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반항이 끝날 기미가 없네요.”
라우드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한편에 얌전히 자리하고 있는 저치의 절반만 닮아도 좋았을 텐데. 그를 맹렬히 노려보고 있다가도 눈이 마주칠세라 서둘러 시선을 회피하는 리닉스 공작 말이다.
가라앉은 눈으로 흑마법사 방향, 정확히는 그 근처를 둘러싼 성기사들을 주시하던 제이가 나섰다.
“흑마법사는 등가교환으로 흑마법을 시전할 수 있습니다. 반항은 거세지만 추가적인 제재는 하지 않아도 괜찮으리라 생각됩니다.”
“이미 대가를 바쳤을 수도 있지 않나.”
반박한 사람은 퍽 젊은 나이의 대신관이었다.
“그랬다면 진작 도망쳤겠지요. 기다릴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흑마법사라고 제 목숨이 하잘것없진 않을 텐데요.”
제이는 겉으로는 여전히 정연한 표정을 유지한 채, 출정 당일을 생각하며 비틀린 웃음을 삼켰다.
[성기사의 숫자가 예상보다 많습니다. 열여섯이나 되다니요.]
토벌의 탈을 쓴 급습이었다.
속도전을 위해 소규모로 조직되어 엘루이든 대공가의 기사는 채 열이 되지 않았다.
사제의 손실을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이해하기에는 평신관 둘뿐이었다.
[목적이 보입니다, 보여. 너무 투명하고 선명해서 눈이 부십니다, 아주! 저 신전의 개들은 사냥이 끝나면 천국으로 갈 줄 아나 본데, 제가 지옥으로 끌고 갈 겁니다.]
[죽음을 예비하지 마.]
귀가 따가운 수다쟁이의 말에 칼릭스는 픽 웃었다.
[잠시만 기다려 봐.]
기묘한 명령의 이유는 잠시 뒤 알 수 있었다.
[너무 늦진 않았겠지요?]
대신관도 모자라 교황이 친히 행차한 것이다.
‘어째서 교황이 굳이…….’
짧은 과거 반추는 이번에도 이미 몇 번이나 곱씹고 또 곱씹은 의문으로 끝났다.
“결국 추측에 불과하군. 교황 성하가 계시온데, 위험을 좌시하는 일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
대신관이 엄중한 얼굴로 말했다.
흑마법사를 잡기 전, 어느 미친놈이 설산에 은닉해 있겠냐며 울상으로 투덜거리던 에릭은 그런 속된 표현조차 모를 것 같은 순박한 낯빛으로 예의를 갖춰 대꾸했다.
“그럼 기절시킨 뒤 앞에 태우면 되겠……. 아뿔싸! 보통은 포탈에 도착하기 전까지 깨어나지 않을 테지만 혹시 모를 일입니다. 놈이 정신을 차리는 것을 곧장 알아채는 막중한 임무에 걸맞은 사람은 역시 작은 꿈틀거림도 좌시하지 않는 분이겠지요. 그럼 역시…….”
빤히 보는 시선에 대신관이 울컥했다.
“지금 나를 우롱하는가?”
“예? 제가 왜 그러겠습니까? 저는 그저 교황 성하의 안전에 가장 주의를 기울이시는 대신관님이 적합하다고 생각했을 뿐인데요.”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에릭이 절대 아니라는 듯 도리질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함께 이동했으나 엘루이든과 신전은 데면데면했다. 그 이상을 넘어서 여전히 섞이지 못하고 따로 도는 관계였다.
서로를 향한 경계를 애써 감추고 있던 게 언제냐는 듯 팽팽한 분위기로 돌입하기 직전, 라우드가 입을 뗐다.
“바로스 대신관. 나를 걱정하는 그대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우리는 논쟁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닙니다.”
말은 번지르르했다.
대신관이 즉각 사죄했다.
잠시 고민하듯 눈을 내리깐 교황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흑마법사의 이동과 관련된 문제는 의견차가 좁혀지지 않는군요. 그럼 이곳에서 신문을 진행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여기서 말입니까?”
그 물음에는 대신관도 순간 떨떠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평신관 하나는 세상이 무너진 듯한 얼굴을 얼른 아래로 숙여 가렸다.
“예, 여기서요. 대공, 그대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녹지 않는 만년설이 있는 설산은 해가 뜬 낮에도 폭력적인 추위를 자랑했다.
마차가 오를 수 없는 터라 짐은 모두 아래에 두고 왔다. 열악한 담요로 하루를 보낸다면 이튿날 시체 여러 구를 치우게 될 것이었다.
“저보다는 대신관에게 질문하시는 것이 합당하지 않을까요.”
칼릭스가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제 기사는 의견을 제시했고, 그는 아직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할 수 없겠다고 한다면 이곳에서 하루를 보내는 수밖에요.”
“대공 전하.”
대신관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개인적으로는 중간에 저자가 깨어나도 대처할 수 있는 성기사들이 적합하다고 보지만 말이에요.”
묘연한 미소였다.
이 혹독한 추위에도 어떤 내색도 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떠올리자 어딘지 스산하기까지 했다.
치욕으로 흥분한 것도 잊고 대신관은 주춤했다.
결국, 기절한 흑마법사는 한 성기사의 말에 실려 하산하기로 결정됐다.
목숨에 지장은 없으나 확실하게 기절시키는 간단한 일을 성기사들은 아무도 못 했다.
‘하아. 네가 가라.’
‘방금 내가 긁어댄 거 못 봤어? 중간에 깨어나면 저 대신관이 미친 듯이 지랄해댈걸.’
‘하.’
별수 없이 제이가 한 발짝 걸음을 떼었다.
“그럼 제…….”
“제가 하겠습니다.”
“주군.”
얼굴을 구긴 채 무심코 칼릭스를 붙잡은 제이는 마른침을 삼킨 채 물러섰다.
“교황 성하의 일정 거리 내에서는 성기사를 제외하고 패착한 검을…….”
대신관이 입을 나불거렸다.
그 빌어먹도록 고귀하신 교황이 자리를 옮기면 해결되는 일이었다.
“그럼 교…….”
기어이 파커가 말문을 연 때.
툭.
무거운 검이 쌓인 눈 위로 떨어지며 발생한 둔중하고 작은 소리가 울렸다.
“주군.”
제이가 입술을 움직이지 않은 채 작게 속삭였다.
“위험합니다. 안 됩니다.”
“제이. 저 대신관님은 꼭 살리도록 해.”
칼릭스가 엷게 웃었다.
“그러지 않으면 이러는 보람이 없잖아.”
그는 제 목숨을 두고 도박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교황이 무언가를 알고 있다면 결코 이곳을 선택하지 않았을 테니 우연일 것이다. 그리고 우연이라기에는 그래, 지나치게 낭만적이었다.
행운이 따를 수밖에 없는 장소였으니까.
* * *
한편, 황제궁.
안토니오 황제는 얼빠진 얼굴로 물었다.
“방금 무어라고 했나?”
“루엔 후작이었습니다.”
“말도 안 되네.”
안토니오가 얼굴을 구겼다.
“루엔 후작이 리엔타에 무슨 억하심정이 있다고.”
“루엔 후작의 여식이 어릴 적 리엔타 공녀로부터 무안을 당한 적이 있다더군요.”
“리엔타 공녀에게 무안 한 번 당해 본 적 없는 가문이 있나? 살해 동기로는 너무도 보잘것없잖은가.”
“그 일로 후작 영애의 성격이 소극적으로 바뀌어 데뷔탕트조차 제때 치르지 못했다더군요. 하나뿐인 여식이 혼기를 놓치게 생겼으니 감정이 앞섰을 수도 있겠습니다.”
어처구니가 없어 재조사를 명할 뻔한 황제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루엔이 아쉽기는 하지만…….’
루엔은 재력은 조금 마뜩잖으나 혈통이 좋았다. 골수 황제파 가문이니 외척이 되어도 득세하려고 들지는 않을 테니 그 여식을 황비로 눈여겨봤다.
“루엔 후작이 그런 악수를 둘 줄은 내 몰랐군.”
“처형할까요?”
“두게. 미수이니 처형까진 지나쳐. 가택 연금 2년 정도면 충분히 반성하겠지.”
안토니오 황제가 입술을 비틀었다.
‘괘씸하기는.’
리엔타 공작은 이번 암살 미수 건을 공공연하게 키웠다. 처벌 수위를 남다르게 하라는 암묵적인 요구였다.
귀추가 주목된 사안이 정작 솜방망이 수준의 처벌로 끝났으니 리엔타는 한동안 저택 수비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진정 시도까지 하는 가문은 당연히 극소수일 테나, 공녀에게 앙심을 품은 가문이 오죽 많은가?
모두 다 적으로 보일 테지.
“수고 많았네. 공작.”
비웃음 지은 황제가 축객을 내렸다.
그리고 처벌 수위가 발표된 이튿날.
리엔타에 또 괴한이 침입하는 일이 발생했다.
* * *
지나간 과거는 무엇으로든 삶의 양분이 된다더니 내 악명도 헛되지 않았다.
‘솜방망이 처벌에도 진짜 잠입하라고 의뢰하는 간 큰 인간이 몇이나 되겠느냐만.’
처벌 수위가 낮으면 뭐 할까. 리엔타는 돈줄을 틀어막아 가문 하나를 찍어 누를 수도 있다.
그러나 ‘암살 시도까지는 무섭지만 공녀가 밤잠 설치도록 겁주는 정도는 해 보고 싶은 귀족들, 여기부터 저기까지 줄 서!’라고 했을 때 황성을 빙 두를 만큼 무지막지하게 많다는 게 특이점이다.
저 무지막지한 인원 중 간 큰 몇몇이 나와도 영 이상하게 보이진 않을 터.
세상에는 의외로 간 큰 사람이 많기도 하다.
‘이임 받은 권한을 바이에르 공작이 여전히 틀어쥐고 있으니 요긴하게 쓸 수 있겠군.’
[리엔타 공녀의 암살 시도와 관련된 권한을 황제 폐하께서 제게 이임하지 않으셨냐고 하였지.]
[추신. 그런데 너무 많이 하지는 않는 게 좋겠군. 리엔타 공작의 수명이 줄겠어.]
절대 아니라며 반항하더니 뒤로 무엇을 받기라도 했는지 얌전히 갇혀 있는 루엔 후작이 무심코 생각났다.
황제와 접촉하고 있던 이들 중 때마침 쟤네가 있어 고르기는 쉬웠다.
그래, 세상에는 의외로 간 큰 사람이 많다.
일단 루엔 후작 영애가 있다. 그녀는 샤를리즈의 면전에 대고 패드립을 시전하는 면모를 보였다.
‘루엔 후작은 샤를리즈가 부친에게 그 일을 말하지 못하도록 윽박질렀지.’
죄 없는 후작 영애를 못살게 굴었다고 욕을 진탕 먹은 어린 샤를리즈의 한이 조금은 풀렸을지 모르겠다.
‘황제의 수족이나 예비 수족을 한 셋 정도 더 잘라볼까.’
암살 시도의 진짜 배후가 황제였음이 밝혀진다면 암살 목표가 내가 아니라 사샤였다고, 모두 생각할 것이다.
제 조카를 몇 번이나 죽이려고 시도한 흉악한 면모를 부각해 황위 찬탈의 명분을 만들기 위함은 아니다. 사샤는 저런 거 없어도 명분이 차고 넘친다.
나는 무표정히 턱을 괴었다.
어린 칼릭스를 괴롭히고, 바로 얼마 전까지도 그를 낮잡아 보며 제 위치를 확인하는 것을 즐겼던 인간이 벼랑 끝에 맨몸으로 몰렸음을 깨닫고 겁에 질려가는 몰골을 아주 찬찬히 보고 싶었다.
“방금 나 진짜 악독했다.”
창문으로 하늘을 또 힐끔 쳐다보고 슬며시 침대로 향하던 때였다.
‘어라…….’
퍼억.
마지막 기억은 제발 내 머리통이 깨지지 않았기를 간절하게 소망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