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170) (170/232)

170화

“하하.”

어린 신관이 귀를 쫑긋했다.

매사 온유한 교황 성하께서는 소리 내어 웃는 일이 드물었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살짝 눈을 들어 확인한 얼굴은 과연 만면이 미소로 화사했다.

‘황제의 친서에 좋은 내용이 담겨 있나 봐.’

그것을 전달한 사람이 바로 소년이었다. 어린 신관은 콩닥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뿌듯하게 교황의 처소에서 나갔다.

한편, 놀랍게도 라우드는 진정으로 웃는 것이었다. 심지어 아주 오랜만에.

그가 친히 걸음까지 하여 언급한 선황비의 처리 방안을, 황제는 안타깝게도 그 머리통의 크기에 비해 한없이 작은 용량 탓에 잊은 모양이나, 대신 꽤 구미가 당기는 수확을 물어 왔다.

‘비록 기억하진 못한다고 하더라도 키워준 사람과 숙부가 흑마법사들의 손에 죽는다면, 선황자는 공포를 똑똑히 학습할 터.’

과연 대공은 썩 골치 아픈 존재였다. 다음 단계를 위한 적절한 처리가 아니라 그저 정리하는 것에 불과한데도 꽤 많은 소모가 예상된 바였다.

‘그 죽음을 여러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겠어.’

흡족한 미소는 얼마 지나지 않아 걷혔다.

퍽 선량한 눈매가 얼핏 차가워진 때, 손아귀 안의 서신이 엉망으로 우그러졌다.

‘어떻게 알았지?’

계절이 하나 지날 만큼의 시간 동안 선황자는 아주 잠잠했다. 무서운 꿈을 꾼다며 대공에게 달려가 징징거렸겠다고 치부하고 말기에는 마음에 꽤 걸리는 간극이었다.

‘선황자의 성력이 보다 개화한 것인가.’

그래서 오르골 형태의 성물에게서 이질감을 느낀 것일 수도 있겠다.

‘하긴, 본래는 지금쯤이면 완전히 개화했어야 했으니 이상할 것은 아니지.’

손을 많이 탄 나무는 굵은 열매로 보답하는 법이다. 선황자가 부디 나무보다도 못한 종자가 아니기를 바랄 뿐이었다.

‘아니면…… 혹시 선황자의 주변에서……, 아니지.’

어차피 곧 선황자가 수중에 들어올 테니 아무래도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는 했다.

어쩌면 이 불길한 감각은 그저 오늘 신성력이 많이 소모되기로 예정된 터라, 근원적인 힘을 비록 일시적이라고는 하나 소실하는 데서 기원한 예민함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밤.

“……공녀가 그런 제안을 했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라우드는 불쌍할 만큼 그의 기색을 살피는 다이브 백작의 시선을 느끼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것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다이브 백작이 다시 입을 놀렸다.

“리엔타 공녀는 예술품의 감정에 재능이 있기로 어린 시절부터 유명했습니다. 그러니 과연 이 이야기가 다른 것들과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자연…….”

“그만.”

그 입 닥치라고 하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라우드가 인자하게 웃었다.

“이해했습니다.”

“예, 예에.”

“공녀의 제안은 수락하세요.”

“예?”

되물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조금 찌푸린 얼굴로 웃자 다이브 백작은 “그리하겠습니다.” 하고 얼른 고개를 주억였다.

숙인 머리통을 내려다보며 라우드는 가늠했다.

‘신의 뜻은 공녀를 시험해 보라는 데 닿아 있던가.’

난데없이 그 공녀가 얽힌 이유로 가장 합당한 것은, 신의 뜻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라고, 이미 신에게서 멀어진 남자는 생각했다.

* * *

나무가 빽빽한 숲은 사위가 어두웠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 고즈넉한 분위기를 간직한 그곳에서, 새들이 갑자기 하늘로 날아올랐다.

위대한 존재를 반사적으로 감지해 최대한 멀어지고자 하는 본능의 발현이었다.

“이것도 안 되고. 이것도.”

그 위대한 존재는 한낱 인간의 부탁을 받아 둥지를 뒤지는 중이다.

“우씨.”

입술을 꽉 깨문 소년이 철퍽 주저앉았다.

“대충 금화나 가져다줄까 보다.”

그럼 ‘그것’이 보였던 것은 그저 우연에 지나지 않았나 보다고 생각해 이런 부탁을 다시 할 일은 없을 것 아닌가.

그런데 또 그러면…….

[저, 곧 죽잖아요.]

소년은 비록 인간의 시간 개념을 제대로 파악하지는 못했으나, 비유에는 재능이 있었다.

용이라는 족속 된 입장에서 그를 찾는 인간들에게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풀어주어야 할 때가 있었으니, 이것은 어찌 보면 재능보다는 숙달되었다는 표현이 적합할 수도 있겠다.

“외면한다면 곧이 아니라 몇 시간 뒤가 될 테지.”

한숨을 폭 쉬며 소년은 줄곧 못 본 척하고 있던 성물 하나를 챙겼다.

노르스름한 표면에 비친 앳된 얼굴은 착잡해 보였다.

* * *

대공저 요리사의 솜씨는 대단하다.

오늘도 감탄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먹고 체력 증진을 위해 복도를 뺑글뺑글 돌았다.

괜히 넋 놓고 있다가 또 튜베롯 꽃밭으로 향해 코피 쏟는 일은 사양이다.

‘내 명줄은 내가 챙겨야지.’

비록 그것이 너무 짧다고 해도 말이다…….

슬쩍 눈물을 훔치고 있는데 불현듯 인기척이 느껴졌다.

‘설마 또 3층 복도로 온 건가?’

이러다 환생하지 못하고 유령이 되어 고참 사용인에게서 신참 사용인에게로 구전되는 엘루이든 대공저 3층 복도의 무서운 전설로 남게 될까 봐 덜컥 위기감이 들었다.

“여기 있었네.”

다행인 것은 둘 있었는데, 하나는 여기가 3층 복도가 아니라는 것이고, 하나는 저 부드러운 목소리의 주인이 칼릭스라는 것이었다.

“황성은 잘 다녀오셨어요?”

“응, 잘 다녀왔어.”

눈웃음 지은 칼릭스가 단조롭게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선황비 전하가 두려운 모양이야.”

본인이 한 짓이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겠다.

“그래서 선황비 전하를 처리하고 싶은가 봐.”

“몹쓸 놈이군요.”

칼릭스가 작게 웃었다.

“응, 몹쓸 놈이네.”

그러고는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나도 걷고 있었다.

반쯤은 어리둥절하게 반쯤은 신기하게 그를 쳐다보자 칼릭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나는 진심으로 중얼거렸다.

“만약 칼릭스가 기사단장이었으면 그 기사단은 무패의 기사단이었을 겁니다.”

체력 단련도 체력 단련인 줄 모르게 하는 능력자가 단장으로 있으니 힘겹게 수련하는 타 기사단보다 능률도 좋았을 게 틀림없다.

“음.”하고 목을 울린 칼릭스가 웃었다.

“가끔은 공녀가 하는 생각을 아직도 잘 모르겠어…….”

나는 눈을 부릅떴다. 똑같이 돌려주겠다.

나도 그렇다.

[제가 어느 동화책의 작가에게 집착한다는 소문이 날 수도 있지만, 제 첫 집착도 마지막 집착도 대공 전하 한 분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습관적으로 나간 옛 호칭에 속으로 아차 하고 있는데, 정작 칼릭스는 호칭을 지적하는 대신 묘하게 웃었다.

[그거, 꼭 낭만적인 서약처럼 들려.]

“숙부님! 앗, 샤를 님!”

문을 빼꼼 연 아이의 눈이 화등잔만큼 커졌다.

칼릭스는 제 이름 앞에도 ‘앗’을 붙여 달라며 사샤를 놀리거나 한 품에 안아 드는 대신 사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품에 안기는 것을 거부하는 어린이는 다행스럽게도 아직은 동화책을 즐거워했다.

꾸벅꾸벅 혼곤한 잠의 세계로 빠져드는 아이의 이마에 배웅의 입맞춤을 한 번씩 나란히 했다.

그리고, 칼릭스는 말했다.

“성물을 접하는 게 가장 빠른 방식이라는 걸 알아.”

‘……!’

신수는 인간들의 암묵적인 규칙을 몰랐나 보다.

슬쩍 리엔타 공작저로 가져가 이틀 밤 자고 올 생각이었던 나는 변명하고자 머리를 마구 굴렸다.

“그래도 공녀가 걱정됐어. 그래서 하지 않기를 바랐어. 하지만…… 이제는 하지 말라고 하지 않을게.”

그건 꼭 감정싸움의 끝에 다다라 관계를 놓기 전 마지막으로 하는 말 같았다.

마음이 쿵 내려앉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손등을 덮은 따듯한 온기 덕택이었다.

“대신 내 옆에서 해 줘.”

칼릭스가 내 손등에 입을 대었다. 건조한 동작이었던 만큼 금세 웃으며 뗄 줄 알았는데, 그는 한동안 그러고만 있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읊조리려다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해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에게 해야 할 적당할 말을 알지 못했다.

“다음에는 혼자 하려고 하지 않을게요.”

정답이 맞았다.

* * *

한 달은 내 부탁을 외면할 듯했던 신수는 의외로 일찍 찾아왔다.

왠지 내 옆에 있는 칼릭스를 보고 흠칫할 것 같았던 소년은 복잡한 얼굴로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성물을 떠넘기듯 내 품에 안길 뿐이었다.

“선택은 네 몫이다.”

“예.”

“기억해라. 선택은 네 몫이야.”

‘어어…….’

어쩐지 굉장히 찜찜한 기분이 되는 말이었다.

그리고 빛이 시야에 번졌다.

‘잠시만. 이러고 사라지기야?’

그러나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이거 놓아라!”

“샤를리즈가 묻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앞으로 얘가 옆에 있으면 난 바로 사라지겠다!”

씩씩거리는 소년이 나보고 얼른 말하라며 윽박지르듯 노려봤다.

칼릭스에게 속으로 ‘잘했습니다!’하고 손뼉을 짝짝 치고 있었으므로 저 시선은 죄 없는 사람을 노려보는 얍삽한 짓거리는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 다음에도 만날 수 있는 거죠?”

소년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번졌다.

“나는 네가…….”

다른 걸 물어볼 줄 알았어.

그 말은 아주 자그마해서 귀를 쫑긋 기울여야 들렸다.

‘흠.’

예상한 질문이 아니라 실망할 만큼 야심 차게 준비한 대답이 있는 듯하니 나는 흔쾌히 말을 바꿨다.

“그럼 다른 걸 물어보겠습니다.”

“됐다! 됐어!”

소년이 아까보다 크게 씩씩거리며 발을 굴렀다.

“그래. 다음에도 만날 수 있다! 내일도! 모레도! 됐냐?”

“예.”

그리고 소년은 빛 속으로 홀랑 사라졌다.

빛이 사그라들 때까지 손을 휘휘 흔들고 있다가 나는 성물이 담긴 상자를 열었다.

‘어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