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176) (176/232)

176화

황량한 벌판이었다.

나무뿌리 몇 개와 군데군데 검은색으로 물든 평야는 전쟁 직후의 아비규환과 닮아 있었다.

여기까지 안내한 마을 주민을 제이가 설명해 보라는 듯 돌아보았다.

넉넉한 수고비는 물론 한눈에 봐도 고귀한 신분들을 안내했다며 주점에서 뻐길 생각이 만만했던 마을 주민은 그 시선에 흠칫하더니 당혹스럽게 외쳤다.

“어, 어어……. 분명 숲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였지?”

“그, 그러니까, 이틀…….”

줄곧 묵묵히 정면을 응시하고만 있던 남자가 그를 돌아본 것은 그때였다. 길게 바라본 것도 아니었으나, 주민은 깨갱하며 진실을 읊었다.

“……열흘쯤 됐습죠.”

“수고하셨습니다.”

부드러운 목소리는 척 봐도 고위 신관일 것이 틀림없는 남자로부터 흘러나왔다.

어둑한 햇살 아래서도 찬란하게 빛나는 금발처럼 은혜로운 말이 이어졌다.

“이제 가 보세요.”

슬쩍 눈치를 살피는 주민에게 기사가 두둑한 주머니를 안겼다. 빼앗아 갈세라 황급히 건네받은 주민은 허리를 꾸벅꾸벅 숙이고는 재빨리 사라졌다.

“이미 휩쓸고 지나갔나 보군요.”

라우드는 한숨처럼 말했다.

우거진 숲은 흑마법사가 은신해 흉계를 꾸미기 가장 적합한 장소였다.

그러나 감시하는 시선 밖으로 완벽하게 도망칠 수는 없다.

사악한 힘 때문에 짐승들이 본능적으로 회피하고 끝내 식물들마저 버티지 못해 모두 시든 후에는 토양마저도 망가지고 마는 탓이다.

땅은 늘 중요하기 마련. 흑마법사들이 공적으로 규정된 데에는 간악한 사술도 한몫을 하지만, 토양 훼손을 반복하는 습성 탓도 만만치 않았다.

“이번이 벌써 다섯 번째이던가요.”

“예상보다 진척이 더디군요.”

라우드는 빙그레 웃었다.

그랬다. 벌써 다섯 번째 허탕을 치고 있었다.

엘루이든 대공의 정보력이 알려진 것보다 대단하리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럼 이것은 시간을 끌기 위함인가.’

만약 그렇다면 대공의 필패다.

시간에 구애되기로는 그 역시 마찬가지지만, 대공은 상황이 다르다.

황제의 거점인 수도에 조카를 남겨 두고 왔으니 말이다.

“귀중한 시간을 내어 주신 성하께 폐가 되는 건 아닐는지.”

“제국민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흑마법사들을 소탕하는 일을 후순위로 치부할 수는 없지요.”

“과연 교황 성하시군요.”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다면 검보다는 펜이 더 잘 어울린다고 무심코 생각하고 말 얼굴의 남자였다.

그러나 정작 그가 검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본다면 펜은 생각도 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칼릭스가 선명히 미소 지었다.

“제국의 평화를 위해 오랜 시간 신께 기도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그 밤.

교황의 천막에 성기사가 들어섰다.

기껏해야 이틀도 머무르지 않지만 있을 것 모두 있는 공간이었다.

제게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 성물을 손 안에서 굴리는 라우드에게 성기사가 깍듯하게 인사했다.

“리엔타 공작저에 암살자 여럿이 침투했고, 실패했습니다.”

“살았다던가요?”

“그것까지는 아직 파악되지 않았…….”

“그런데도 암살 시도를 파악했다는 건 리엔타가 공개적으로 밝힌 거로군.”

“시도가 있었던 당일, 벨리악 리엔타가 직접 황제를 찾아가 조사 권한을 위임해 달라고 청했다고 합니다.”

“잠시만.”

성기사가 즉각 입을 닫았다.

턱을 매만지며 라우드는 생각에 잠겼다.

필시 샤를리즈 리엔타 역시 배후로 황제를 염두에 두고 있을 터.

‘이 일을 황위 찬탈의 초석으로 삼으려는 속셈인가.’

묘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피어올랐다.

제국민들의 인정 따위 필요 없으나 알아서 굴러들어온다는데 굳이 사양할 건 없다.

명분이 알아서 손에 쥐어질 듯했다.

“리엔타 공작이 가진 것은 면책권이지 소원권이 아니니 황제가 거절했을 테고, 그다음은요?”

“그리고 바이에르 공작이 황제에게 알현 신청서를 보냈습니다. 아직 알현이 허가되지는 않았습니다만, 거절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바이에르가?”

라우드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예. 암살자가 잠입한 그 날, 바이에르 공자가 리엔타 공작저에 머무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대의 사견은?”

“리엔타 공작과 같은 청을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습관적으로 성물을 매만지던 손이 뚝 멈췄다.

* * *

애를 하룻밤 재우라고 보냈더니 거기서 목숨의 위협을 받았다.

이 일로 바이에르 공작이 내 부탁을 거절하더라도 그건 놀랍지 않은 일이었다. 그 분노를 감당하는 건 당연히 해야 할 몫이다.

저기서 당연하지 않은 건 내 의연한 마음가짐뿐이다.

아마 리엔타 공작저에 바이에르 공자도 함께 있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순간 황제의 심정이 꼭 이렇지 않을까 싶다.

북부의 수호자이자 황제의 검께서 불같이 화를 내실 모습을 생각하다 보면 잔뜩 졸아붙어 마차 벽과 한 몸이 되었다. 그 직후 도착한 응접실에서, 바이에르 공작은 짤막한 한마디를 했다.

“왔군.”

찻잔을 내려놓은 공작이 보좌관에게 눈짓하자, 그가 문서를 테이블에 펼쳤다.

“모두 원본일세. 외부 유출은 어렵다는 점을 양해해 주게나.”

바이에르 공작이 입 끝을 올렸다.

엄청나게 멋진 미소였다…….

공작의 뒤를 둘러싼 후광에 눈부셔하며 나는 종이를 한 장 집어 들었다.

“중간에 마차를 갈아타기까지 하며 만났으니 퍽 은밀한 회동으로 비쳐질 테지. 접선 자체는 아직 파악하진 못했을 테지만, 만남 이후 바이에르 영지 성에서 짐마차가 수도로 출발했으니 어떻게 해석되고 이용될지, 미리 대비해 두게.”

“감사합니다. 공작 각하.”

“그럴 것 없어. 나는 은혜를 갚고 있을 뿐이니.”

“감사한 일에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했을 뿐입니다.”

“그래. 그렇게 하지.”

“바이에르 공자는 괜찮으십니까?”

“흥미로워하던데.”

바이에르 공작이 피식 웃었다.

“그 나이대 남자애들은 다 그런가? 아니면, 체감을 못 해서 철없이 그런 건지.”

속으로 ‘암살자를 두려워하지 않다니 역시 정보상의 자질을 갖고 있어…….’하고 감탄하던 나는 슬며시 대답을 회피했다.

고개를 처박은 건 열정적으로 문서를 보는 척하려고 그랬을 뿐인데, 진짜로 그렇게 됐다.

“전설 내지 설화 정도 되는 이야기다 보니 직접적인 도움은 되지 못할 테지만.”

바이에르 공작의 표정이 변했다. 내가 마차를 타고 오는 동안 상상한 바로 그 얼굴이었다.

“다른 방면으로는 직접적인 도움이 되어 줄 수 있다네.”

바이에르는 비록 세력이 리엔타보다는 못하나, 상징적인 의미가 강한 가문이고, 그리하여 황실은 바이에르를 절대로 천시할 수 없다.

‘황제가 윤허했구나.’

“물론 공녀를 돕기 위해서만은 아니야. 이 만남을 다른 목적으로 덧씌우기 위함만도 아니고.”

“…….”

“그럼에도 나는 저 단어를 선택했네.”

“이해했습니다.”

“긴말하지 않아도 돼서 편하군. 징조가 좋아.”

바이에르 공작이 입술을 말아 올렸다.

“엘루이든 대공이 의아해한다면, 이렇게 전해 주게. 오래도록 선황자 전하께 죄송해야 하는 그 일의 여파라고 말일세. 내 선물을 받아 달라고도 말해 준다면 더 좋고. 거절당한 선물을 기약 없이 관리하느라 집사가 울상이야.”

나로서는 어쩌면 처음 보는 것도 같은 그녀의 미소였다.

* * *

리엔타 공작저에 암살자가 잠입하고, 그 조사를 바이에르 공작이 위임받았다는 소식이 퍼졌다.

이례적인 일이었으나, 파장은 길지 않았다.

이 기회에 저와 대적되는 가문을 들쑤셔 위축시키려고 들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절대로 생기지 않을 곳.

공명정대한 바이에르였으니까.

고신 끝에 암살자들이 실토한 가문은 바로 타티스 후작가였다.

예상치 못하게 튀어나온 가문이었으나 리엔타와 접점이 있기는 했다.

“설마 후작 부인의 원한을…….”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던 귀족 영식이 흠칫했다. 갑자기 누군가 어깨동무를 한 탓이다.

“누, 누……. 아, 에리히 너였냐?”

“말조심하지? 누가 들으면 공녀가 후작 부인을……, 읍읍!”

“너야말로 말조심해라!”

후다닥 주변을 살핀 영식이 낮게 속삭였다.

“정말 타티스일까?”

“조사해 보면 알지 않겠어? 바이에르잖냐.”

에리히는 열심히 귀담아들었다.

샤를리즈가 조사하라고 말하지 않았는데도 열심히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에리히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이미 길들여진 에리히가 그렇게 열심히 주워듣는 사이.

속칭 사랑의 묘약이 시중에 풀렸다.

사랑한다는 연인의 속삭임은 과연 진심일까요? 한 번, 확인해 보세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