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173) (173/232)

173화

‘음.’

신전의 방음이 형편없다는 정보를 얻었다.

최종 보스 격인 남자를 목도하기는 했다만, 여기까지 데려오라고 했을 정도라면 왠지 이럴 것 같아서 그러려니 했다.

“다이브 백작에게 물었습니다.”

백작이 별 미친 사람 본다는 듯 쳐다봤지만 늘 받던 시선이라 간지럽지도 않았다.

정작 교황은 썩 온유하게 웃었다.

“제가 백작보다 효율적인 답변을 드릴 수 있을 거랍니다.”

그건 꼭 권유와도 닮아 있었으나, 실상 전혀 달랐다.

내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다는 듯 곧장 다음 행동을 개시한 것이다.

테이블에 웬 구슬이 놓였다. 투명한 구슬은 주먹보다 살짝 컸다.

아무래도 다이브 백작이 본다는 그것 같다.

‘눈이 많이 아팠겠어.’

“이 성물은 백작이 소개해 드릴 수 있겠군요.”

“예? 예. 그렇습니다. 이것은 말입니다. 제가 이야기를 쓰는 게 아니옵고, 이 구슬 속을 관찰하여 다듬는 것, 다듬습니다.”

횡설수설 백작이 말을 마쳤다.

“그 전에, 공녀께서 당혹스러우실 지점부터 설명해도 되겠습니까?”

구슬에서 시선을 떼고 교황을 쳐다보자 그는 이번에도 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어째서 신전 소속 성물로 신전 소속도 아닌 외부인을 통해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지.”

다이브 백작의 손이 순간 튕기듯 움찔했다.

이번에는 내 답을 기다려 주겠다는 듯 교황이 잠시 나를 응시했다.

나는 네가 대신 설명하라며 다이브 백작을 보았고, 백작은 야멸차게 내 시선을 무시했다.

불가피하게 물리적인 과정을 거칠 생각으로 검지를 날카롭게 세웠을 때, 얕은 웃음기 서린 어조가 이어졌다.

“공녀도 읽었다고 하니 아시겠지요. 동화책에 나오는 그 용이 바로 신수이십니다.”

“…….”

“짐작하셨습니까? 어째서 이 이야기를 알리려고 하는지 말입니다. 저는 신수께서 다시 현신하시어 모습을 드러내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우스운 방식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무엇이든 해 보려고 한 노력의 발로라고 생각해 주신다면 좋겠군요.”

“이걸 제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공녀가 처음이었습니다.”

그가 무심결인 듯 상체를 내 쪽으로 가까이 숙였다.

‘됐다.’

다이브 백작이 신전과 얽혀 있다는 건 이미 숙지한 정보다. 백작을 만나는 길이니 혹시 몰라서 아침에 칼릭스의 눈을 안 보고 왔는데,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적기를 놓치지 않고 시선을 마주쳤다.

교황의 동공에 맺힌 내가 보일 정도로 꽤 가까운 거리였으나, 펼쳐지는 것은 없었다.

‘메커니즘이 뭐지.’

원작의 인물들도 아니다.

상대가 신성력을 갖고 있다고 모두 가능한 것도 아니다.

이 의문이 풀리는 날이 오기는 할지, 답답함만 중첩되었지만 당장 답을 얻을 수 없는 의문은 집에 돌아가서 곱씹어도 된다.

나는 늘 그랬듯 현실부터 집중하기로 했다.

“다른 것들과 이 이야기는 궤를 달리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백작으로부터 전해 들었을 때. 많이 놀랐답니다.”

긴 사설을 빠짐없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사이, 교황이 수정 구슬을 오른손으로 가볍게 쓸었다.

“그래서, 백작에게 부탁해 마련한 자리입니다. 미리 말할 수 없었던 것을 양해해 주신다면 좋겠어요. 백작. 그대는 잠시 다른 곳에서 머물러 주세요.”

다이브 백작은 당혹스럽게 고개를 움직이다가 입을 뻐끔거렸다. 결국, 나가고자 엉거주춤 떼어진 백작의 하체는 광속으로 소파에 재접착됐다.

내가 잡아당겼다.

“저는 질투심이 심합니다.”

“……그것이 지금 상황과 연관이 있습니까?”

“밀폐된 공간에서 타인과 둘만 남아 있지 않기로 연인과 약속했습니다.”

이름도 신기한 나무를 빼돌린 것도 모자라 쓱싹쓱싹 가져왔다. 상식적으로 이쪽을 의심하고 있을 거다.

‘혹시 모르니 여차하면 두고 튈 사람이 옆에 있어야 해!’

나는 눈을 번들거렸다.

이쯤은 전혀 어렵지 않다. 나는 눈알 조절이라는 한 분야의 유능한 경력자가 된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저는 이 약속을 어기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이 억지를 설득할 의지가 없던지 교황은 순순히 대꾸했다.

“존중하지요. 약속은 응당 지켜야 하는 것이니까요. 백작. 자리를 지켜 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

“예, 예에. 성하.”

“그런데, 저는 신성력이 없어서 아무것도 보지 못할 텐데요.”

“하하. 제가 공녀에게 드릴 청을 눈치채셨군요. 괜찮습니다. 신성력은 중요하지 않은 것을요.”

신관들이 볼 수 있거나 봐도 괜찮다면 교황이 ‘외부인’을 이용했을 리 없다.

‘아무래도 이거…….’

나는 멀뚱히 생각했다.

‘다이브 백작이 더 충성하도록 네가 특별하다고 속삭였을 뿐이지, 아무나 다 볼 수 있는 거 아니야?’

그때 교황의 손에서 빛이 번졌다.

그리고 곧이어, 덜컹―

실재할 리 없는 소리가 귓속을 첨예하게 꿰뚫은 느낌이었다.

흑마법도 정통으로 맞아 봤겠다 못 참을 수치는 결코 아니지만, 낯선 감각은 그만큼 낯선 고통을 남기고 스쳐 지나갔다.

슬프게도 이 세계에 떨어지고 낯선 감각을 하도 많이 접해 봐서 기묘함만 간직한 채 금세 털어낼 수 있었다.

“제게는 현재 제가 바라는 것이 보인답니다. 푸르른 숲이로군요.”

그것참 반쯤만 우회적인 표현이었다.

내가 못 알아들을까 봐 직설적인 화법을 구사했던 황후가 문득 생각났다.

‘황후는 왜 그렇게 죽어야 했을까.’

“공녀는, 무엇이 보이십니까?”

떨떠름히 눈동자만 슥 내렸다가 하마터면 당혹스럽게 눈을 깜빡일 뻔했다.

‘……어.’

* * *

한편, 비슷한 시각.

“나는 모릅니다!”

리닉스 공작이 끓는 듯 탁한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상황이 되어서도 유지하는 경어는 저 사내의 질기기 짝이 없는 희망 그 자체였다.

저 애처로운 고집을 아직은 꺾을 생각이 없던 칼릭스로서는 그것이 공작의 썩 대견한 일면이라고 할 수 있었다.

“리닉스 공. 이 이상의 거짓을 말한다면 내 선택은 많이 달라질 테지.”

이 젊은 권력자는 연장자에게 불유쾌한 어법을 사용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불유쾌한 사람에게마저 격식을 차리지는 않았다.

불행히도 그리 지난한 과정은 아니었다.

리닉스 공작은 저가 주군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으며, 그것도 모자라 엘루이든 대공가의 정보력을 얼추 알고 있던 덕택이다.

매사 제 안위만을 위하여 이번에도 같은 단계를 거쳐 배신을 선택한 그레고리 리닉스에게는 걸린 제약이 여전히 많았다.

그 때문에 짧은 단어를 빙빙 돌아야 했으나 다행스럽게도 칼릭스는 훌륭한 인내심을 갖고 있었다.

“그래.”

[교황을 보았습니다. 제국에 반기를 들려고 하더군요.]

[공녀는…… 의아하지 않아?]

그에게 고였던 녹색 눈을 떠올렸다.

“수지 타산이 맞는 건, 과연 그것뿐이로군.”

[성물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세계에서의 이야기가, 현실에서도 해당할 수 있다는 게 말이야.]

[의아하지 않습니다.]

[어째서?]

[현실과 다르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세상에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으니까요. 애초에 저는 칼릭스를 통해 미래를 보고 있습니다.]

그러며 샤를리즈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수확이 있으셨습니까?”

“어느 정도는.”

리반은 희미한 미소를 짓는 주군을 보고는 제이를 힐끔 돌아봤다.

‘어땠어?’

‘수확을 묻는 건가? 아니면 리닉스 공작의 상태?’

‘둘 다!’

‘어떨 것 같은데?’

제이가 어깨를 으쓱 올렸다.

‘전자는 알고 있을 테고, 후자는 죽진 않았어.’

두 수하의 눈짓을 뒤로한 칼릭스는 무표정했다.

이목구비의 생김새 때문에 곧바로 깨닫는 이들은 드물지만 표정이 지워지면 무척 서늘한 인상이 되는 남자가 의식적으로 눈을 감았다 떴다.

마구잡이로 흩어진 퍼즐 조각으로 얼기설기 완성되어 가고 있던 그림이 윤곽을 드러냈다.

그래, 이만한 일을 벌이는 데 맞는 수지 타산은 과연 전복밖에 없기는 하겠다.

* * *

이른 오전.

“폐하.”

“들어오라!”

책상을 초조하게 두드리며 문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던 안토니오 황제가 곧장 말했다.

“그래, 소식은?”

“엘루이든 영지 시찰로 위장한 토벌대가 막 출발했습니다.”

“그래, 그래.”

흡족한 듯 연신 대답한 황제가 다소 은밀하게 물었다.

“사샤, 그것은 대공저에 있나?”

“리엔타 공작저로 거처를 옮겼다고 합니다.”

“리엔타?”

“예, 폐하.”

리엔타 공작저는 물론 경비가 삼엄하기는 하나 대공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수준이다.

의문스럽게 눈을 좁힌 황제는 이윽고 픽 웃었다.

‘이유가 중요하진 않지.’

“잘 됐어.”

골치 아팠던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을 듯싶다.

적통 황자의 존재도, 거대한 두 세력의 합일도, 모두.

대공과 관련된 소식을 전할 때 황제의 기분이 좋았던 적은 요 몇 년 전무하다. 내심 긴장하고 있던 황성 시종은 눈을 끔뻑였다.

황제 폐하께서 이루 말할 수 없이 환한 미소를 짓고 계셨던 탓이었다.

* * *

칼릭스는 할 일을 하러 떠났다.

리반도 가는 길이니 나도 못 갈 것 없지만, 사샤는 아기다. 나는 사샤 옆을 지키기로 했다.

물론 저기서 코피가 터지면 수습하기 어렵다는 점도 선택에 어느 정도 기여했다.

……흑.

‘건강에 좋다면 풀이라도 씹어 먹겠다.’

동그란 테이블에 쫑쫑 앉은 세 아이를 멀찍이서 바라보며 눈물을 훔치곤 옹골차게 다짐하던 때였다.

“아가씨.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노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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