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깨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내 뒤통수의 안위였다.
원래 큰 것을 탐하기 전에는 작은 것부터 차근히 확인하는 게 먼저랬다.
……아마 이전 생에서 누군가 저렇게 말했을 거다.
‘아니면 말고.’
이건 확실히 누군가 말했다!
나는 진지한 얼굴로 뒤통수를 열렬히 쓰다듬었다. 아주 작은 흠이라도 놓치지 않을 기세로 몹시도 맹렬하게 말이다.
그러느라 주춤주춤 물러서는 인기척에 지나치게 휙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아, 아가씨.”
엉거주춤 물러서는 하녀의 눈시울이 붉었다.
‘아차.’
방금 전.
[아가씨, 세안 물을……, 끼야아아아악!]
타이밍이 조금 나빴다. 내가 눈을 번쩍 뜬 동시에 상체도 함께 펄쩍 일으켰을 때, 그녀가 들어온 거다.
떨어뜨린 대야가 한 바퀴 데구루루 구르기도 전에 집어 올리고, 다시 세안 물을 전달하고, 바닥의 물기를 완벽하게 닦은 프로페셔널한 그녀를 본받아 나도 딱 삼십 초 만에 작성한 편지를 슥 내밀었다.
“엘루이든 대공저의 집사에게 전달해주겠어? 집사가 혹시 부재중이라면 시녀장에게. 최대한 빨리 부탁해.”
“예, 예!”
“고마워.”
하녀의 어깨가 폭풍우 치는 바다의 파도처럼 요동쳤다.
나는 그때 프로페셔널한 사용인을 보니 문득 생각난 레아를 회상하고 있었다.
‘잘 지내려나…….’
휴가를 싫어하는 일 중독자 레아의 안부도 필립이 오면 물어봐야겠다.
그로부터 채 십 분이 지나기도 전.
나는 그 질문을 하고, 대답도 들을 수 있었다.
놀랍게도 마침 집사가 리엔타로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놀라운 소식이 있었다.
“레아가 휴가를 냈다고?”
“예. 그렇습니다.”
“혹시…… 가족들이 아프대?”
“아닐 겁니다. 그렇다면 영지행 마차를 거절할 이유가 없지요.”
“다행이네.”
작게 중얼거리는데, 돌연 불쑥 떠오른 걱정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대공가의 사용인이 외출해도 괜찮아? 혹시 납치를 시도할 수도 있잖아.”
“엘루이든은 엘루이든을 공격한 그 누구에게도 자비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고 보니 사샤가 신전의 호수에 빠지는 걸 구경하고 있던 꼬마들은 바이에르를 제외한 가문 모두가 어떤 식으로든 손해를 크게 봤다고 했다.
하물며 바이에르도 장기전으로 가려고 했을 뿐이지 손을 뗄 생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퍽 푸근한 표정으로 살벌한 말을 읊은 집사가 다시 말했다.
“실은 가주님께서 공녀님의 안위를 확인해 회신하라는 서신을 보내시어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내 안위?”
“예. 공녀님. 무탈하십니까? 변고는 없으시고요? 혹 많이 놀랄 일이나, 기이한 일이나, 찝찝한 일은 없으셨지요?”
저 말을 들으니 찜찜하다.
내 안위를 심각하게 고심하고는 답했다.
“그래. 없었어.”
“그럼 그리 전하겠습니다.”
“혹시 토벌대가 설산에 발이 묶였나?”
“아닙니다. 막 북부 포탈에 도착했다고 하니 늦어도 이틀 내로 도착하실 터입니다.”
“……그런데 서신을 보내?”
내가 얼떨떨하게 묻자 집사는 다시 푸근하게 웃었다.
나는 얌전히 입을 닫았다.
‘그나저나 아직 북부 포탈에 막 도착했을 즈음이라고?’
그러고 보니 리엔타 공작도 달려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잠든―기절한― 시간이 짧았나 보다.
이런저런 사담을 나누는 사이, 드디어 엘루이든의 기사가 도착했다.
검은밤은 모두 대외적으로든 은밀하게든 칼릭스에게 붙었으니 당연하게도 검은밤 소속은 아니었다.
그는 조금 긴장한 기색으로 상자를 건네고는 꾸벅 인사하고 나갔다.
밀봉된 부분을 면밀히 확인한 집사가 상자를 건넸다.
“개봉 흔적은 없습니다. 확인하시면 되겠습니다. 공녀님.”
“고마워. 집사.”
“별말씀을요. 필요하시면 다시 불러주십시오. 아. 아니면 대기하고 있을까요?”
나는 집사를 지그시 쳐다봤다.
그는 정녕 다른 속셈은 없다는 듯 특유의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 인상 좋게 있었다.
“사샤는 지금 별관에 머무르고 있어.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그 말씀은…….”
“그래. 엔젤과 있지.”
집사가 목울대가 크게 일렁였다.
그는 결심한 낯빛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라졌다.
나는 멀어지는 뒤통수에 대고 주먹을 꾹 쥐며 건투를 빌었다.
그리고, 철컥.
문이 닫히자마자 직사각형 모양의 길쭉한 상자를 열었다.
‘그거, 맞네.’
[자칫하단 네 피는 성혈로, 육체는 제물로 쓰일 수도 있거든.]
[그릇이 되지 않은 것에게도 허락되니까.]
‘놈의 궁극적인 목적은 황위 전복. 신성한 나무. 성혈. 제물. 제물. 제물. ……대가.’
“하.”
나무를 들고 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이마를 꾹꾹 눌렀다.
가늘게 뜬 눈으로 나무를 노려보듯 응시했다.
‘흑마법은 목적을 위해 필요한 게 아니었어.’
성혈을 채취하는 과정에서 남는 부산물을 처리할 겸 흑마법사를 끌어들였을 것이다.
일국의 황후를 그렇게 쉽게 처리할 만큼 막 나가는데도 왜 상층부를 절대로 발설할 수 없도록 지나치게 조심스러워했는지도 알겠다.
‘절대로 들켜서는 안 되니까. 절대로.’
아드리안처럼 잡다한 일을 처리하는 사람을 굳이 신성력이 있는 사람들로 뽑은 게 신기하다고도 생각했다.
그래서 미래의 조각을 통해 본 다이브 백작과의 대화로부터 추측했다.
교황에게 믿을 수 있는 건 신성력을 가진 사람들 뿐이라서 발탁한 게 아닌가, 하고 말이다.
‘그게 아니야.’
신성력이 있는 사람의 성혈은 더 순수하기 마련. 처리하기 전, 미리 신원을 확보할 겸 해서 여기저기 저렇게도 써먹은 것이다.
투둑. 투둑.
손 안에 그러쥔 나무가 반복적으로 책상과 부딪쳤다.
시선을 문득 내렸다.
겉보기로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나무였다.
‘그런데, 왜 사용한 나무를 불태우거나 땅에 묻지 않고 굳이 다른 대륙으로 옮긴 거지?’
눈을 깜빡이며 의문을 털어냈다. 당장은 알 수 없다고 해서 나중에도 모르진 않을 테니까.
그리고 저만큼 의아한 다른 것이 있었다.
‘어쩌면 작가 놈은 나쁜 종자가 아닐지도 모르겠군.’
책 제목을 그렇게 지은 것도 나를 조롱하기 위함이 아니라 생명 연장에 지장이 가는 중대한 위협을 알려 주기 위함일 수도 있고.
‘……어라.’
알려 준다고?
저건 조금 이상했다.
그건 꼭 내게 사전에 피해야 할 지뢰를 짚어 주기 위한 목적으로 책을 쓴 것 같은 느낌이지 않은가.
‘……흠. 부끄럽군.’
자아가 잠시 지나치게 비대해졌던 것 같다.
‘혹시 원제가 따로 있나?’
짧은 자기반성을 끝으로 잠깐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다 망한 원작 제목이 뭐였든 중요하지도 딱히 궁금하지도 않다.’
골몰해도 아무 스산함도 없었기 때문이다.
서글프게도 이전 생에서만큼이나 지금 생에서도 죽음과 밀접하기 때문인지, 위험을 감지하는 감이 영혼에 콕 박힌 덕택인지 ‘어어?’ 하는 느낌을 종종 받곤 했는데, 이번은 그냥 멀뚱했다.
그렇게 멀뚱멀뚱하게 앉아 있다가 눈물을 머금고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 벌러덩 누워서 마도구로 소통하고 싶지만, 해가 중천이다.
‘흑. 귀찮아.’
성실한 노아는 연병장에서 열심히 훈련하고 있을 테니 내가 가야 했다.
길게 기절한 건 아닌 모양이지만 그래도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물어볼 생각이었다.
터벅터벅 힘없이 걷는 길, 시야 한 귀퉁이를 차지한 게 뭔가 싶어 쳐다보니 편지 봉투 탑이었다.
“시간이 많이 지났었나?”
리엔타 공작을 포함한 실세 삼인방은 과연 강인해졌을 수도…….
봉투 더미에서 문득 눈에 익은 이름이 보인 것은 그때였다.
“뭐야.”
바로 에리히 로나터스였다.
* * *
시간을 다시 돌려, 칼릭스가 말했다.
싸늘한 북풍한설에 가볍게 흩날리는 검은 머리카락 아래 미형의 얼굴은 무표정한 것 같기도 했고, 옅은 웃음기가 서려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신께서는 제게 죄가 없음을 말하시는 듯하온데, 성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돌격한 성기사 단장이 수습할 형체도 없이 사망한 마당에 다른 성기사들에게 투지가 있을 리 없다.
라우드는 경련하듯 눈매를 찌푸렸다.
“신께서는 정녕 자비로우시지요. 죄 없는 그대들을 잠시나마 의심한 저희를 벌하지 않으셨으니까요.”
가슴 앞에 성호를 긋고 라우드는 두 손을 모아 하관에 댄 채 눈을 지그시 감았다.
“성하…….”
그러며 함께 열렬히 기도한 저 대신관은 모를 것이다.
손으로 가려진 라우드의 입매가 휘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눈꺼풀로 가린 눈동자가 번들거렸다는 진실을 말이다.
분노 때문이 아니다.
성기사 단장은 썩 쓸 만한 패였으나 죽은 사람 붙잡고 아쉬워할 정도는 아니었을뿐더러 그보다 더 값진 물건이 등장했다.
신은 신성력이 없는 것들의 부름에는 답하지 않는다.
당연하다.
적어도 비슷한 수준과 대화해야 이야기가 통하는 법이다.
그렇지 못한 관계에서는 대화가 아니라 이해시키고, 이해하려는 행위라고 부르는 게 적합하다.
‘대공의 신성력이 내 예상과 비슷하기라도 한다면, 선황자의 개화를 기다릴 것도 없다.’
신수의 애정을 담뿍 받은 직계 황족을 수습하고 은밀히 빼돌릴 목적으로 동참한 이 여정의 소득은, 라우드는 아직 모르지만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