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그렇게 어깨를 쫙 펴고 기세등등하게 대공저의 현관문을 벌컥 연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안녕.”
“예에.”
몇 번을 봐도 좋은 얼굴이지만 여기 왜 있는지 모르겠다는 게 문제다.
“배웅하고 싶어서.”
‘아하.’
마차에 착석하고 다녀오겠다며 손을 흔들려던 나는 다시 어리둥절해졌다.
“왜 타십니까?”
“그러면 안 돼?”
마차 소유주가 본인 마차 타고 싶다는데 안 된다는 것도 이상하다.
아니라며 고개를 젓자, 이윽고 마차가 출발했다.
은밀히 할 말이 있나 했더니만 칼릭스는 마차가 저택을 빠져나갈 때까지도 아무 말이 없었다.
하긴, 어제 하도 많은 이야기를 나눠 새롭게 나눌 게 없긴 했다.
나도 같이 한적하고 고즈넉하게 입을 닫고 있는데, 문득 칼릭스가 말했다.
“어제 말했던 그 꿈 말인데.”
나는 맞은편을 힐끔 쳐다봤다.
꽤나 이상한 느낌의 서두였던 탓이다. 칼릭스 엘루이든이 어디에서든 저렇게 말문을 여는 법이 있었던가.
“그 꿈에서 말한 내용이 진짜라고, 어떻게 확신했어?”
그는 눈꺼풀을 반쯤 내린 채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내 빤한 시선에 들어 올려진 얼굴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부드러운 미소가 번져 있었으나, 어딘지 불안정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슬아슬한 미인이란 심장에 둔통을 일으키기 적격이나, 나는 내 연인을 상대로 그걸 느낄 쓰레기는 아니었으므로 즉각 대답했다.
“사실, 근거 같은 건 없습니다. 그래서 추가적인 조사가 선행되어야겠다고 말한 겁니다.”
“아니야. 그대의 추측이 맞아.”
칼릭스가 조금 웃었다.
“미안해. 샤를. 그 나무의 정체, 이미 알고 있었어.”
‘그럼 조사하느라 시간 낭비할 필요 없겠군!’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데, 단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대가 말하고 나면 뒤늦게 이미 알고 있었다고 말할지도 몰라.”
나는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미리 실망하라고 말하는 거야.”
“실망하지 않습니다. 서로의 모든 걸 알아야 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나는 모두 알고 싶은데.”
칼릭스가 비스듬하게 웃었다.
“이것도 지금 미리 실망하라고 말했어. 네 연인이 이렇게 이기적인 사람이라서 미안해.”
나는 코 밑을 슬쩍 훔쳤다…….
내 취향의 범위는 예상보다 아주 넓었던 것이었다.
“이것도 괜찮습니다.”
“다 괜찮다고만 하네…….”
칼릭스가 턱을 깊게 괴며 중얼거렸다.
“다 괜찮은 게 아니고 칼릭스라서 그런 겁니다.”
칼릭스는 대답 없이 고요히 웃었다.
그사이, 신전에 도착한 마차가 속도를 늦췄다.
먼저 내린 칼릭스가 내 손을 잡아 주었다. 그리고는 퍽 장난스럽게 말했다.
“앞으로도 얼굴 관리, 잘할게.”
‘예?’
나는 흠칫해 그를 올려다봤다.
칼릭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음. 아니었어?”
나도 안다. 내 취향은 부끄러운 게 아니다.
누구는 돈을 먼저 보고, 누구는 성품을 먼저 보고, 누구는…….
“항상 제일 먼저 얼굴부터 봐서 얼굴이 취향인 줄 알았는데.”
“아닌 건 아니지만, 아닌 게 맞는, 아니라고는 할 수 없지만…….”
칼릭스는 내 말을 잠자코 경청했다.
속으로 이마를 빡 때리고 나는 결연하게 말했다.
“어떤 모습이라도 좋아할 겁니다. 이건 확신입니다.”
진짜다.
“사실…….”
내가 어떤 말을 할지 궁금한 듯 칼릭스는 묘한 웃음을 지은 채 “사실?”하고 되물었다.
“칼릭스는 제 취향이 아니었습니다.”
“아, 취향.”
마치 단어를 입 안에서 굴리는 듯한 어감이었다.
“그래, 취향.”
그리고는 아주 찰나 삐뚤게 입 끝을 올렸는데…….
‘어.’
묘하게 익숙한 표정인데, 어디서 봤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칼릭스와 함께 응접실로 가는 길에도 나는 그 낯선 듯 익숙한 얼굴을 곱씹었다.
“대공 전하, 죄송하오나 여기서부터는 출입이 어렵습니다.”
“그럼 여기서 기다리는 건?”
“그건 괜찮사오나…….”
“마차를 여기까지 끌고 오는 건?”
“…….”
밖에서 기다리면 추울까 봐 한 질문에 신관은 미친 사람 보듯 나를 쳐다보고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어렵습니다.”
아쉽게 됐다.
“조심히 다녀와. 기다리고 있을게.”
“예.”
점잖은 인사를 끝으로 헤어지려는데, 칼릭스가 돌연 내 어깨에 제 얼굴을 파묻었다.
“벌써 보고 싶어서 어쩌지.”
신관이 입을 떡 벌렸다.
나는 다부지게 대답했다.
“본론만 마치고 일찍 오겠습니다.”
‘왜 따라왔나 했더니 오래 잡혀 있지 말라고 밑밥 깔아 줄 생각으로 왔던 건가 보다.’
그 배려심에 감사를 표하며 돌아섰다.
길의 거의 2/3를 산책하듯 느릿느릿 걸어온 탓인지 교황은 벌써 응접실에 도착해 있었다.
“오셨습니까. 미리 준비하고 있었답니다.”
이번과 저번의 차이점은 다이브 백작의 유무뿐이다.
테이블에 놓인 수정 구슬이 말끄러미 빛났다.
‘교황을 어떻게 해야 제거할 수 있을까?’
몹시도 양심 없는 질문을 수정은 외면했다.
내 얼굴만 빤히 비치는 구슬을 쳐다보다가 에휴 하며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신기하지 않아요? 이 수정 말이에요. 사실은 아주 오래전에 제작된 것이랍니다.”
‘별 이상한 말을 다 하네.’
최근에 제작된 거면 교황 손에 들어올 수나 있었을까. 신성력이 넘쳐났다던 신성 제국 시기에 만들어진 성물들을 제치고 말이다.
“신성 제국이 아닌 타국에서 제작된 성물인데도 이만큼의 영속성이라니 대단하죠. 그 시절의 신성력이 저는 참 궁금하답니다.”
이번에도 별소리였지만 어딘지 찜찜했다.
“공녀는 궁금하지 않나요?”
교황이 무표정하게 속삭이듯 물었다.
* * *
갈림길 앞에서 라우드는 경로를 정했다.
‘대공은 전면적인 방식으로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지.’
뒤로 암살자를 보내는 것도 의미가 없다. 흑마법은 자칫하다가는 대공에게 이쪽을 틀어쥘 목줄을 쥐여주는 셈이 될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결정했다. 공녀를 포섭하기로. 정확히는 세뇌하기로 말이다.
어차피 신성력을 보유한 샤를리즈 리엔타를 제 손속으로 끌어들일 생각이었으니 계획이 조금 당겨진 것에 불과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으나 보다 조심스러워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렇기에 공녀와 그, 둘만 있는 자리에서 행해져야 한다.
그러면서도 확실해야 했다.
그렇기에 흑마법을 사용하는 편이 좋겠다.
그 결과, 라우드는 언제나 유용하게 사용하고는 했던 나무를 선택했다.
성혈을 만들 수 있는 매개체. 불태워지면 힘도 사라져 성혈을 그저 오래되어 썩은 것으로 만들어 버려 성가신 나무.
어쩌면 이건 신성한 나무가 아니라 이교도들의 그것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잘려도 생명을 잃지 않으나 화형으로는 죽는다는 공통점이 있으니까.
요긴하게 이용하고 있지만, 어떤 메커니즘으로 작동하는지는 알 수 없는 이 해괴한 나무는 텅 비워지면 흑마법을 잠시 담을 수 있다는 해괴한 속성도 있었다.
라우드가 뭉근하게 웃었다.
“아주 흥미로울 텐데요.”
샤를리즈의 서늘한 녹안이 탁하게 가라앉았다.
“공녀에게도, 제게도 말입…….”
“아.”
샤를리즈가 제 코 아래에 무심하게 손을 가져다 댔다. 하관이 가려진 탓인지 유독 형형한 눈빛이 그를 쏘아보듯 응시했다.
그랬기에 예상하지 못했다.
쾅!
응접실 문 앞을 지키던 성기사가 즉각 반응했다.
“성하. 무슨 문제가 생기셨습니까?”
“아닙니다.”
“커다란 소리가 들렸는…….”
“아니라고 했습니다. 객과 긴밀히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니 더는 방해하지 마세요.”
“예, 성하.”
태연한 목소리를 낼 필요가 없어진 라우드의 얼굴이 무섭도록 굳어졌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손가락 굵기의 나뭇가지가 쪼개졌다.
아무렇지 않게 걸음을 떼고 등잔의 불에 나뭇가지를 가져다 대던 손이 멈칫했다.
비록 기절은 예상 밖의 반응이었지만, 반응이 있다는 자체가 흑마법이 제대로 시전됐다는 증거였다.
화분 옆에 조각난 가지를 두고, 라우드는 방향을 바꿨다.
무릎 뒤를 접고는 샤를리즈의 턱을 손으로 고정해 관찰했다.
‘그런데, 정말로 기절한 것은 맞던가.’
라우드가 눈을 가늘게 떴다. 얼굴 근육 하나도 놓치지 않을 기세로 오래도록 샅샅이 훑어보았지만, 위화감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럼 대체 왜.’
그때였다.
“대공 전하! 이 무슨 무례란 말입니까! 아무리 대공 전하라고 하시어도 초대받은 분만 출입이 가능한 장소입니다! 신전의 규율을…….”
“내 약혼자가 일찍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는데, 벌써 한 시간이나 흘렀지 뭔가.”
한껏 흥분한 신관 때문인지 그 목소리는 유독 침착한 듯했다.
“이야기를 나누시다 보면 길어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라우드는 기절한 샤를리즈를 한 번 더 바라보았다. 야트막한 한숨을 내쉬며 의자와 공녀를 일으킨 남자가 이번에는 나뭇가지를 모두 불태웠다.
그리고 막 돌아선 때.
“대공 전하!”
문이 열렸다.
라우드는 조금 불쾌한 듯 웃었다.
“대공이 아무리 제국법의 구애를 받지 않는다고 해도, 정도는 지키는 줄 알았는데요.”
대공이 공녀가 늦는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행동을 벌일 리가 없다.
‘혹시 흑마법을 감지할 수 있는 건가?’
흑마법사 집단을 놀랍도록 빠르게 수색한 것이 단순히 뛰어난 정보력 덕택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라우드는 방금 전 그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어차피 증거는 불태워졌으며, 칼릭스는 애초 그와 흑마법사의 연관성을 의심하고 있다.
‘오히려 잘 됐지.’
이 무례한 행각을 라우드는 절대 흘려보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샤를리즈 리엔타는 역시 포섭해야 하겠고.’
성급하게 움직이지 않는 남자가 대안 없이 행동했다.
답지 않게 굴었음에도 정작 조급한 기미가 없던 칼릭스는 그사이 샤를리즈 곁에 당도해 있었다.
“대공. 변명도 하지 않는 겁니까?”
그러며 라우드는 내심 의문스러웠다.
매개가 불태워졌는데도 샤를리즈 리엔타는 아직도 의식을 잃은 채였다.
‘역시 나를 속였나.’
하지만, 그래서 얻는 건 무엇이란 말인가.
“대공.”
“변명은.”
힘없이 늘어진 몸을 익숙하게 추스르며 칼릭스가 느리게 발음했다.
“사실은 신이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말장난을 하는 겁니까?”
“왜 말장난이라고 생각하시는지.”
칼릭스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다분히 의도적인 행동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라우드는 입매를 가까스로 구기지 않을 수 있었다.
“함께 목격하지 않으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