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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182) (182/232)

182화

라우드는 허리를 굽혀 성물 조각을 주워들었다.

바로스 대신관이 저런 말을 지껄였을 때.

처음에는 저 주제로 이어지는 대화를 막아야겠다고 생각했으나, 그는 이내 침묵을 선택했다.

대공이 어떤 추론을 해 저런 생각까지 이어지고 기어이 말까지 내뱉게 되었는지, 이 기회에 알아두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대공께서는 왜 대답이 없으십니까!]

[다르게 보인 것을 다르게 보였다고 했을 뿐인데, 부연 설명이 필요한가?]

[신전이 대공 전하께서 장엄한 신탁을 의심하고 있노라고 받아들여도 정녕 괜찮으시겠습니까.]

명백히 협박성 발언이었다.

대공은 저 말에 간결히 답했다. 하라고.

‘역시 믿는 구석이 있었던 것이지.’

절단면을 움켜쥔 라우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피가 번진 손은 신성력으로 금세 회복되었으나 조각에 묻은 핏자국까지 지워지진 않았다.

그에게 묻은 의심스러운 오명처럼.

[시,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막 이동 속도를 올린 때였다.

몸이 거칠게 흔들리는 바람에 깨어난 흑마법사가 몸부림치며 외쳤다.

대공의 말이 느려지고, 그로부터 귓속말을 전해 들은 심복이 방향을 선회했다.

[잠시 멈추십시오. 저자의 말을 들어 보아야겠습니다.]

[곧 포탈입니다. 심문은 수도에서 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심문은 수도에서 할 테지만, 간단한 말은 지금도 들을 수 있습니다.]

신전이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암묵적인 합의를 눈치챈 흑마법사가 다시금 소리 높였다.

[저는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비록 임무는 모두 완수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제가 할 몫은 다 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저, 저를 외면하려고 하시는 겁니까!]

흑마법사의 결집력은 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발로일 뿐, 공동체 의식은 결코 아니다.

애초 흑마법사란 타인을 빌미로 제 사리사욕을 채우는 족속이었다.

설혹 이타심이나 충심이 저 흑마법사에게는 있었을지라도, 화형이라는 예정된 끔찍한 죽음 앞에 몽땅 내다 버렸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저 흑마법사가 본디 타인까지 수렁으로 끌고 들어가는 성격이 아니었다고 한들 배신 앞에 달라져도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주, 주군.]

그때도, 그 당시를 회상하는 지금도 라우드가 하는 생각은 같았다.

‘어떻게 족쇄가 풀렸지?’

샤를리즈가 한 번 풀어본 적 있기는 하나, 그건 일문일답으로 한 것이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떻게 저렇게 한 번에…….

“…….”

초조하게 걸음을 옮기던 라우드가 돌연 멈춰 섰다.

수정 구슬을 발견한 바로 그 순간에서였다.

샤를리즈 리엔타가 일문일답의 형식을 사용했다는 것이 중요한 지점이 아니었다.

그녀가 그때 신성력을 이용했다는 것이 중요했다.

“하하.”

해답을 찾은 라우드는 짤막하게 웃었다.

그리고 곧바로 성물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진 교황의 보배를 죽일 듯이 노려본 라우드는 문득 창문 너머를 응시했다.

‘빌어먹을.’

희고 거대한 설산이 아직도 바로 그의 지척에 있는 듯 선명했다.

* * *

안토니오 황제는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고 애써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중언부언하지 말고 제대로 말해 보아라.”

“흑마법사가 죽기 전, 교황을 보고 ‘주군’이라고 칭하더군요.”

“……뭐?”

안토니오 황제가 눈을 찡그렸다.

‘교황이 내세운 가짜였나.’

흑마법사가 아무리 화형이 무섭대도 설산에 숨어 살지는 않았을 테고, 아룬펠 설산만큼 적당한 장소는 없으니 교황이 대역을 세울 만도 하다.

‘입 하나 제대로 막지 못하다니. 신전에서 군림해봤자 결국 우물 속 왕 행세지.’

어쩐지 기분이 좋아져 입 끝을 씰룩이는 황제를 보며 칼릭스는 눈꺼풀을 조금 내렸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흑마법사가 그 전에 신전 측만 공격했다는 겁니다.”

“공격했다고?”

검이나 창을 생각한 황제는 이어진 말에 눈을 부릅떴다.

“눈을 작고 날카로운 촉처럼 이용해 마치 얼음 결정 폭풍 같았습니다. 흑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면 그 전에 이미 도주할 수 있었을 텐데도 가만히 있었다는 것도 기이하고요.”

황제가 눈을 굴렸다.

‘대역이 아니라 진짜 흑마법사였나? 그런데 교황에게 왜 주군이라고…….’

“그리고 신전 측만 공격해 신전은 저희를 의심했습니다. 다행히도 신께서 무죄를 증명해 주신 덕택에 전면전은 없었지만요.”

“그래! 그 빛이 무엇이더냐? 전음이라도 들려온 게야?”

“그저 빛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황제가 볼썽사납게 당장 설명하지 않고 뭐하냐며 찡얼거리기 전, 칼릭스는 모호한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신탁이 내려왔을 당시와 빛의 형태가 다르더군요.”

과연 서술한 모양이 달랐다.

‘혹시…….’

황제의 마음속에 의심 한 자락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이윽고 장막처럼 짙어져 눈을 가렸다.

그건 칼릭스의 의혹이 몹시도 그럴듯해서라기보다는, 신탁의 내용을 도저히 믿고 싶지 않았던 마음 탓이 컸다.

‘교황이 나를 좌지우지하려고 그런 신탁을 조작한 것이라면.’

“폐하, 저는 작은 의심도 좌시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마치 그의 속을 헤아리기라도 한 듯 칼릭스가 말했다.

“물론 이 일은 제 독단입니다.”

황제가 비죽 웃었다.

위험 부담 없이 다른 이의 손으로 처리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흡족해졌다. 조금 전 느낀 위화감은 잊어버린 뒤였다.

안토니오는 본래 저런 성정이었다.

그랬기에 제 형을 독살하고도 조카를 기필코 찾아내 죽이지 않은 것이었으며, 제가 손을 대려는 인물들이 바이에르 공작의 손속으로 족족 쳐내 져도 의심보다는 엮이기 전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이나 했다.

그 단순하고 저밖에 모르는 성격이, 스스로를 근시안적으로 만들어 불행이었고, 미치지 않고 정신을 보전할 수 있게 해 다행이었다.

* * *

나는 시방 ‘어라’의 바다에 잠겨 있다.

처음 시작은 사샤와 함께 한 점심 식사 시간이었다.

“샤를 님과 오랜만에 같이 식사하니 좋아요.”

“나도 좋아.”

무려 사흘이나 잠만 잔 게으른 어른은 무구한 어린아이의 눈을 차마 마주 볼 수 없어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는 비겁한 변호를 했다.

“다음에는 그럴 일 없어. 그렇게 오래 잔 건 처음이거든. 앞으로는 그런 일 없을 거야.”

“아니에요. 자다 보면 그렇게 오래 잘 수도 있어요.”

‘사샤야…….’

이 한량을 보호해주려고 저런 말까지 하다니.

이 심성 착한 아기에게 감동받아 쳐다본 순간 1차 어라가 나를 찾아왔다.

“많이 피곤하셨나 봐요.”

사샤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눈치였기 때문이다.

2차, 3차는 각각 집사와 시녀장이었다.

“하루에 세 끼만 드시느라 얼마나 배고프셨을지…….”

‘저것보다는 사흘간 잠만 쳐 잔 게 더 걱정 아닌가?’

“그래서 고영양식으로 준비하지 않았어요. 아가씨, 괜찮으셨지요?”

‘……고영양식으로 준비하는 것보다는 간식도 먹으라고 깨워야 하는 거 아니야?’

그렇게 깊고도 얕은 바다를 헤엄치며 ‘어라, 어라’거렸다는 것이다.

‘꼭 내가 엄청 오래 잔 건 하나도 안 이상하고 당연하다는 것처럼 생각…….’

돌연 깨달음이 찾아왔다.

‘현혹인가?’

내가 피를 보지 않는 걸 보면 흑마법은 아닌 듯했다.

‘그럼 나쁜 건 아닌가 보다. 그럼 왜……?’

그렇게 어느새 익숙해진 그 물살에 몸을 실으려던 때.

나를 바라본 그 남자가 떠올랐다.

합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았으나, 사실 내가 이 세상에 떨어진 이래로 모든 해답은 비합리적이고도 이상적인 과정을 거쳐 얻을 수 있었다.

‘그 남자가 한 건가.’

분명 처음 본 얼굴이었으나 아주 오랜만에 본 것도 같았고, 동시에 직전까지 본 것도 같은 남자.

묘한 찜찜함이 인생의 동반자처럼 느껴질 즈음.

리엔타 공작저의 대문이 열렸다.

* * *

나는 힐끔 사샤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눈이 딱 마주쳐버렸다.

고개를 갸웃하는 아이의 머리를 퍽퍽 쓰다듬으며 말했다.

“다음에 또 엔젤을 만나러 오자.”

“엔젤은 아카데미 1학년을 준비해야 하니까, 괜찮아요.”

“엔젤이 공부하는 옆에서 같이 공부하는 건?”

“아니에요. 마음속에서는 계속 만나고 있으니까요.”

어른스러운 말에 사샤가 아카데미에 입학하면 따라서 재입학할 생각이나 하고 있던 나는 삐걱삐걱 찻잔을 기울였다.

그때, 집사가 문을 두드렸다.

“아가씨. 마차가 준비됐습니다.”

“가자.”

“네. 샤를 님.”

우리는 손을 꼭 잡고 현관문을 열었다.

그러자 조금 놀란 눈을 하고 있는 남자가 그곳에 있었다.

“숙부님!”

달려가는 사샤를 칼릭스가 가뿐히 안아 들었다.

“잘 지냈니?”

“잘 지냈어요. 아주요. 숙부님은요? 건강하세요?”

“건강해. 아주.”

사샤가 웃었다.

나는 내 머리통을 점검했을 때만큼 칼릭스를 면밀하게 관찰하는 중이었다.

“어디 가, 샤를.”

앞을 확인했으니 뒤도 확인하려고 옆을 지나가는 내 손을 칼릭스가 가볍게 잡았다.

“칼릭스의 상태를 점검하고 있었습니다.”

“티끌 하나 다치지 않았어.”

“무릇 티끌 정도로 다치는 건 다친 사람은 알 수 없는 법이어서…….”

다시 확인하고자 슬쩍 손을 빼내려는데, 칼릭스가 돌아섰다.

“아주 보고 싶었는데, 나만 그랬던 건가.”

퍽 서운한 듯한 목소리는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귓가를 스치고 지나간 말이 봄바람 같았다.

칼릭스와 내 사이에 갇힌 사샤가 다시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영영 평화로울 것만 같았다.

사실 우리는 그다지 평화로운 상황이지도, 영영 이어질 수도 없을 텐데도 말이다.

“……나도 보고 싶었어.”

그럼에도 나는 잠시의 평온에 기대었다.

* * *

이튿날.

‘흠. 역시.’

나는 꽤 오랜만에 얼굴을 벅벅 닦으며 하루를 시작했다.

‘저 꽃을 다 뽑아 버려야 되려나.’

흰 눈으로 슬쩍 튜베롯을 쳐다보고는 거울을 쳐다봤다.

‘기선제압.’

과연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성격 아주 더러워 보이는 몰골이었다.

‘여기에 기력까지 보강하겠다.’

오늘 나는 아침을 아주 든든히 먹을 작정이다.

교황과 만나기로 약속한 날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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