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169) (169/232)

169화

똑똑.

“무슨 일이야!”

다이브 백작이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최근 그는 기분이 몹시도 저조했다.

그 빌어먹을 ‘그것’에 관한 건은 얼마 전의 일 이후로 모두 집사에게 일임해 아예 관심도 두지 않고 있으나, 피치 못하게 귀에 들게 되고 말 때가 있었다.

[슬슬 다음을 준비하셔야겠습니다.]

다이브 백작가는 대대로 신실한 가문이다.

그러나 전대 백작 내외는 유독 신실하였는데, 그것이 어느 정도냐면 성기사들의 훈련을 위해 엄청난 부지의 숲까지 가져다 바칠 정도였다.

그들은 “성기사들의 발전을 위해 기탁된 부지 중 가장 훌륭하군요.”라는 교황의 치하에 신이 나 있는 것 없는 것 다 싹싹 긁어모아 다시 기탁하는 면모까지 보였다.

그 지나친 신실함은 여식의 병세를 무려 교황이 친히 치료해 주자 한층 심화되었다.

[신께서는 견딜 만큼의 고통을 주시지요. 하니…….]

그들의 장자인 다이브 백작으로 말할 것 같으면, 역시나 신실하였으나 타고난 세속적인 성향 탓에 가족들처럼 머릿속이 온통 성스러운 하얀색 수준까지는 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 세속적인 성향 덕택에 지나친 신실함을 꾸며 낼 수는 있었다.

그리고 진짜로 거의 그 수준이 될 법한 일이 있었으니.

[대단하신걸요.]

교황의 감탄 어린 말을 들은 때였다.

아무도, 심지어 대신관들마저도 보지 못한 수정구슬 속 풍광을 그만이 볼 수 있음이 밝혀진 그때 말이다.

쓸모없는 숲으로 시작된 인연이 이렇게 단단한 연줄이 되리라고 믿었건만.

[부유한 귀족이든 거리의 걸인이든 모두 똑같습니다.]

‘…….’

그러다 다이브 백작은 불쑥 의아해졌다.

다른 생각에 깊이 잠겨 있느라 문밖의 사람으로부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탓이다.

‘뭐지?’

그리고 그 순간.

똑똑.

마치 기다렸다는 듯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한소리 할 작정으로 인상을 팍 구기며 문가로 성큼성큼 다가가던 다이브 백작이 주춤했다. 사위가 지나치게 고요했다.

‘종. 종을 울려야겠다!’

황급히 뒤돌고자 했으나 커다란 천으로 시야가 가려지는 것이 더 빨랐다.

* * *

대체 뭐 하는 짓이냐며 악악 소리 지르던 다이브 백작이 차분하게 입을 닫은 것은 마차의 탑승감이 지나치게 좋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선회하는 방향도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마부의 솜씨가 꽤나 좋기까지 했다.

썩 불청객스러운 접근이기는 했으나, 최소한 그를 해하려는 목적은 없어 보였다.

‘돈이 많은 집안이라면 엘루이든? 리엔타? 아니지. 저 두 가문이 나를 왜? 그럼 신실한 필리엄인가?’

그의 가문도 가문일뿐더러, 그 자체도 신전에 줄기차게 드나들기는 했다.

아리송한 머리는 이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쪽으로 생각을 마쳤다.

‘저 셋 중 어디든 낫지.’

이왕이면 이런 방식으로 데려와 미안하다며 돈을 쥐여주면 더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 백작은 기사의 안내를 받아 엉거주춤 멈춰 섰다.

그리고 천이 벗겨지자…….

‘뭐, 뭐야!’

“흐음.”

마치 감정하는 듯한 눈으로 샤를리즈가 그를 빤히 보았다.

생각해 둔 말은 목 뒤로 다시 넘기며 백작은 눈을 굴렸다.

“내가 어떤 동화책을 읽었는데.”

며칠 전. 허겁지겁 달려왔던 집사가 문득 생각난 것은, 이어질 공녀의 말을 예감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주, 주인님. 그 건에 관해서 말입…….]

[내가 이야기하지 말라 하지 않았어!]

“꽤 인상 깊었어. 아주 오랜만이었지. 그런 기분 말이야.”

리엔타 공녀의 미감은 유명했다.

만약 공녀의 평판이 조금만 더 좋고, 공녀가 예술품에 조금만 더 관심이 있었더라면 리엔타는 예술가들의 서신만 분류하는 사용인을 여럿 고용해야 했을지도 모른다는 우스갯소리마저 있을 정도였다.

“처음에는 오랜만에 보는 동화책이라서 그런가 했는데, 다른 것들과는 역시 다르더군.”

다이브 백작은 속으로 진땀을 흘렸다.

흘려 넘겼던 공녀의 그 유명한 직감은 한 치의 과장 없는 진실이었던 게 틀림없다.

“그래서 백작을 내 전속으로 고용하고 싶어.”

“예? 예?”

“돈은 결코 섭섭하지 않을 거야.”

늘 자애로운 미소를 짓는 신의 사자는 배신 앞에서도 자애롭지는 않을 터였다.

백작이 눈만 굴리자 샤를리즈가 물었다.

“왜, 조건도 들어보지 않을 만큼 별로야?”

무표정한 얼굴이 까딱 기울어지자 백작은 서둘러 변명했다.

“제가 남몰래 동화책을 집필하는 이유는 즐거워할 아이들 때문이고…….”

“때문이고.”

“……그리고…….”

“흠. 이해했어.”

샤를리즈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다고 말이지. 차 한잔해.”

잠시 뒤, 투명한 적갈색 차가 담긴 찻잔이 앞에 놓였다.

분위기상 도저히 먹지 않을 수 없어서 백작은 차를 삼켰다.

“지금의 생활을 내가 건드리지 않아도 어려운가?”

“그렇다면 괜찮습니다만. 그럼 굳이 전속 계약을 제안하실 이유가 없지 않으십니까?”

“집필 과정이 궁금해.”

“그건 어렵습니다.”

‘왜, 왜 이러지.’

백작은 제 자유분방한 주둥이를 막고자 입을 꾹 닫았다.

눈치를 살피며 맞은편을 보자, 묘하게 웃는 미형의 얼굴이 있었다.

“아, 그래?”

* * *

적당한 선에서 얻어 낸 정보 중 가장 쓸 만한 것은 이렇다.

그 이야기는 백작의 머리가 아니라 눈에서 시작된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조잘거린 백작의 얼굴은 굉장히 희게 탈색되었기 때문에 일단은 그쯤에서 멈췄다.

어차피 얻을 건 거의 얻기도 했다.

‘보고서를 보고 백작은 눈속임일 거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진짜 그렇다니 조금 허탈하긴 하군.’

손에 든 종이를 툭툭 두드리다가 문득 시선을 내렸다. 마침 눈에 들어오는 문장은 신전 출입이 잦다는 부분이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어떤 이야기를 널리 알리는 목적은 내가 알기로 하나뿐인데.’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게 하기 위함이다.

읽는다는 건 기억한다는 거다.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그것은 잊히지 않는다. 잊히지 않는다는 건 존재하는 것과 같다.

존재하는 것은 때로 그 자체로 힘을 갖는다.

하물며 여기는 신이 있는 세상이다.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비합리적인 현상이 존재하는 세계.

‘너, 궁극적인 목표가 뭐야?’

단순히 권력을 탐하는 정도는 아니리란 건 확실했다.

* * *

어린아이를 위해 맞춤으로 제작된 공간은 도롱거리는 자그마한 숨소리만이 유일한 소음이었다.

칼릭스는 조카를 재우고자 소리 내어 발음했던 책의 다음 장을 넘겼다.

굳이 동작하지 않아도 다음 내용을 알고 있으니, 이건 그답지 않은 불필요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었다.

기억의 일부를 되찾고 난 뒤, 칼릭스는 이런 우습지도 않은 수작을 부리는 자들을 찾아내 더는 손을 쓸 수 없도록 만들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판단은 금세 바뀌었다.

제삼자의 눈으로 적힌 내용을 보다 보면 저도 모르게 실소를 흘리게 되곤 했으나, 이 실존하는 무게감은 나쁘지 않았다.

물론 가장 주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것을 통해 그의 기억은 온전해질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사람들의 믿음으로 힘을 얻는 신수 혹은 신이 된 듯해 썩 불쾌하지만 참을 만했다.

그런 관점에서 이 동화책의 흥행은 신전에도 예기치 않은 부수적인 행운이라고 할 법한 것이었다.

마지막 장을 닫으며, 칼릭스는 무심결처럼 창밖을 바라보았다.

샤를리즈가 돌아오고 있었다.

* * *

이튿날.

칼릭스는 기꺼이 이복형의 말을 수락해 황성으로 향했다.

“선황비가 흑마법사에게 오랜 시간 억류되어 있었다지. 어째서 그것을 숨겼느냐.”

안토니오 황제가 싸지른 말은 그가 할 법하다고 예상되는 것들 중 하나였으므로 칼릭스의 표정은 군더더기 없는 의례적인 미소 그대로였다.

“확실하지 않아 조심스러웠습니다.”

“조심해야 할 것이 따로 있지! 그 사특한 무리가 어떤 간계를 썼을 줄 알고 겁도 없이 선황비를 만나, 만나기를!”

제 화를 이김에 한 번 풀고, 안토니오 황제는 헛기침하고는 말을 이어갔다.

“신전에 말을 해 두었다. 선황비를 보내 감정을 받게 해.”

“감정이라니, 선황비 전하께서 물건도 아니고 너무하신 것 아닌지.”

그건 분명 고요한 음절이었으나, 안토니오 황제는 저도 모르게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그게 수치스러워 황제는 보다 근엄한 투로 말했다.

“긴말할 것 없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지.”

“다행이군요.”

빈정거리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마뜩잖다는 듯 얼굴을 구기고 있던 황제가 반응했다.

“폐하. 저는 흑마법사들을 소탕하고자 합니다.”

앞에 ‘선’이 붙는 황족에 대한 칼릭스 엘루이든의 마음을, 안토니오는 어쩌면 칼릭스 다음으로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저 얼토당토않아 보이는 계획이 진심임을 알 수 있었다.

안토니오가 약삭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칼릭스가 직접 한다고 해도 기록은 결국 내 대의 한 줄로 쓰일 터.’

“그런데 흑마법을 구분할 줄 아는 인재가 신전에 많다니, 다행이 아닐 수가요.”

어느덧 주제는 선황비로부터 교묘하게 멀어져 있었지만, 황제는 눈치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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