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교, 교황 성하를 뵙습니다.”
“음.”
라우드가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
“알현 신청을 미리 해야 했을까요?”
다행스럽게도 교황을 이곳까지 모시고 온 시종이 능숙하게 대응해 신참 시종은 더 큰 혼란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잠시 후.
분기를 겨우 가라앉힌 안토니오 황제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교황의 얼굴을 샅샅이 살폈다.
본인은 매우 은밀한 시선이라고 생각한 그 일련의 단계가 끝나고, 서론이 시작됐다.
한참 긴 서두를 이어가다 끝내 참을성이 바닥난 안토니오 황제가 먼저 물었다.
“한데, 교황께서 어쩐 일이 있어 이리도 급하게 귀한 걸음을 하셨습니까?”
그야말로 저가 우위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리고 싶은 속내가 단어 하나하나 진득하게 밴 물음이 아닐 수 없었다.
라우드는 시간을 더 낭비하지 않고 본론을 꺼냈다.
“외부에 귀를 닫고 신께 집중한 사이, 사특한 이들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안토니오 황제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그렇습니다. 선황비께서도 그것들에게 해를 입으셨지 뭡니까.”
“얼마 전, 신이 직접 말씀하셨답니다. 선황자 전하의 신성력을요. 그때는 단지 선황자 전하를 잘 모시라는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라우드가 빙그레 웃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들로부터 선황자 전하를 지키라는 뜻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지키라고?’
“그들의 사술은 지독합니다. 시전자가 사망해야만 풀리지요.”
아직도 머뭇거리는 겁 많고 멍청한 사내에게 라우드가 친절히 덧붙였다.
“물론 선황비 전하께서 의식적으로 선황자 전하에게 해를 입히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당사자도 속일 만큼 그 사술은 사특하니까요.”
그러니까, 선황비를 처단하자는 뜻이며 신전은 그 대가로 선황자의 거취를 원했다.
‘혹시 선황제의 죽음에 관련해 교황이 알고 있나……?’
그렇지 않다면 교황이 선황비를 정리하자며 그를 친히 찾아올 리가 없었다.
황제는 여전히 자애로운 미소를 띤 얼굴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 * *
모두가 깊은 잠에 빠졌을 늦은 밤.
잠잠한 호수 표면이 일렁이고, 이내 은색 머리카락이 툭 튀어나왔다.
“후우.”
제 팔을 달빛 아래 비춰 보며 소년은 뿌듯하게 생각했다.
‘예상보다는 오래 걸렸지만, 그래도 힘이 곧 돌아오겠어.’
그때가 되면…….
‘뭐어, 딱히 달라질 건 없지만.’
평화롭다 못해 지루한 시대였다.
어깨를 으쓱이던 소년이 돌연 눈썹을 모았다.
‘얘는 나를 무어라 생각하는 게야.’
내가 어떠한 위치인지 똑똑히 주지시켜주어야겠다!
홀랑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 꼭 기다렸던 부름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지만, 절대로 아니었다.
……그리고.
그럴 작정으로 무려 현신까지 해 야심만만하게 도착한 신수는 길길이 날뛰는 중이다.
“뭐? 감히 나의 아이에게 신전이 그런 짓을 했단 말이더냐?”
애정이 담뿍 담긴 호칭의 주인은 당연하게도 사샤였다.
“감히! 감히! 왜 진작 말하지 않았어!”
“신수님의 행방을 주시하는 눈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기는 한데……. 그래도 그놈들은 한낱 인간이지 않느냐!”
그러니까, 내가 더 세! 라며 씩씩거리는 소년을 샤를리즈는 약간의 존경심을 담아 쳐다봤다.
‘대단하다.’
신수는 엄청나게 오래 산다. 흑역사 하나 생기면 괴로워하는 날은 무척 많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무렇지 않게 적립하고 있다니!
“그래서, 이걸 말하려고 부른 건 아닐 테고 무엇이더냐?”
샤를리즈가 조금 웃었다.
소년은 저도 모르게 흠칫해 한 걸음 물러났다.
“성물, 하나만 주세요.”
“……뭐?”
“아니면 두 개도 좋습니다.”
“잠시만. 나한테 맡겨……, 아니지. 그것보다도 이거 합의된 사항이냐? 걔가 그러자고 할 리 없을 텐데.”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눈에 샤를리즈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게 중요합니까?”
당연하지! 무섭다고!
물론 이제는 한낱 인간에 불과한 존재에게 그런 감정을 갖고 있음을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신수는 “내가 먼저 물었다!”를 시전했다.
“그러지 말자고 했지만…….”
“했지만?”
“저는 부모 말도 안 듣습니다.”
“…….”
“그리고 시간을 더 끌 수 없기도 하고요.”
“왜?”
소년은 빈정거렸다. 이번에는 ‘제 성격이 급해서 말입니다.’ 정도의 이유를 달려나?
“저, 곧 죽잖아요.”
소년의 눈이 크게 동요했다. 아차 하며 숨겼지만, 상대는 그것을 이미 포착한 뒤였다.
* * *
‘또 이러네.’
레아의 상냥한 목소리 대신 얼굴이 축축한 느낌 때문에 깨어나는 게 익숙해진 시점이다.
욕실에서 베갯잇을 찬물에 벅벅 빨며, 나는 거울을 바라봤다.
‘흠.’
그래. 이상한 게 맞다.
이런 일상이 정상적일 리가 없었다.
‘병인가?’
공작가의 주치의가 그 엄청난 검사를 통해서도 발견하지 못한 병이라면 험난한 투병 생활은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겠다.
‘괘, 괘, 괜찮아.’
용감하게 현실을 받아들인 뒤, 쏜살같이 헤이즐을 찾았다.
“저는 치료사이지 의사는 아니어서…….”
의기소침해져 어깨를 축 내린 헤이즐이 중얼거렸다.
“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것 외의 다른 증상은 없다고 하시던가요?”
전문적인 용어 대신 선택된 무시무시한 표현이 헤이즐의 앞선 말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나는 살짝 겁에 질려 대답했다.
“으응.”
“흐으음.”
헤이즐은 또 한참 고심하다 어깨를 축 내렸다.
그다음으로 찾은 사람은 에릭이었다.
‘본디 수다쟁이에게는 많은 정보가 있는 법이지.’
행적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소음을 따라가다 보면 그가 있었다.
“그래서 내가, 어? 공녀님 아니십니까?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내 친구의 조카의 아는 사람의 이야기인데 말이야.”
내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에릭이 턱을 쓸었다.
“그것참 신기하군요. 의사보다는 신관을 찾는 게 맞을 수도 있겠습니다.”
“왜?”
“그야, 그쪽으로 경험이 화려하지 않습니까. 신의 보호를 받는 제국에서 견디지 못하고 사특한 피를 흘리는 거라고 얼마나 많이…….”
명랑한 목소리로 무시무시한 말이 이어졌다.
“이제는 신전에서 연기 나는 일이 없어졌으니, 왜 피를 흘리는지 해결 방법을 찾은 것 아니겠습니까?”
“……신전에 들키면 죽으니까 그런 병세를 꼭꼭 숨겨서 이제는 연기가 안 나는 걸 수도 있지 않을까?”
“죽이려고 들면 죽이면 되지요?”
나는 능력이 너무도 뛰어나 순박한 머리를 가지게 된 기사로부터 빠르게 뒷걸음질 쳐 사라졌다.
‘책으로 된 원작에서도, 꿈에서도 샤를리즈가 피 토하는 일은 없었는데.’
터덜터덜 걸은 걸음의 종착지는 꽃밭이었다.
특별한 우연은 아니고, 워낙 커서 정원에서 어디로 걷든 이곳에 닿지 않기가 어려워진 덕택이다.
처량하게 쪼그려 앉아 괜히 은회색 꽃잎을 손가락으로 여러 차례 건든 순간.
“아.”
투둑. 토양으로 떨어진 피가 금세 스며들었다.
‘어쩌면…….’
손수건 한 장을 흠뻑 적시고도 멈추지 않은 코피는 튜베롯 꽃밭과 멀어지고 나서야 차츰 진정됐다.
주변을 살피며 분수대에서 얼굴을 박박 씻고 누가 볼 새라 빠르게 내 방으로 돌아와 다이어리를 펼쳤다.
맨 첫 장으로 돌아갔다.
가장 중요한 건 본디 잊기라도 할까 봐 가장 먼저 적는 법이었으므로.
2년만 버티면 된다!
계획 1. 영지로 튀기.
계획 2. 숨죽여 살기.
계획 3. 결혼 소식이 들리면 인접국으로 여행 절대 안 돼! 이별 여행으로 보인다고! 아무튼 제국을 떠나기
계획 4. 거기서 살거나 제국 돌아오거나. 이건 알아서 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