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몇 번 더 맞장구를 쳐 준 결과.
오늘 내가 바이에르 공작저를 찾아간 것을 의식해 벌인 일은 아닌 듯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본래부터 계획한 일을 실행했을 뿐인 것이다.
‘흐음.’
안토니오 황제가 언제고 이런 선택을 갈길 것 같기는 했다.
제 친형도 독살한 마당에 안 이러면 그게 더 이상하다.
그럼에도 가장 안전한 장소를 떠난 이유는 달리 없다.
‘더는 가장 안전하지 않으니까.’
나는 그때처럼 눈을 부릅떴다. 칼릭스가 정예 기사들과 출정하기 전날 밤 말이다.
[모두 데리고 가.]
험난한 과정을 거치느라 내 말은 구석구석 마모되어 버렸다.
[네 기사들, 다 데리고 가라고 했어.]
[…….]
[머리가 있다면 선택은 결국 암살자들 뿐일 테지. 조금만 더 영리하다면 리엔타에도 암살자를 보내지도 않겠지만, 그 정도는 못 되는 것 같으니까.]
[…….]
[리엔타를 얕본 순간의 판단 실수를 곱절로 돌려받게 만들려고 하는데.]
[그래.]
칼릭스가 고개를 아주 살짝 기울여 웃었다.
[응. 방해하지 않을게.]
‘……잘 있겠지.’
척박한 환경에서 외양이 손상될까 봐 걱정하는 건 결코 아니다.
떠나기 전, 나를 보며 칼릭스는 조금 난처한 것 같기도 하고 설레기도 한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음.]
‘에효.’
[이런 걱정은 처음 들어 봐.]
나도 모르게 ‘앞으로 자주 듣게 해 줄게!’라는 막돼먹은 말을 뱉을 뻔했다고만 해 두겠다.
카타리나가 그렇게 비명횡사하기는 했어도 본래 이 시기에 퇴장했다 보니 별생각은 없었는데 그렇게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일까.
이 세계의 주인공이라서 비호를 받을 것이라는 불안한 안도를 더는 할 수 없게 됐다.
“……빌어먹을.”
그때, 눈앞의 사내가 욕설을 짓씹었다.
혀 아래에 끼워 둔 독을 회수당했다는 사실을 지금 알아차렸나 보다.
“함정을 판 것도 모자라 생포까지 하려 들다니. 어떡할 속셈이지?”
‘어어?’
‘생포까지 하려 들다니. 어떡할 속셈이지?’ 사이의 연결이 몹시도 부실해 보이는 건, 내 착각은 아닐 것이다.
‘흐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암살자는 흠칫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를 드러내며 나를 거칠게 쏘아보았지만, 그쪽에는 관심 없다.
조금 더 이동해 아직도 꿈나라를 여행하고 있는 암살자2를 발로 툭툭 쳤다.
눈꺼풀을 움찔하자마자 튕기듯 일어난 암살자2가 외쳤다.
“선황자를 가지고 도박…….”
“그 말. 방금 네 동료가 했는데, 다른 버전은 없나?”
“……동요조차 없다니 역시 선황자를 이용해 일부러 유도한 것이로군.”
집에 침범한 것도 모자라 죽이려고 온 인간에게 저런 눈빛이나 받고 있다.
‘처음에는 내게 죄책감을 씌우려는 말인 줄 알았는데.’
황제의 목적은 단순히 황위 경쟁자를 제거하는 것뿐 아니라 두 거대 가문의 결속을 막으려는 것도 있다.
‘그러니까, 이거…….’
어째 마도구가 있을 것 같다.
그 종류도 어째 알 것만 같다.
‘최소 녹음, 최대 공간 자르기.’
이미 알고 있으니 당연히 관심도 없던 물음을 뱉었다.
“누가 보냈지?”
“누구인지 알면.”
영양가 없는 말이나 할 거면서 대답을 가로챈 암살자1은 다시 신속하게 꿈나라로 이동시켜 주었다.
“저런 무식한 방식을 사용…….”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암살자2에게 시선을 슬쩍 돌렸다.
“다시 묻지. 누가 보냈어.”
“우스운 질문…….”
“대답할 생각이 없다면, 내 자비는 여기까지야.”
“그러니까, 언제 자비를……!”
똑똑.
“때마침 잘 왔어.”
가장 앞에 있는 에반스 경을 보며 나는 눈짓했다.
“샅샅이 수색해 봐.”
“예. 아가씨.”
* * *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약속한 상대가 저라고, 파악하셨습니까?]
[간결하게 답하자면, 아니. 바이에르의 정보조직들을 위해 조금 더 길게 부연 설명하자면 어차피 만나게 될 테니 알아 둘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했지. 알아두라고 명령할 걸 그랬다는 생각은 조금 드는군. 아, 물론 차기 대공비와 은밀히 접선했다는 후환을 걱정해서는 아니야. 그저 놀랐을 뿐이라네. 공녀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으니.]
그때처럼 그녀는 실소했다.
그때는 습관적으로 시가를 찾아 테이블 귀퉁이로 손을 뻗어 헛손질한 것이고, 지금은 우습지도 않은 내용이 적힌 서신 때문이라는 것만 달랐다.
퍽 우아하지만 그 성격대로 어딘지 예민한 느낌이 있는 필체는 샤를리즈의 것이었다.
“리엔타에 암살자가 들었다고 하더군.”
그에 주종이 나란히 표정 변화가 거의 없이 무뚝뚝하다는 평을 받는 보좌관이 얼굴을 구겼다.
“공자님께서는 무사하시다고 합니까?”
“읽어 보게.”
바쁘게 움직인 눈동자는 바이에르 공자는 암살자가 들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는 문장에 한참 머물렀다.
그 뒤의 짤막한 사과에서도 몇 초 머무른 눈은 막힘 없이 끝까지 내려갔다.
모두 확인한 서신을 다시 되돌리며 보좌관은 무표정히 물었다.
“공녀도 주모자를 짐작하고 있을까요?”
“그대는 아직 샤를리즈 리엔타가 미덥지 않은 모양이지.”
보좌관은 대답 없이 침묵했고, 일라이저는 피식 웃었다.
“나는 공녀와 아주 좋은 우호 관계로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
주군의 뜻이라니 토는 달지 않겠다는 듯한 얼굴 그 자체로 보좌관이 대화를 다시 본 궤도로 안착시켰다.
“황제가 우리를 주목하고 있진 않았던 모양이지요.”
약속 장소를 따로 잡은 이유는 당연히 하나뿐이다. 그곳에서 진짜 목적지까지는 다른 마차로 이동시켜야 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겠지. 그렇다면 감히 루카스마저 위협하진 않았을 테니.”
바이에르 공작이 설핏 웃었다.
“엘루이든 대공을 적으로 돌리기로 결심했다면, 다른 가문들이 돌아서지 않을까 봐 염려하기도 할 테고.”
보좌관은 대답하지 않았다.
비록 고의가 아니라고는 하나, 그 자체로 화를 피할 수 없는 실책이 있기 마련이고 황제는 그것을 저질렀다.
“물론 대공을 적으로 만든 시점에서 저 정도 선택을 하기로 마음먹었을지도 그저 희망 사항에 불과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지.”
일라이저 바이에르는 차디찬 독설을 짓씹고는 문득 시선을 내렸다.
샤를리즈가 부탁한 문건 일부가 거기 있었다.
……그리하여 용의 보물이라는 별칭을 얻게 된 물건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태초의 수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