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자리를 옮겨야 할까요?”
“음.”
주변은 꽤 한적했다.
“이번에는 사샤 님의 차례예요.”
“내가 아니라?”
“로단테는 두 번 쉬어야 하는데 아직 한 번밖에 안 쉬었어. 그러니 사샤 님의 차례가 맞……. 사샤 님 세 번 쉬어야 해요!”
아이들이 조잘대는 소리와 간간이 새 소리만 들리는 평화로운 정경이다.
아주 은밀한 이야기를 나눌 법한 장소는 당연히 못 되지만, 그럭저럭 괜찮다고 할 수 있겠다.
‘더군다나…….’
세 번이나 게임에 끼지 못하고 쉬어야 하는데도 볼을 발갛게 물들인 채 노는 아이를 데려가기도 그렇고 말이다.
“그럴 필요는 없겠어.”
작게 웃은 노아가 목소리를 낮췄다.
“저는 그것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노아. 혹시 신전의 수정구슬에 관해 들어본 적 있어?]
황후도 수정구슬의 정체를 아예 몰랐다는 뜻이다.
[제게는 현재 제가 바라는 것이 보인답니다. 푸르른 숲이로군요.]
‘간 보려고 저런 말을 한 줄 알았는데, 진짜인지도 모르겠군.’
수정구슬을 쳐다보기 전. 황후가 왜 그렇게 죽어야 했는지를 생각했고, 그 답이 보였다.
어떤 세계에서는 주인공과 끝까지 대립한 카타리나는, 단순히 사샤의 신성력을 측정해 보기 위한 그럴듯한 단계로서 죽었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떠오른 것은 엉망진창이었던 기도실을 원상 복구한 교황의 힘이었다.
저 정도의 능력을 갖고 있으니 일국의 황후마저도 소모적으로 죽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고, 저 정도의 능력을 갖고 있는데도 마치 방해받으면 절대로 안 된다는 듯 몇 년이나 이중으로 제 신변을 철저히 숨긴 것이 의아했다.
‘교황이니까 저 정도는 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
그랬다. 저 순간 느낀 것은 아무렇지 않게 넘긴 과거에 대한 위화감이었다.
한때 칼릭스가 흘리듯 한 말을 나는 되짚어 보았다.
‘대가. 부수적…….’
“그리고, 관련된 고문서를 보유한 인물을 찾았습니다만…….”
얕은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노아는 다소 난처한 얼굴이었다.
“당사자만 만나겠다고 하더군요.”
“예전에 접해 본 상대야?”
“아닙니다.”
“오.”
나는 감탄했다.
‘노아가 정보를 채굴만 한다는 걸 알아채다니.’
“다소 번거롭기는 할 테지만, 입을 열게 할 수 있습니다.”
저 ‘번거롭다’는 가장 최적인 상대를 비슷한 일에 두 번 쓰진 못할 거라는 뜻일 터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이제 와 비폭력을 외치기에는 나도 양심이 있다.
‘앞으로 몇 번 더 보게 될 것 같아.’
슬프지만 그런 예감이 든다.
“이튿날, 오후 두 시 경으로 약속을 잡아 두었습니다.”
나는 씩 웃었다.
노아는 과연 능숙한 정보원이 맞았다.
* * *
하루는 금세 흘렀다.
갑자기 약속이 생긴 통에 정면으로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한 번 내쉬었는데, 그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처음에는 이제 기억력마저도 말썽인가 싶어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는데.’
그냥 평소처럼 숙면한 거였다.
왜 갑자기 숙면을 생각하고 있냐면, 지금 숙면을 취하지 못한 것 같은 몰골의 사람을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그러니까…….”
“예. 사샤를 부탁드립니다. 옆을 꼭 졸졸 따라다니셔야 해요.”
“응, 그러마…….”
고개를 푹 숙인 채 기운 없이 말하는 공작은 암만 봐도 믿음직하지 못해 가늘게 뜨여진 내 눈은 리엔타 공작의 외부적 평판을 떠올린 후에야 본래 크기를 찾을 수 있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멜리사 부인에게도 진한 눈인사를 남겼다.
‘시녀장만 믿을게!’
‘걱정 마세요. 아가씨.’
그녀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샤를 님. 잘 다녀오세요.”
“응. 잘 있어야 해.”
“네. 공작 각하의 곁을 졸졸 따라다닐게요.”
“괜찮아. 아버지가 따라다니실 거야.”
“네. 각하께서 졸……, 졸…….”
고개를 끄덕하는 아이의 머리를 마지막으로 쓰다듬고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 마부에게 사전에 부탁한 경로대로 별관을 지나칠 때는 마차 창문을 열어 상체를 반쯤 빼고 손을 흔들었다.
원작의 로제타보다도 더한 츤데레인 누구를 알고 있는 탓이다.
반쯤 닫힌 커튼 너머로 인영이 흔들리는 것을 본 것도 같았다.
그렇게 도착한 곳에서, 만난 남자는 학자보다는 어딘지 보좌관스러운 느낌을 풍겼다.
정작 내가 주로 만나는 보좌관은 리반 같은 사람인데 말이다.
외알 안경을 낀 남자가 그야말로 그린 듯한 의례적인 미소를 지었다.
“모시겠습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어라.’
눈을 비볐다.
몹시도 익숙한 장소였다.
‘어라…….’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그리 놀랄 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왜냐하면…….
“이렇게도 만나게 되는군, 공녀.”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그간 공녀의 사회적 대응 방식이 훌륭해진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안부를 물을 정도로 친밀해진 것인지 조금 궁금하긴 하네만, 잘 지냈다고 해 두지.”
일라이저 바이에르가 피식 웃었다.
……제국의 북부를 수호한다는 구실로 단 한 번의 영지전조차 말려들어 본 적이 없는 가문.
흑마법사에 관한 정보까지 있는 그 가문의 도서관에 신전에 관한 건 없을 건 없었다.
“누가 신전에 관해 은밀히 조사하는지 그 얼굴을 보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말일세.”
그러며 바이에르 공작은 눈썹을 꺾어 올렸다.
“공녀도 알다시피 나는 저주에 몹시도 커다란 유감이 있고, 혹여 해주 방법을 미리 찾아 두어 치밀하게 준비하는 건 아닐까 했지. 그런데, 공녀는 그건 아닌 듯하군.”
그래,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
그럼에도 매우 놀라 말까지 잃게 되는, 어딘가에 분명 살고 있을 그 사람이 바로 나였다.
“그대의 정보원이 부족한 게 아니니 너무 질책은 말게.”
“…….”
“제국의 공작가가 개인적으로 움직이는 정보원보다 부족하다고 하면 그건 자격 실격이지 않겠어.”
“…….”
* * *
그로부터 시간이 꽤 흘러 하늘이 어느덧 어두워진 때.
“공녀님. 왜 혼자 왔어?”
“도착지가 바이에르인 줄 몰랐거든.”
“왜 몰라? 마부한테 명령해서 온 거 아니야? 아니면 마부가 공녀님한테 말하지 않았어? 그 전에,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덥석덥석 마차에 타면 어떡해. 위기감 없이.”
루카스가 딱하단 표정을 짓다가 돌연 엄한 얼굴을 했다.
양 허리에 손까지 척 얹더니 말했다.
“안 되겠어.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 줄게.”
대답 없이 슬쩍 바라보자 루카스가 눈을 더 동그랗게 떴다.
“뭐, 뭘 봐!”
“그래. 가자. 그 전에 바이에르 공작 각하께 허락부터 구하고 와.”
“……이미 했어.”
그렇게 돌아오는 길에는 분홍색 얼굴로 아주아주 작게 대답한 꼬마를 한 명 데리고 오게 됐다.
“샤―를―!”
“고생하셨어요. 아버지.”
리엔타 공작은 울멍울멍하게 입술을 꼭 맞물고는 나를 따라왔다.
물론 끝까지 함께한 것은 아니다. 계단이 나왔을 때, 공작은 계단을 올라야 했기 때문이다.
‘오늘도 식사를 못 하시나 보군.’
어떻게 어떻게 살려는 드릴 수는 있을 것 같은데, 또 생으로 굶게 만들다니 불효를 저지르는 기분이다.
그 뒷모습을 착잡하게 보고 있자니 집사가 말했다.
“먼저 식사하셨습니다.”
역시 생존 본능은 얕볼 게 못 됐다.
그리고, 그 밤.
“……그리하여, 모두…….”
“행복하게 살았대? 응?”
“분명…… 그럴 거야…….”
사샤는 제 성격대로 잠이 가득한 목소리로도 성실하게 대꾸했다.
“그건 모를 일이지. 작가가 다음 권을 사게 만들려고 또 고난을 주었을 수도 있어.”
“헙.”
사샤가 숨을 몰아쉬었다. 느릿하게 규칙적으로 움직이던 아이의 가슴 부근 이불이 가쁘게 오르락내리락했다.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다행이에요!”
“다행이네. 자 이번엔 이걸……, 어디가?”
“불 켜러.”
“자려는데 불을 왜 켜!”
조도 낮은 빛만으로 벌써 아홉 권을 독파한 내 눈을 위한 위대한 한 걸음이 가로막혔다.
“읽어 줘.”
동화책이 아니라 어린이의 한계를 넘어서야 겨우 잠이 든 아이들을 보며 손등으로 이마를 훔쳤다.
‘흑.’
혹시나 다시 깰까 봐 신속하게 조명을 끄고, 혹사당한 목을 축이고자 슬쩍 일어났을 때였다.
달그락.
그건 창문의 이음새가 돌려지는 소리였다.
고난은 한 번에 온다더니 과연 그랬다.
‘눈도, 목도, 정신도, 내일의 기력도…….’
슬쩍 눈물을 훔치며 나는 개중 두꺼운 동화책을 집어 들었다.
* * *
‘망치였나?’
은밀히 잠입하던 중, 뒤통수를 얻어맞아 정신을 잃은 암살자는 얼굴을 구겼다.
주변을 둘러보자 그의 남은 두 동료는 아직 의식을 잃은 채였다.
“이제 일어났네.”
지겨운 것 같기도 했고, 지루한 것 같기도 했다. 확실한 건 공녀는 전혀 위기감이 없어 보였다.
“우리 아이들도 너희보다 잠꾸러기는 아닌데.”
상황은 비록 이렇게 시작됐지만, 임무를 완수할 자신은 있었다.
사내는 예상과는 다른 상황에서 준비한 말을 시작했다.
“암살자가 올 줄 알았다는 뜻인가? 선황자를 두고 도박을 했…….”
“무슨 소리인지.”
공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상체를 조금 굽혔다.
“승률이 높지 않을 때나 도박이라 할 수 있겠지. 그러니 내가 한 건 도박이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