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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179) (179/232)

179화

신관 중 신전에 애착을 가지지 않은 이 없고, 교황을 경애하지 않는 이 없다.

―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바로스는 과연 신실했다.

고작 이십 대 후반에 다다를 수 있는 권력으로 종착한 그에게는 치기 대신 뼛속까지 자부심이 흘렀다.

중후한 연령대가 대부분인 대신관들 사이에서 바로스는 단연 돋보였다.

이 전례 없는 책임의 이유는 줄을 잘 타서도, 혈통 때문도 아닌 순전히 그의 능력 덕택이었다.

그랬기에 이 험지에서 교황 성하를 보필하는 막중한 임무를 감히 자처했다.

제 능력에 대한 자부심이 지대하여 소속된 집단을 자신처럼 사랑하고 동일시하게 된 사내에게는 기이한 믿음이 있었다.

혈통으로 계승되는 세간의 권력가들과 달리, 우리는 타고난 혈통이 아닌 능력으로 각자의 자리에 오른 것이라고.

그 능력인 신성력 또한 혈통처럼 타고난 것이라는 오류는 간과한 지 오래였다.

그러니 황족의 피가 흐르며 황제 바로 아래 권력가인 젊은 대공에게 묘한 중압감을 느끼면서도 꿋꿋하게 고개를 쳐들고 말할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핏줄 하나 잘 타고 태어났을 뿐이니 능력으로 이룩한 자리에 앉은 그가 겁낼 건 없었다.

“교황 성하의 일정 거리 내에서는 성기사를 제외하고 패착한 검을…….”

말이 끝나기도 전, 대공이 검을 버렸다.

무기도, 보호구도 없이 성큼성큼 걸어오는 남자는 뒤를 따라오는 수족들마저 없었으나 무모해 보이지 않았다.

상대방은 분명 그들이 원하는 대로 따랐음에도 어딘지 말려드는 것만 같은 기분에 바로스는 마른침을 삼키며 목을 빳빳하게 세웠다.

“검을.”

“예, 예?”

‘저, 바보 같은.’

바로스는 이를 악물었다.

신관의 위엄을 보이기는커녕 맹추같이 말을 더듬은 평신관이 뒤늦게 얼굴을 붉혔다.

“흑마법사를 기절시킬 수 있도록 검을 달라고 했습니다.”

“아, 그렇…….”

평신관이 돌연 말을 멈췄다.

바로스 대신관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나치게 잠잠하지 않은가?’

저를 기절시키느니 뭐니 이야기를 나눈다면 악악 소리쳐도 이상하지 않건만 너무 조용했다.

뒤늦게 포착한 이질감으로 등허리에 오한이 스쳤다.

다급하게 고개를 돌린 순간.

“읏.”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할 만큼 거친 바람이 쇄도했다.

비유적 의미의 칼날이 아니라 날카로운 얼음 결정이 예리하게 스쳐 간 살이 욱신거렸다.

팔로 눈을 어슷하게 가린 채 겨우 확보한 시야는 흐릿했다.

‘교황, 교황 성하께서는!’

거대한 폭풍우 때문에 교황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성기사들, 읏, 어서……!”

고개를 마구 돌리며 외치던 그는 눈을 문득 눈을 깜빡였다.

‘어째서…….’

예기치 않은 돌풍은 모두에게 공평한 재해가 아니었다. 그들에게만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들 바로 지척에 있는 대공은 뺨에 결정이 스친 잔 상처도 없었다.

‘어째서……?’

이해할 수 없는 현상 앞에서 멍하니 눈을 깜빡이는데, 출정하기 전 교황의 읊조림이 문득 떠오른 것은 왜일까.

바로 직전까지 대신관들은 모두 교황을 만류했다. 그건 너무도 당연했다.

일단은, 수석 신관이 부재했다.

[성하. 위험합니다. 사특한 종자를 직접 구제하고자 하는 성하의 거룩한 결단을 이해합니다. 이해하오나, 다른 신관이 미욱하나마 할 수 있는 일이지 않습니까.]

[그래요. 위험한 일입니다. 그러니 내가 가는 게 맞아요.]

교황은 그렇게 답하며 걸음을 뗐고, 다른 대신관이 다급하게 말문을 열었다.

[신전의 힘 없이는 흑마법사를 판별할 수 없을 테니 대공이 수도까지 생포해 오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헤레이스 대신관.]

한숨처럼 이어진 교황의 말은 거친 바람 소리보다도 더 크게 귓전을 맴돌았다.

[그래서 가는 겁니다.]

엘루이든 대공을 경계했던 교황. 흑마법사들을 간발의 차이로 계속 놓쳤던 엘루이든 대공.

때문에 기어코 이 설산까지 오르게 됐다. 목격자가 결코 존재할 수 없을, 험지.

‘검을 놓은 것도 혹시 믿을 구석이 있어서…….’

단조로운 목소리가 귓속으로 틀어박혔다.

“바로스 대신관께서는 지금 나를 의심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어렴풋한 시야 속에서 칼릭스가 웃었다.

“신전의 요구를 수용해 검을 놓은 엘루이든을, 신성력과 대척점에 있는 흑마법사가 신전을 공격한다고 하여 설마 말도 안 되는 추측을 하고 있진 않으리라고.”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성하!’

하늘에서 빛무리가 떨어졌다.

소름 끼치는 비명을 내지른 흑마법사가 툭 쓰러지고, 돌풍이 멎었다.

엎드린 채 헉헉대던 평신관은 아직 남은 빛무리를 목격하고는 눈을 내리감아 기도했다.

교황이 신성력으로 삿된 자를 처단한 것이다.

“이런.”

엄청난 힘을 보인 교황은 지친 기색도 없이 그저 애석하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말도 안 되는 추측인지 아닌지는 영영 모를 일이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찌하여 영영 모를 일입니까, 성하.”

그런 말을 하며 발검한 사람은 바로 성기사 단장이었다.

“조금 전 저희가 목격한 것은 그 자체로 증거가 되지 않습니까.”

“증거.”

성기사들이 잇따라 발검하는 폭풍전야의 분위기에서, 대공은 몹시도 태연하게 중얼거렸다.

“증거라.”

어딘지 웃음기가 밴 목소리였다.

“저 빛, 굉장히 익숙한데.”

칼릭스가 눈을 접었다.

“마치 사샤에 대한 신탁이 내려왔던 그 날의 빛무리와 너무도 흡사하군요.”

“지금 대공은 감히 교황 성하를 음해하는 거요!”

참지 못하고 바로스가 높게 소리쳤다.

“누구 앞이라고 감히 망발을 지껄이는가.”

엘루이든의 기사가 으르렁거렸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모두 발검한 채였다.

성기사 단장이 엄숙하게 기도했다. 살생을 저지르기 전, 신에게 허락을 구하는 행위였다.

“신에게 고합니다. 무고한 죽음이 없도록 저희를 바른길로 안내하소서.”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쿠웅―

하늘이 마치 소리치듯 울었다.

멈칫하는 성기사들을 독촉하듯 단장이 말했다.

“아직 삿된 것의 흔적이 남아 우리를 교란하려는 것일 터.”

앞장서듯 성기사 단장이 움직였다.

돌격보다는 움직였다는 표현이 적합했다.

고작 몇 걸음 뗀 것을, 돌격이라고는 할 수 없는 법이었다.

파바바밧!

하늘에서 시작해 지면으로 내리꽂힌 엄청난 직경의 새하얀 빛살은 거꾸로 뒤집힌 원뿔처럼 성기사 단장만을 집어삼켰다.

잠시 뒤, 빛이 사라진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

무작위가 아니라 한 명만을 향한 현상.

그건 마치 단죄하는 것 같았다.

죽음 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모두 말을 잃고 제 자리에 멍하니 서 있는 상황 속에서 대공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신께서는 제게 죄가 없음을 말하시는 듯하온데, 성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 * *

그렇게 쓰러지고 다시 눈을 떴다.

이번에도 당연히 꿈속의 다음 순간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틀렸다.

나는 처참한 폐허를 걷고 있었다.

그 배경이 왕성이라는 건 그냥 알 수 있었다.

한때는 벽면을 장식했을 태피스트리는 발자국으로 뒤덮여 더러웠고, 군데군데 놓여 있던 자기는 처참하게 깨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확인하지 않아도 확신할 수 있는 상황 앞에서, 나는 무언가를 찾으려는 듯 그저 계속 걷고만 있었다.

“아.”

알고 있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낯선 울림은 허탈한 것 같기도 했고, 우스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고작 이것 하나 약탈해가겠다고 전쟁을 일으킨 인간들이 역사에 무결한 왕국의 이름으로 남을 생각을 하니 기분이 썩 좋진 않군.”

기분이 더럽다나 X 같다도 아니라 ‘썩 좋지 않다’라는 점잖은 표현을 차용한 여자의 정체가 문득 궁금해졌다.

눈을 감았다 뜬 동시에 장면이 전환됐다.

세상이 온통 하얀색이었다.

“이러다 동사하겠어.”

“사람은 쉽게 죽지 않아.”

남자가 비웃으며 빨리 걸으라 재촉했다.

투덜거리는 대신 픽 웃으며 그녀는 대꾸했다.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그리 단언할 수 있지? 사람은 쉽게 죽어.”

“입만 다물고 있으면 덜 힘들걸.”

“그대, 정말 고약하군.”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썩 사이가 좋아 보이지는 않는 둘이 설산을 함께 등산한 이유는 역시나 하나의 목적 때문이었다.

“자. 여기서 찾으면 된다.”

“위대한 존재께서 나무 하나 구별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후대가 알게 하면 안 되겠어. 연구하려고 안달이 날 테니 말이야. 이 나무의 생존권을 보장해 줘야지.”

짜증스럽게 눈매를 구긴 남자가 고개를 휙 돌렸다.

여자의 시야를 통해 세상을 보던 나는 문득 의아해졌다.

‘어…….’

나뭇가지가 묘하게 익숙했던 탓이다.

내가 생각에 잠긴 사이에도 대화는 계속됐다.

“고개 돌리지 말고 잘 봐야지. 내가 그대를 속이면 어쩌려고 그래.”

“잘라 놓으면 나도 알아.”

남자는 으르렁거리면서도 그녀의 요구대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런데 이 나무는 왜 못살게 구는 거지?”

“너, 정말 말이 많아.”

못마땅하게 눈매를 좁히면서도 남자는 충실히 대답했다.

“불온하니까.”

“흠. 몰랐는데, 불온서적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는 그대의 집에서 즐겨 읽은 탓에 이 나무의 특성을 나도 알아. 이거, 신성한 나무 아닌가?”

“그래서 불온하지. 그릇이 되지 않은 것에게도 허락되니까.”

그러며 남자가 짓씹듯 말했다.

“그러니 그때가 되면 너야말로 목숨 간수 제대로 하는 게 좋을 테지. 자칫하단 네 피는 성혈로, 육체는 제물로 쓰일 수도 있거든.”

겁을 주려는 듯 직설적인 표현이었으나 여자는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제 의식을 찾을 시간이었다.

깨어나기 직전.

남자가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어쩌면 그 안의 나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

이번에도 그 말은 들을 수 없었다.

다만, 나는 생각했다.

언젠가 했던 그 생각을 했다.

이 소설, 마치 무언가의 안내서 같다고.

친절했다.

생각해 보면 해괴한 꿈도 그랬다.

내가 모르는 면을 알려줬다.

그러니까, 친절했다.

그래서 나는 지나치게 친절한 이 세계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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