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묵묵하게 있는 듯 없는 듯 인기척을 죽이고 있는데, 칼릭스가 문득 말했다.

“네 곁에 있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 생각했어.”

설마하니 선황비에게 ‘너’라고 한 건 아닐 거다. 슬쩍 눈치를 살핀 나는 대꾸했다.

“그래서 중간에 많이 엇갈렸나 봐요.”

“그럼……, 다음에는 더 힘들면 좋겠어.”

‘예? 뭐라고요?’

이건 좀 반박해야 할 것 같지만, 아무튼 여전히 타박하고 싶진 않은 기분이었다.

이윽고 칼릭스가 시든 튜베롯 두 송이를 선황비 근처로 가져갔다.

로나터스 후작은 정말로 짧은 시간 만에 눈을 떴다고 했다. 그래서 라베트는 그것 때문에도 많이 울었다.

그 어떤 기다림과도 비교할 수 없는 시간이 흐르고.

흐릿한 갈색 눈이 조심스레 드러났다. 아직 혼몽할 의식이 여실히 엿보이는 눈동자였다.

“선황비 전하.”

그러나 칼릭스가 그렇게 말했을 때, 그녀는 손끝을 떨었다. 기어코 칼릭스의 손등을 덮은 온기는 아마도 굉장히 따뜻했을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