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대충 찢어 개봉한 에리히의 편지 내용은 간단했다.
“놀러 오라고?”
슬쩍 불에도 비춰 봤는데, 나타나는 글자는 없었다.
‘이놈, 진심인가…….’
나는 에리히 로나터스를 깔끔하게 놓아 주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저놈이 납치되지 않았다…….
“다시는 얼굴 보는 일 없을 줄 알았는데.”
에리히 놈은 나를 보기 싫은 티를 엄청 냈으니 우연으로도 다시 만나는 일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흥에 겨워 펍에서 골든벨을 울려 라베트의 자산을 흥청망청 거덜 낼까 봐 내심 걱정도 했는데 말이다.’
……갑자기 초대를 받았습니다.
“흠.”
찜찜하게 쳐다보기를 잠시.
다시 대충 놓고 밖으로 나갔다.
노아는 열심히 대련 중이었다.
별수 없이 산책이나 하며 시간을 죽이려고 슬그머니 돌아선 때였다.
“아가씨?”
“에반스 경.”
에반스가 순식간에 내 앞에 당도했다.
나는 위기 상황에서 엄청난 도움이 될 게 틀림없는 그의 달리기 실력에 군침을 흘리며 물었다.
“어쩐 일이야?”
“예?”
“어?”
“볼일이 있으신 게 아니었습니까?”
있긴 한데, 그대는 아니고 노아야.
―라는 말을 하기에는 너무도 순박한 눈망울이었다.
“어, 뭐. 요즘 대련이 잘 되나 궁금하기도 했지. 그대는 다른 기사들에 비해 잠시 공백이 있었잖아.”
“문제없습니다.”
에반스가 씩 웃었다.
‘그렇군’의 의미를 담아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슬그머니 뒤돌아설 타이밍을 노리고 있는데, 에반스가 말했다.
“아가씨.”
‘어라.’
어쩐지…… 결의에 찬 목소리였다.
‘왜?’
그래서 잠시 방심한 틈에 들어온 공격은 그 강도가 유독 셌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말씀은 비록 드릴 수 없겠지만, 제 목숨을 여벌로 생각하시라는 말씀은 드릴 수 있습니다.”
무슨 그런 어마어마하게 무거운 걸 내 손에 들리려고 하다니.
기겁해 후다닥 고개를 돌린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어라.’
에반스 경이 대단히 결의에 찬 표정을 하고 있던 탓이다.
“그럼.”
깍듯하게 인사한 에반스 경이 다시 연병장으로 달려갔다.
에반스는 정말이지 날아다녔다.
땅 한발 허공 한발을 반복하는 에반스를 멍하니 쳐다보며 나는 생각했다.
‘왜 저렇게 결의에 찼지…….’
혹시 기사단장이나 부기사단장 교체가 예정돼 있나.
그렇다고 해도 내겐 아무 권한도 없는데 말이다.
어깨에 내려앉으려는 ‘가문의 유일한 후계로서 막중한 책임’을 슥 피했다.
부친되는 사람이자 혼자 열심히 일하는 리엔타 공작이 조용한데 내가 갑자기 짊어지기도 이상했다.
그런 뒤에야 나는 마침내 뒤돌아설 수 있었다.
이윽고 도착한 곳은 본래의 목적지인 정원 근처가 아니라 적당히 으슥한 후원 어귀였다.
돌아서자 노아가 싱긋 웃었다.
나는 사실은 오늘 일어난 이래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말을 드디어 물었다.
“오늘이 며칠이야?”
노아의 침착한 대답에 따르면 사흘 정도가 흘러 있었다.
“사흘이나?”
“예.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 겁니까?”
“나, 그동안……, 음. 어땠어? 안 이상했어?”
말하고 나니 이런 해괴망측한 질문이 또 없었다.
속으로 으아아아 비명을 내지르고 있는데, 노아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식사도 침실에서 하셨다고 들었는데, 역시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건가요?”
“아. 아니야.”
노아가 걱정스레 나를 쳐다봤다. 나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밥 먹을 시간에는 일어났다고.’
당연히 내 기억에는 없다.
‘내가 내 건강을 몹시 생각하긴 하지만, 무의식도 그러진 않을 것 같은데…….’
아무튼 침실에만 콕 박혀 있어도 걱정은 안 샀다니 게으른 삶을 입증받았다.
“그럼 공작 각하께서 저택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은 들으셨습니까, 아가씨?”
“아버지께서?”
“예. 황성에 머무르고 계십니다. 그럼, 그간 있었던 이야기도 아직이신가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노아가 이야기를 정돈하려는 듯 잠시 침묵하고는 말했다.
그리고 여전히 침착하고 단정한 노아의 목소리를 듣는 내 입은 점점 벌어졌다.
‘이래서 편지가 쌓인 거였구나!’
“……그러니까, 토벌대 앞에 신이 나타났다고?”
“정확히는 신의 뜻이 강림했다고 합니다.”
“어떤 뜻이었는지는?”
“아직입니다.”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칼릭스가 내 안위를 확인하라고 집사를 보낸 걸 보면 이번에도 교황의 소행인가?’
설산에 내리꽂힌 빛은 유독 환했다고 한다. 그건 빛이 눈에 반사된 덕택이겠지만 아무튼 수도에서도 두 눈으로 볼 수 있었을 정도라고.
사람들의 눈을 교란할 만큼 신을 교묘히 흉내 내기 위해서는 소모되는 신성력이 만만치 않을 거다.
교황의 신성력이 마르지 않는 샘이라면 성혈을 수집하려고 들 이유도 없었을 터.
‘아니면 진짜 신인가?’
신 앞에 온갖 나쁜 단어를 붙여 불러댔던 과거가 주마등처럼 눈앞을 싸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
위대하시고 자비로우신 신은 과거가 아닌 현재를 산다고 믿는다.
‘위대하시고 자비로우신 신님. 오래 살게 해주세요…….’
그러다가 돌연 깨달았다.
매일이 아주 요란해서 깜빡했는데, 그러고 보니 요즘 일어나면서 코피를 보는 일이 없었던 것을 말이다.
* * *
한편, 샤를리즈와 같은 질문을 하는 사람은 여기도 있었다.
“아직인가?”
물론, 당연하게도 지금 처음 묻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황성 시종은 진땀을 뻘뻘 흘렸다.
몇 번이고 물었던 토벌대의 귀환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몇십 번은 물었던 신에 대해서인지 알 길이 묘연한 불친절한 질문이었던 탓이다.
피차 대답은 같으니 결국 간결하게 답하려던 때.
“폐하! 엘루이든 대공의 마차가 출입을 요청하고 있다고 합니다.”
“당장 허가해라!”
안토니오 황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자 시종이 황급히 성장을 도왔다.
시종도 내보낸 침전에서, 황제는 초조하게 눈을 굴리며 부산하게 다리를 떨었다.
‘칼릭스만 온 건가?’
‘혹시 교황이 운신이 어려울 정도로 다친…… 그럴 리가 없지.’
‘그럼 나를 무시하는 대응이 아닌가!’
여러 생각이 잡다하게 뒤엉킨 머릿속이 번잡했다.
“폐하. 대공이 도착했습니다.”
벌떡 일어난 황제는 손수 문을 두 손으로 밀어 열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제법 준수한 얼굴이 야차처럼 일그러졌다 펴지기를 반복했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그랬기에 응접실 안에서, 잘 제련된 미소를 짓고 있는 칼릭스를 보자 감정이 욱하고 튀어나오고 말았는지도 몰랐다.
“너는 대체 뭐 하자는 게야!”
황제가 불처럼 화냈다.
“흑마법사를 소탕해 오겠다더니 하나도 잡지 못하고! 못 하겠다면 못 하겠다고 말을 하지 왜 할 줄 안다는 듯이 말을 해! 네 능력이 부족…….”
“왜.”
칼릭스가 웃었다.
처음에는 당황했다. 어딘지 묘한 기백이 느껴졌던 탓이다.
그다음으로는 분노했다.
‘이런 고얀…….’
감히 황제의 말허리를 끊었으니 실수라고 해도 당장 고개를 조아려도 부족하건만 안토니오에게 불행하게도 칼릭스는 제국법을 모두 벗어나는 사람이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하셨는지.”
“그럼 생포했느냐?”
“생포하지는 못했습니다.”
“이것 보아라. 그런데 무엇이…….”
“저는, 생포하지는 못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폐하.”
칼릭스가 문득 웃었다.
의례적으로 짓는 것과는 달랐다. 단연 미소라고 칭해도 부족함이 없는 표정이었으나, 돌연 스산해지고 만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리고 황제는 뒤늦게 깨달았다.
그건 칼릭스가 제 감정을 숨기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숨기지 않는 것이 ‘더는’일지 아니면 ‘이번만’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한 변화 앞에서 황제는 테이블 아래 주먹 쥔 손을 떨었다.
* * *
비슷한 시각.
신전 내밀한 곳, 교황의 침전.
복도를 걷는 어린 신관의 얼굴이 어리둥절했다.
[도자기를 깔끔하게 조각낼 수 있는 도구가 있을까요?]
그러나 교황의 말은 소년에게 있어 진리고 법칙이었다.
당장 준비한 도구를 건네자, 교황이 웃었다.
“고마워요.”
소년 신관을 뿌듯하게 만든 미소는 문이 닫힌 즉시 걷혔다.
“기대 이하네.”
주방에서 짐승의 뼈를 절단할 때 사용하는 칼이라니.
뭐, 날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퍽 유용할 것도 같았다.
라우드는 다시 성물을 차가운 눈으로 응시했다.
이 성물이 그에게 이만한 위험을 알리지 않았을 리가 없다.
성스러운 로브를 입은 남자의 턱관절이 불거졌다.
[신께서는 정녕 자비로우시지요. 죄 없는 그대들을 잠시나마 의심한 저희를 벌하지 않으셨으니까요.]
저 말로 넘어가는 듯했던 일은 설산에서 막 벗어났을 무렵, 재점화됐다.
우습게도 발단은 대신관이었다.
[교황 성하께서는 자비로우셔 언급하지 않으셨으나, 저는 참을 수 없습니다. 대공. 그대는 감히 신전을 의심하였습니다. 당장 사과하십시오!]
[어떤?]
[설마 일국의 대공이 발뺌하려고 하십니까? 신탁이 내려온 날의 빛이 조금 전의 빛과 달랐다고 의심한 것 말입니다!]
“하.”
앞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라우드는 나직이 욕설을 짓씹었다.
아주 약한 힘이었으나 성물은 조각났다.
내부에 균열이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