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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167) (167/232)

167화

파스슥.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파사삭.

‘흠.’

저 직후 칼릭스가 도착했고, 제이는 간단히 보고하고는 집무실을 나갔다.

‘뭐가 고맙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쁜 말은 아니었으니까.’

생각은 싹둑 자르고, 나는 다시 쪼개진 나무를 관찰하는 데 집중했다.

‘엄청나게 가벼웠던 이유가 있었군.’

속이 텅 비어 있었다.

“식물도감에는 이런 설명이 없었습니다. 원래 속이 비어 있진 않은 걸까요?”

“음.”

무언가를 생각하듯 묘하게 웃던 칼릭스가 문득 테라스를 바라보았다.

“마침 잘 왔어.”

“주군. 타이밍이 맞았습니까?”

처음 보는 기사가 희희낙락하며 들어오다가 나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혹시…… 그 공녀님이십니까? 아니지. 제가 이상한 소리를 했군요. 맞으시겠지요. 우리 주군이 약혼자 두고 으슥한 밤에 낯선 사람과 둘만 있을 만큼 몹쓸 종자는 아니시거든요.”

“칭찬 고맙다고 해야 할까.”

“에이, 우리 사이에 뭘 이 정도 가지고 고맙다고 하십니까? 그나저나 공녀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에릭이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아니면, 어이라고 하셔도…….”

에릭은 이후로도 쉼 없이 종알종알거렸다.

“……그래서 갖고 오라고 하신 게 이거 맞지요? 지키는 놈들이 있던데 어째 깊은 숲속인데도 엄청나게 삼엄하지 뭡니까. 몇 명 때려눕힐까 하다가 조용히 가져왔습니다.”

내 귀는 십 분 만에 사흘 치 혹사를 당하고 있다.

칼릭스는 수다쟁이 기사의 수다를 능숙하게 흘려 넘기며 나뭇가지를 꺾었다.

그리고는 단면을 보여 주었다.

“이건 평범하네.”

“저 나무로 무언가를 한 게 확실하군요.”

“누가 나무로 뭔 짓을 했습니까?”

칼릭스는 대답하는 대신 텅 빈 나무를 가볍게 던졌다. 허공에서 그것을 낚아챈 에릭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러면 한동안 잠잠할 거야. 호기심이 왕성해서 말이야.”

조금 웃던 칼릭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묻고 싶은 말이 있는 얼굴이네, 샤를.”

“나무가 있는 장소는 어떻게 파악하신 겁니까?”

“이름을 알고 있으면 어렵지 않아.”

역시 칼릭스가 초반에 사샤의 행방을 찾지 못했던 건 설정 오류였던 게 틀림없다.

에릭은 나무를 신기하게 보더니 테라스로 갖고 나가 달빛에 비춰 보고 있었다.

그 틈을 타 나는 말했다.

“흑마법사 집단의 수장도 곧 알 겁니다. 배에 실은 나무를 도난당하고, 숲의 나무도 누군가가 베어간 것을 말입니다.”

“그럴 테지.”

“배후를 전하로 상정할 겁니다.”

“어차피 나를 노리고 있지 않던가?”

칼릭스가 눈매를 살짝 구기며 웃었다.

걱정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지만, 돌이켜 보면 칼릭스의 인생은 온통 살아남은 흔적뿐이다.

검도 손에 안 익으면 실력 발휘를 못 하는 법인데, 하물며 생존 방식이었다.

게다가 본래 이런 건 일장일단이다.

“아닙니다. 효율적이기 위해서는 때로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하기도 하니까요.”

‘그 선택, 이해합니다.’의 뜻을 담아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정작 이해받은 칼릭스의 얼굴은 오묘했다.

잠시 나를 지그시 바라본 칼릭스가 말했다.

“다음에는 효율적으로 행동하지 않을게.”

“그러셔도 됩니다.”

“서로 그러지 않기로 하자. 위험부담은 굳이 감수할 필요가 없잖아.”

다른 사람에게 들었다면 ‘예? 너는 한 번 했으니 나도 한 번 하고 끝내야 하는 거 아닙니까?’하고 반박했겠지만, 원래 사랑하는 사람한테는 지는 거랬다.

나는 시원하게 내 패배를 받아들였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칼릭스는 수장을 교황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심증은 나도 그렇다.

일단 리닉스 공작의 윗선이 교황인 건 확실한데, 만약 교황의 위에 누가 또 있다면 내 기억을 최대한 되살려서 만든 원작을 불 싸지르겠다.

“그냥…….”

칼릭스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새삼 깨닫게 되었을 뿐이야. 시간은 유한하다는 것을.”

‘흠.’

“맞습니다. 하루하루가 소중한데, 그놈들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니…….”

심지어 이전 생에 개죽음당하고 두 번째로 사는 인생이기까지 한데.

먼 산을 바라보는 척 눈물을 말리고 있는데, 칼릭스가 목을 울려 웃었다.

“그렇지.”

그가 문득 창밖을 바라보았다.

야트막한 빛살로는 어둠을 완전히 밀어내기 힘들어서, 그가 정확히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무엇을 보고 있어요?”

“생각했어.”

칼릭스가 다시 나를 바라봤다. 햇빛이 조각처럼 파고든 눈동자는 뒤늦게 웃었다.

“네가 백 살까지 사는 생각.”

* * *

칼릭스는 우연을 믿지 않았다.

그건 마치 할 짓 없는 신의 장난과도 같아서, 그보다는 차라리 간지러운 온갖 말로 수식된 낱말을 선호하곤 했다.

그랬기에 정확히 스물두 송이의 꽃은 일종의 경고처럼 인식됐다. 하물며 그것에는 신의 날개라는 별칭이 붙어 있기까지 하니.

낯선 이름을 가진 익숙한 나무를 보던 칼릭스가 출입을 허가했다. 이것을 본 순간, 심증은 더는 심증이 아니게 됐다.

“주군.”

제이가 조금 가라앉은 눈으로 보고했다.

“소문은 순조롭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몰이꾼도 투입했으니 금세 수도를 뒤덮을 겁니다.”

그쪽이 원하는 대로 여론전을 펼치게 두느니 이쪽에 유리하게 풀어내는 편이 나았다.

[직접 와 줄 필요는 없는데, 여전히 다정하구나.]

선황비는 기쁘게 웃었다. 과거를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마찬가지로, 과거를 생각하는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말해도 돼.”

“안토니오 황제는 언제 제거하실 예정이십니까?”

제이가 답지 않게 얼굴을 구겼다.

칼릭스는 고민하듯 책상을 몇 번 두드렸다.

“사샤가 황위에 오를 때까지는 살려둘 생각이었는데…….”

“…….”

“이제는 모르겠어.”

덧붙이는 목소리는 묘한 웃음기가 스며 있었다.

“리닉스 공작은 어때?”

“보석금을 조율하고 있습니다. 곧 공작저로 돌아올 듯합니다.”

“공작 개인에게 타격이 되면서도 제국법상 수감되지는 않을 비리를 하나씩 제보해. 신문사 쪽이 괜찮겠어.”

“공녀님께서는 리닉스 공작을 얼른 제거하기를 원하시는 게 아니었습니까?”

“애석하게도 샤를리즈가 성실해.”

칼릭스가 콧잔등을 찡그리며 낮게 웃었다.

“테오도르 바나첼과 거래 조건이 리닉스 공작이었는데, 바나첼 후작은 목가적인 방식을 선호하더군.”

과연 초라한 감옥과 실존하지도 않는 시선에 마음만 괴로울 뿐, 잘 제련된 날로 단번에 보내주는 방식은 온건하다 못해 평화롭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튿날.

화창한 겨울이지만 여전히 공기는 차가웠다.

‘외부가 나았으려나.’

칼릭스는 앞머리카락이 달라붙은 동그란 이마를 물끄러미 보며 생각했다.

아이가 제법 자랐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얼굴은 여전했다.

집중해 오물거리던 입술이 이내 크게 벌어졌다. 아래 칸에서 빼낸 나무토막을 위에 올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칼릭스 역시 몹시 성의 있는 손짓으로 나무 탑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이런. 이제 사샤를 따라갈 수 없겠어.”

“그럼…… 다음에는 다른 걸로 해요.”

“음?”

“저도 이, 이거 지루해졌어요.”

피식 웃으며 칼릭스는 사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의 성장은 보호자의 기쁨이라던데, 그 말이 맞더구나. 그러니 내가 이 즐거움을 몇 번 더 알게 해 줘.”

손가락을 꼼질거리던 아이가 유순한 눈을 깜빡였다.

“요즘도 그런 꿈을 꾸고 있니?”

“아니요. 아니에요.”

“그래…….”

“숙부님. 나쁜 건 성물에 이상한 일을 한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응. 알아들었어.”

칼릭스가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익숙하게 품에 안기는 아이만큼 칼릭스 역시 이 작은 온기가 익숙해졌다.

“그래도 내가 한심하다는 생각은 어쩔 수 없네.”

“숙, 숙부님 하나도 안 한심한데!”

사샤가 화드득 고개를 들었다.

“미안해.”

칼릭스는 아이의 이마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이번 일도, 너를 너무도 늦게 찾은 것도.”

왜 무서운 꿈을 꾸게 했냐고 바락바락 울며 소리치는 버릇 없는 아이가 되지 못한 것도.

“앞으로 잘할 테니 용서해 줘.”

안절부절못하던 아이가 냉큼 대답했다.

“네에.”

“고마워.”

그러기를 잠시. 품속에서 아이가 꼬물거렸다.

의아하게 바라보자 사샤가 우물거렸다.

“아기만 품에 안기는 거랬는데.”

그러니까, 이만 내려 달라는 뜻이었다.

칼릭스는 낮게 웃고 말았다.

그런 순간이었기 때문에 빠르게 발견할 수 있었는지도 몰랐다. 온실 바깥의 대조되는 인기척을 말이다.

은쟁반을 손에 든 황성 시종이었다.

* * *

“선황비가 살아 있다고?”

안토니오 황제가 펄쩍 뛰었다.

사샤의 생존이 알려지고도 줄곧 잠잠해 죽은 줄 알았던 선황비가 나타났다. 아직 어린 나이였던 선황자와 달리 그녀는 어쩌면 비밀을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선황제가 급사하자 아이를 데리고 도주한 것부터가 수상쩍었다.

“자세히 말해 봐라.”

벌써 세 번째로 보고를 반복하여 읊는 시종의 얼굴은 겁에 질린 채였다.

황후가 죽고 황제의 성격이 한층 비틀리게 되자 듣기 싫은 말을 전하는 일은 신참의 몫이 되어 버린 탓이다.

“흑마법에 걸려 의식을 잃은 선황비 전하를 대공이 발견하였고, 선황비 전하께서 깨어나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어디서 발견하였고, 어떻게 일어났다는 말이더냐!”

“그것까지는 아직…….”

“제대로 하는 것이 없어! 제대로 할 줄 아는 것이 없어!”

본래는 황후가 이쯤에서 등장해 잔뜩 약 오른 황제를 부드럽게 진정시켜 주었을 것이다.

“썩 나가라!”

오늘따라 그리운 황후를 떠올리며 시종은 헐레벌떡 뛰쳐나갔다.

문을 닫고 겨우 숨을 고른 시종이 눈을 홉떴다.

“이런. 황제 폐하께서 화가 많이 나신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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