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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171) (171/232)

171화

내용물은 보지 못했다. 칼릭스가 곧바로 닫았기 때문이다.

“역시 침대가 더 좋지 않겠어?”

창문 근처의 푹신한 안락의자에 앉은 채 나는 대답했다.

“몸이 편하면 정신이 풀어집니다.”

“그 말을 들으니 왠지 은밀히 잠입한 기분이야.”

뜨끔하는 기색을 감출 겸 상자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는데, 상자의 윗부분을 덮고 있던 손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칼릭스가 웃었다.

“일찍 돌아와.”

그러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나는 상자를 열었다.

‘어어?’

그 안에 있는 것은 주먹 두 개만 한 금덩이였다.

“금…….”

의식을 잃어가는 중에도 무의식적으로 소리 내어 중얼거리고 말게 될 위용이었다!

그러다 문득 눈을 깜빡였다. 칼릭스가 내 손을 아플 만큼 그러쥔 직후였다.

아른거리는 머리로도 이건 알았다.

그는 금덩이를 길게 바라보고 있었다.

* * *

“공녀님. 제 말 잘 들으셔야 해요.”

이리안이 마른침을 삼키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철썩―

‘야, 이…….’

내가 한 짓이되 내가 한 것이 아니었다.

이번의 현상은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없음을 확인받았다.

고개가 왼편으로 돌아간 채 아랫입술을 말아먹은 이리안이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공녀님. 라프란체의 이리안입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맞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무슨 일로 방문했지? 그것도 미리 기별도 없이 말이야.”

“공녀님.”

이리안이 다급하게 말했다. 그건 좀 이상했다. 이 시기의 그녀가 내게 다급해야 할 만한 일이 있던가.

“신관이 찾아온다면 문을 닫고 절대로 열어주시면 안 돼요.”

“왜?”

“공녀님을 신전으로 데려가려고 하는 거니까요.”

“왜?”

“그, 그건…….”

이리안이 머뭇거렸다.

아마 그녀를 바라보는 내 얼굴이 지독히도 싸늘했던 모양이다. 이리안이 작은 어깨를 흠칫했다.

“가시면 안 돼요. 공녀님이 위험할 수 있어요.”

“네게 좋은 일 아니야?”

“네?”

“내가 죽으면 너를 괴롭히는 사람은 모두 사라지잖아.”

“……아니에요.”

이리안이 고개를 푹 숙였다.

“아니에요.”

그리고 눈을 감았다 뜬 순간. 장면이 전환됐다.

그리고 엄청난 격통이 속에서 일었다.

만약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면 아마 지금 내 꼴은 허리를 접고 헐떡이는 것이었을 테다.

“아가씨. 가시면 안 돼요.”

멜리사 부인은 리엔타 공작저의 세 실세 중 가장 의연한 성격이다.

그런 그녀가 지금은 눈물범벅인 얼굴을 미처 감추지도 못한 채 나를 붙잡고 있다.

“이거 놔.”

“가주, 가주님께서 잘 해결하실 거예요. 그러니…….”

“놓으라고 말했어.”

“아가씨.”

멜리사 부인이 흐느꼈다.

“이거였구나.”

나는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이거였어.”

공작이 해독제를 얻는 대신 교황에게 주기로 한 것.

제 안위였다.

신전의 입장으로 보다 명확히 말하자면 공작의 위험을 외면할 리가 없는 ‘샤를리즈’를 신전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발판이었다.

두 번째로 고개를 든 감정은 단연 의아함이었다.

‘……왜?’

이때의 샤를리즈 역시 신성력이 있었던 걸까?

그렇다면 이 방식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유의미한 신성력을 가졌음을 자각하는 가장 보편적인 경우는 치유력이다. 보통 십 대 초반에 겪으며 자의로든 타의로든 신전에 투신하는 비율은 결코 적지 않다.

‘신성력이 있다고 해 봤자 대단하지도 않은데, 공작가를 적으로 돌리면서까지 이런다고?’

심지어 그 가문의 가주는 면책권까지 보유하고 있는데도.

길게 생각할 수는 없었다. 다시 장면이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속이 새까맣게 타는 듯한 고통 탓인지 감각이 둔중했다.

아니, 실제로 그런 게 맞았다.

다가오는 손을 매섭게 쳐 냈으나 상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한 품에 안아 들었다.

차가운 바람이 묻은 옷자락에는 피가 튀어 있었다.

“왜, 이리안이 내가 불쌍하니 구해달라고 울기라도 했던가?”

칼릭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정면만 직시할 뿐이었다.

내가 ‘샤를리즈’의 몸으로 눈을 뜨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일까. 그녀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돼 순간 지금이 현실인지 아니면 그저 꿈속에 불과한지 혼란스러웠다.

이 미칠 듯한 감각이 거짓일 리가 없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될까.”

칼릭스가 불쑥 입을 연 것은 그런 순간이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하면 이런 짓을 하지 않을 수 있겠어?”

“이런 짓?”

칼릭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해 봐. 한 짓이 하도 많아서 헷갈려서 그래.”

인내하듯 단단한 목울대를 거칠게 일렁인 남자가 차갑게 말했다.

“신전과 결탁해 제국에 반기를 드는 행위.”

“뭐야.”

나는 문득 웃었다.

“제물로 바쳐질 신세가 처량해 보여 도와준 줄 알았더니, 주동자라고 생각했는데도 빼내러 왔다는 거잖아.”

나를 붙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이전의 경우처럼 밀쳐지는 듯한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혼신의 힘으로 이 세계를 붙잡았다.

그러자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한 격통이 뇌리를 꿰뚫었다.

그러나 헛짓거리는 아니었다.

다시 눈을 뜬 순간, 교황을 마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 *

권력이 계승되는 자리는 주인을 위한 보물이 하나쯤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놀랍게도 오직 신만을 모셔야 하는 신전에도 있었다.

이전의 위세를 잃은 신전이 지금의 위치로 유지될 수 있는 것은, 막대한 신성력을 펼쳐 보이는 교황이라는 존재 덕택이다.

그러니 그를 칭송하게 되는 건, 어떻게 보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섭리였다.

주인을 향한 기도를 남김없이 먹어 치운 성물은 비슷한 기능을 가진 성물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월등해졌다.

그러니 금이 간 성물을 바라보는 주인의 눈이 싸늘한 건 당연했다.

깊게 난 균열을 손끝으로 매만지던 라우드가 눈매를 찌푸렸다.

내부의 오래된 균열을 발견한 탓이었다.

“언제부터였지?”

아무리 주인의 위기를 알린다고는 하나, 결국은 일종의 조형물에 불과한 것이 답을 할 수 있을 리 없다.

[신수가 사라졌습니다.]

[신수가 호수에 복귀한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 보고의 시간차는 하루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보고를 들은 때는 이미 며칠 전이었다.

‘최근에 다시 어딘가를 향했던가?’

세상일에 깊이 관여한 죄로 힘을 회수당해 작은 호수에 잠겨 든 존재는 아무래도 머리가 아주 나쁜 모양이다.

아니면 지나치게 착해 빠진 머저리든가.

그때였다.

똑똑.

“들어오세요.”

라우드는 성물을 다시 협탁 위에 올려 둔 채 균열이 보이지 않도록 각도를 조정했다.

조심스럽게 들어 온 어린 신관이 공손하게 눈을 내리뜬 채 고했다.

“엘루이든 대공이 성하와의 독대를 청하는데, 어찌할까요?”

라우드가 부드럽게 웃었다.

“대공이 이런 실례를 저지를 정도라면 이유가 있겠지요. 수락하겠다고 전하세요.”

그리고 듣게 된 말은, 예상 범주 내의 것이기도 했고 조금쯤 빗나간 것이기도 했다.

“리닉스 공작을 이용해 소탕하시겠다고요.”

“음.”

한때, 얼굴만으로 출신을 엿볼 수 있다는 악의 서린 말이 돌았던 미남자가 조금 곤혹스럽다는 듯 웃었다.

황제의 인신공격에도 흔들린 적 없는 얼굴이니 진정 곤혹스러운 건 아닐 터였다.

“성하께서 그런 의미로 받아들였다면 그렇겠지만, 리닉스 공작을 길잡이로 삼자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샤를리즈 리엔타는 리닉스 공작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

교차점이 없는 사이였으나 공작이든 공녀든 적이 많은 인물이었으니 그 원한 관계가 새삼 의문스럽지는 않았다.

어차피 샤를리즈 리엔타가 결정한 이상, 리엔타 공작이 이뤄줄 테니 곧 처리될 작자의 관계도를 탐구할 생각은 없었던 탓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썩 다르진 않았다.

라우드는 뭉근하게 웃었다.

“하나, 리닉스 공작은 그 증거가 조작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수락하지 않을 텐데요.”

“황제 폐하께서 허락하셨습니다.”

기울어져 가는 신전의 인정을 받고 싶어 하던 사람이 바로 황제였다. 그만한 인정 욕구를 가진 인간이 업적에 눈이 멀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하기는 했다.

‘조금 곤란한데.’

라우드는 공녀의 질문에 대답을 술술 읊었다던 그 말단을 떠올렸다.

그의 얼굴을 기억하는 리닉스 공작에게는 정교한 주술을 걸어 두었으나, 세상일이란 이치에 맞게 돌아가는 법이 없었다.

또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 모른다.

생각을 끝낸 라우드는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사특한 주술을 사용하는 이들을 교화하는 일에 신전 또한 협력하지요.”

물론 그들이 교화될 일은 없으므로 소탕과 뜻이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밤.

리닉스 공작은 다수의 불청객을 맞이하게 된다.

* * *

음.

일어나 보니 리닉스 공작이 대공저 지하 감옥에 있을 확률을 구해 보시오.

“시끄럽게 난동을 부려서 재갈을 채웠어.”

나는 내 연인의 재주를 하나 또 알았다.

바로 착한 얼굴로 스산한 말을 단정하게 할 줄 안다는 것이다.

“황제 폐하께도 허락받았고.”

준비성이 철저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재주 중 하나였다.

“잘 다녀왔어?”

다정한 미소를 보며 고개를 끄덕끄덕하다가 문득 그의 어깨 너머 하얀 꽃밭을 발견했다.

사샤가 조막만 한 손으로 꼬물거리며 열심히 땅을 파기도 했고, 하루를 낭비하지 말고 열심히 살자는 의미로 내버려 두었던 꽃에 잠깐 시선을 두었다가 나는 물었다.

그때 그가 지은 표정에 적합한 단어를 찾았다.

“성물을 보고 왜 놀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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