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그럼 나는 빠져볼까.’
스르르 뒷걸음질 쳐 사라지려던 순간.
선황비가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구겼다.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던 칼릭스가 반응했다.
나는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설마, 아니지?’
의식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가 그대로 죽는 모습 보게 하려던 속셈이라면 지옥 불도 아까운 놈들이 틀림없다.
의사도 소용없을 테지만 그래도 불러올 생각으로 막 뒤돌아선 순간이었다.
“황……자 전하도…….”
나는 그대로 멈춘 채 고개만 돌렸다.
“함께…….”
선황비가 사샤와 함께 있기는 했다
[선황비 전하도 사샤처럼 기억이 없으실까요?]
[글쎄. 하지만 온전하더라도 조작되었을 수도 있겠지.]
그런데 애초에 놈들이 왜 선황비를 굳이 살려 두었는지, 그 이유는 아직도 불분명했다.
그 의문은 비단 나만의 것이 아닐 터였다.
“선황비 전하.”
그 호칭에 그녀의 관자놀이를 타고 눈물이 길게 흘러내렸다.
벌써 십여 년 전이지만, 그녀에게는 그 절반의 시간만 흐른 기분일 것이었다.
“사샤는 대공저에서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다정하고, 착한 아이더군요.”
그녀가 흐느끼듯 미소 지었다.
손수건에 물을 적셔 선황비의 입술에 대며, 칼릭스는 아무렇지 않은 듯 웃었다.
“사샤를 찾아 준 사람이 있어요. 그 인연으로 시작해 연인이 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선황비 전하. 샤를리즈 리엔타라고 합니다.”
선황비가 황비였을 시절에도 내 인성은 세미 파탄 나 있었으므로 떨렸다.
“성품만큼 예쁜…… 이름이네요.”
‘……역시.’
흑. 어쩔 수 없지. 그렇게 산 내 탓이 크다.
귀부인들 특유의 우아한 질타라고 생각해 슬펐던 시간은 짧았다. 나를 바라보는 다감한 갈색 눈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보통의 인간은 평생토록 모를 온갖 풍파를 겪은 선황비에게는 내 평판 따위는 별문제가 되지 못했던 거다.
“사샤는.”
칼릭스가 잠시 망설이듯 말을 길게 끌자, 선황비가 담담하게 물었다.
“기억이…….”
그러나 이내 아주 오랜만에 말을 하기라도 하는 듯 선황비가 고통스럽게 기침했다.
“발음만 하세요. 네, 전하. 사샤가 전하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선황비가 하는 말을 칼릭스가 목을 울려 읽었다.
“차라리 잘 되었습니다.”
왜인지 아주 묘한 기분이 되어 있던 나는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그런데 그 이후는 그럼 기억하고 있나요?”
선황비가 끝내 흐느꼈다.
“아직도 어릴 텐데. 그때는 더 어렸어요. 많이 힘들었을 텐데.”
칼릭스가 시선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허공에서 시선이 교차한 순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놈들은 사샤를 왜 거리에 버렸을까.’
* * *
툭. 툭.
책상에 규칙적으로 부딪치는 것은 바짝 마른 생화였다.
제법 고귀한 별칭과 역사가 붙은 꽃은 이곳에서만큼은 마치 들꽃이라도 되는 듯했다. 아래로 떨어진 꽃잎이 수북했다.
“흐음.”
흥미가 떨어졌다는 듯 라우드가 줄기만 남은 꽃을 툭 버렸다. 다른 꽃을 쥐어 들려는 듯 손을 뻗었다.
그러나 꽃은 그 주먹 안에서 뭉그러졌다.
[피로하기로는 성하께서 그러실 테지요.]
“대공도 확인을 해 봤어야 했나.”
직계 황족은 성년이 되기 전까지 오 년 주기로 신성력을 측정한다.
선황자는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황성 밖으로 탈출했으니 측정이 여의치 않았겠다만, 칼릭스는 아니다. 그래서 넘어갔더니 이렇게 됐다.
“거슬리게 되었어.”
하긴, 세상일이란 합리적으로 돌아가는 것이 거의 없거늘.
제 실책임을 인정한 라우드가 가볍게 혀를 찼다.
그때였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아주 미약하게 들렸다.
들어온 사내가 깍듯하게 인사했다.
“본론만.”
피곤하다는 듯 라우드가 이마를 짚었다.
“마차 한 대가 선황비가 머무르는 저택 방향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꼭 사흘이 흘렀다. 시기상 튜베롯이 그 안에 있을 것이다. 어쩌면 샤를리즈 리엔타도 함께 있을지도 모르겠다.
툭.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볍게 한 번 두드린 라우드가 그만큼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이제야 하는군요. 칼릭스 엘루이든도 그 황제의 핏줄은 핏줄인 모양입니다. 피가 더 끌리는 거지요.”
후계로 적합한 황자가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되는 상황이었다. 대개는 무희가 출산하기 전에 처리했을 것이다.
실제로는 그저 잊었기 때문임에 불과했다. 알 만한 이들은 모두 아는 진실을 그렇게 표현한 라우드가 말을 이어갔다.
“제 조카의 안위와 비교하다가 이제야 해독제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선황비가 알게 된다면 많이 슬퍼하시겠어요. 미천한 출신을 이래서 거두지 않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도 있겠죠.”
고작 일주일이 조금 넘는 시간을 두고 하기에는 과장된 말이었으나 비통한 어조로 듣자니 꽤 그럴싸했다.
“하지만…….”
‘시간을 더 끌 이유가 없지.’
라우드가 비죽 입 끝을 올려 웃었다.
샤를리즈는 기대 이하였으나, 선황자가 가진 신성력의 그릇은 과연 남달랐다. 그 신수가 예쁨 받고 싶어 안달 난 이유가 있었다.
“은혜도 모르는 금수는 처분받아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 * *
선황비는 당분간 이 저택에 더 머무르기로 했다.
이번에는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깨어날 잠에 빠진 선황비의 얼굴은 평화로워 보였다.
사실, 나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발신지가 엔젤이었던 그 정체 모를 편지를 보낸 사람은 혹시 선황비일지도 모르겠다고 말이다.
‘조금 부끄럽다.’
거리에 있던 사샤의 손을 잡게 되었다. 엔젤이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를 만나게 됐다. 흑마법사 단체를 알게 되었다.
‘그런 데다 선황비를 엔젤의 저택에서 발견했다고 하니까.’
세 주인공 중 무려 두 명에게 소중한 인물이었다. 한 명은 대공이었고, 한 명은 향후 황제가 되었다.
그런데도 끝까지 등장하지 않았다 보니 혹시 데우스 엑스 마키나도 가능할 법한 인물인가 생각하고 만 것이다.
‘머쓱하군.’
소설 속에 살고 있다 보니 내 머리도 소설이 된 모양이었다.
수치스러움에 말없이 입에 빵을 욱여넣고 있던 때였다.
맞은편에서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볼이 빵빵하게 부풀었어, 샤를리즈.”
턱을 괸 채 칼릭스가 웃고 있었다.
“꼭 다람쥐 같아.”
방년 스물한 살 성인이 듣기에는 지나치게 간지러운 묘사였다.
다시는 내가 이 꼴로 빵을 먹지 않게 할 생각이었다면 아주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잠시 굳어 있다가 내 턱관절을 마구 혹사시키고 있는데, 칼릭스가 물잔을 내 쪽으로 밀었다.
“그러다 목이 막히겠어.”
“그 느낌이 좋은 겁니다.”
“그래? 그럼 나도 해 볼까…….”
볼이 빵빵하게 부푼 칼릭스라.
‘흠.’
해 보라며 나는 눈을 빛냈다. 그 모습마저 잘생겼을지 아주 정말 매우 몹시 궁금했다.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칼릭스를 위해 빵을 슥 밀자, 칼릭스가 고개를 기울이며 웃었다.
따뜻한 애정이 가득한 벽안과 마주쳤고, 그 순간 미래의 조각이 시작되었다.
‘다음에는 더 멀리 떨어져서 밥 먹어야지…….’
애달프게 생각한 것도 잠깐.
“…….”
나는 벌떡 일어났다. 그대로 칼릭스에게 달려가 그의 얼굴을 붙잡았다.
갑작스럽게 기울어진 내 무게에도 흔들리기는커녕 오히려 내가 더 기댈 수 있도록 하며 칼릭스는 느긋하게 물었다.
“오늘 조각의 내용은, 좋지 않아?”
“아주요. 아주 매우 몹시 엄청나게요.”
미래의 조각은 끝이 났다. 그런데도 나는 어딘가에 아직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잔해를 미련하게 찾아 헤맸다.
그것은 마치 심해에 빠진 열쇠를 찾으려는 것과도 같아서, 부질없다는 건 스스로도 알았다. 하지만 시도도 해 보지 않을 수는 없었다.
나는 눈을 꾹 감은 채 칼릭스의 이마에 내 이마를 대었다.
“마차 한 대가 선황비가 머무르는 저택 방향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제야 하는군요. 칼릭스 엘루이든도 그 황제의 핏줄은 핏줄인 모양입니다. 피가 더 끌리는 거지요.”
애석하다는 듯 그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제 조카의 안위와 비교하다가 이제야 해독제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선황비가 안다면, 많이 슬퍼하시겠어요. 미천한 출신을 이래서 거두지 않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도 있겠죠.”
그 당사자라도 되는 양 비통한 어조였다.
“하지만, 은혜도 모르는 금수는 처분받아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신에게 기도하듯 경건하게 눈을 감은 얼굴은 자못 성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