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184) (184/232)

184화

라우드는 눈매를 좁혔다.

끝까지 당긴 활시위처럼 팽팽한 분위기를 만든 장본인이 여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에는 성하께서 설명이 필요할 듯한데요.”

“공녀의 요청으로 수정 구슬을 보았습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수정 구슬을 확인한 칼릭스의 얼굴은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단지 샤를리즈를 지탱한 팔에 힘이 조금 더 들어갔을 뿐이다.

당사자만 알아챌 수 있는 아주 미묘한 변화를, 당연하게도 라우드는 눈치채지 못했다.

“혹자는 성물이라고 하고, 혹자는 신물이라고 일컫는 물건이다 보니 공녀에게 무리가 갔나 봅니다.”

수정 구슬을 바라보는 척 시선을 내려 눈을 감춘 라우드가 생각했다.

‘어쩌면 내막을 알고 있어 성급하게 행동했는지도 모르지.’

그의 궁극적인 목표와 과정을 말이다.

대공이 정녕 모두 파악했는지 확인하는 방법 자체는 간결하다. 수확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말이다.

생각을 마친 라우드는 자연스럽게 눈을 들었다.

“아예 신성력이 없으면 모를까 공녀에게는 약간의 신성력이 있지 않아요.”

“그렇습니까.”

빌어먹도록 태연한 어조였다.

‘당장은 더는 얻을 게 없겠어.’

결정은 빨랐다. 라우드가 조금 곤혹스럽게 웃었다.

“그러나 인과관계가 분명하다고 해도 공녀가 혼절한 것은 사실. 별 탈 없이 깨어날 것을 알면서도 걱정이 되는군요.”

완곡한 축객이었다.

“언급하신 대로 샤를리즈에게 문제는 없을 테지만, 휴식은 필요하겠죠.”

직전 저지른 행각이 행각이건만, 칼릭스 엘루이든은 선뜻 축객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도리어 무슨 속셈인지 의아해졌다.

마치 문 너머가 보이기라도 하는 듯 닫힌 문에 시선을 둔 라우드가 이윽고 거칠게 눈을 감았다.

‘제기랄.’

어디서부터 계획이 틀어졌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 * *

난 내 머리통 두고 도박하지 않는다.

정말 기절했다.

단지 일찍 깨어났을 뿐이다.

마차 문이 닫히자마자 번쩍 눈을 떴다.

‘아차.’

이러다가 시녀 여럿 경악시키고 고치기로 결심한 몹쓸 버릇인데, 버릇이 괜히 버릇이 아닌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칼릭스는 눈을 크게 뜨는 대신 부드럽게 웃었다.

“일어났어?”

하다 하다 적의 진지에서 잠을 잔 말종이 된 기분이었다.

나는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는 멀쩡해.”

안다.

오는 길에 칼릭스가 내 머리통을 점검해 준 덕택이다.

손길이 너무 부드러운 탓에 다쳤대도 아픔을 못 느낄 수준이라 딱히 유용한 점검은 아니었지만, 이런 것까지 냉정해질 필요는 없겠다.

대신 “그렇습니까.” 하며 멋쩍게 머리를 매만지는 척 면밀하게 확인했다.

“그대는 머리를 많이 신경 쓰니까.”

“아무래도 급소이니 말입니다.”

“그렇지. 그리고 다른 급소로는…….”

그렇게 나는 잠시 급소 강론을 받았다.

어느 날, 내가 거울 앞에서 열심히 목도리를 칭칭 두를 때부터 예정되었던 미래를 나는 겸허하게 받아들였다.

신전을 벗어나 보다 매끄러워진 길에서 마차가 부드럽게 움직일 무렵, 칼릭스가 문득 물었다.

“이번에도, 보았어?”

“아. 이번에는 성물 때문에 기절한 게 아니어서 그런지 안 보였습니다.”

나는 눈매를 좁혔다.

“흑마법을 쏘지 뭡니까.”

간도 큰 자식이었다.

아니면 엄청 급했다던가.

“전혀 안 궁금하다는 얼굴 하고 있었는데도 비슷한 말을 여러 번 반복한 걸 보면 세뇌하려던 걸 수도 있겠습니다.”

내가 깨어난 때는 교황이 내 턱을 잡았을 무렵이었다. 혹시 혼잣말이라도 할까 봐 열심히 기절한 척했는데 썩 소득이 없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정말로 신이 말했어요?”

“음.”

제 이론의 허점을 발견하고자 밤을 새우는 현자처럼, 혹은 마지막 일격을 앞둔 검사처럼 무표정했던 얼굴이 불현듯 풀어졌다.

“공녀는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데, 늦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약속 앞으로도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자칫하다가 작고 소중한 내 남은 삶을 칼릭스에게 부칠 사식 고르면서 보낼지도 몰랐다.

‘아, 칼릭스는 제국법에 구속되지 않으니까 아닌가?’

칼릭스가 불현듯 작게 웃었다.

혹시 그를 감옥에 보내버린 이 생각을 눈치챘나 싶어 흠칫한 나는 굳어 버렸다.

“괜찮아. 백 살까지 살기로 한 약속만 지키면 돼.”

“……인생사는 어떻게 흐를지 알 수 없어서.”

“그 물길, 내가 만들게.”

칼릭스가 퍽 여유롭게 고개를 기울였다. 다분히 장난스러운 행동이었다.

“물론 공녀의 첨삭을 받아 리엔타 공작 각하와 함께 열심히 말이야.”

“첨삭은 칼릭스가 하는 게 좋겠고, 저는 열심히 파겠습니다…….”

아버지 살리겠다고 백방 뛰어다니다가 원작보다도 더 빨리 이 세상 하직할 뻔한 과거를 나는 잊지 않고 있다.

‘그러고 보니 원작에서 죽는 시기는 이미 지났군.’

내가 죽은 뒤에 황후가 죽었으니까.

원작을 초반부부터 박살 낸 탓에 원작 내용에 발맞춰 제대로 흘러간 게 없긴 하지만 막상 목숨을 건졌다고 생각하니 체감이 달랐다.

‘어쩌면 신수의 시간은 아주 빠르게 흘러서 나보고 곧 죽는다고 했을지도 몰라.’

영생을 사는 존재에게 백 년은 화살이 날아가는 정도와 다를 바 없을 거다.

그리고 만약 오해로 빚어진 상황이 맞다면 신수를 붙잡고 찔찔 울겠다.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미처 보지 못했다.

“그래. 그러자.”

그때 나를 바라본 칼릭스의 표정을 말이다.

* * *

늦은 밤.

리반이 빛보다도 빠르게 탈출한 집무실로 들어선 파커가 보고했다.

“교황이 황제와 접촉했습니다. 엘루이든과 신전 둘 모두를 제 손을 쓰지 않고 처리하려는 의중으로 해석됩니다.”

“형님께는 어려운 일일 텐데. 안타깝게도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으셔서 말이지.”

무표정하게 보고서를 읽어내리던 칼릭스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선황비 전하로부터 답은 없었어?”

“예. 아직입니다.”

“그래.”

[물론 나도 황자 전하를 뵙고 싶다. 건강하신지, 무탈하신지 내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하지만 혹시 나를 보면 그 기억이 깨어날까 봐 두렵다. 역시 뵙지 않는 게 나아.]

신수의 친애를 듬뿍 받는 조카는 아직도 신성력을 제대로 개화하지 못했다.

샤를리즈의 말이 맞다.

인생사란 어떻게 흐를지 알 수 없는 법. 그러므로 가질 수 있는 건 모두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아직 어리고 여린 그의 조카는 힘이 필요했고, 늦은 개화의 이유로 짚이는 것이 있었다.

물론, 둘의 재회를 생각하는 건 비단 저 목적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바이에르 공작에게 은밀히 전달해.”

“예. 주군.”

서신을 건네받은 파커가 사라졌다.

혼자 남은 공간에서, 칼릭스는 문득 중얼거렸다.

“이상해.”

아직 규정하지 못한 위화감 혹은 기시감이 고요한 사위를 가르고 흩어졌다.

그랬다. 이상했다.

그는 이제는 제대로 발음할 수 없는 이름을 언급했다.

몇 번 더 반복하자, 그제야 미적거리며 나타난 존재가 그를 어색하게 불렀다.

“어. 돌아왔냐.”

“샤를리즈에게 혹시 말했나?”

“뭐, 뭐를?”

칼릭스는 대답하는 대신 소년을 가만히 쳐다봤다.

지레 찔린 소년이 목청을 높였다.

“내가 말한 거 아니야! 짐작하고 있던데!”

“짐작했다고.”

“그래. 뭐, 인간의 육체는 약하니까 죽기 전에 미리 신호라도 보냈나 보지.”

“언제였는데?”

“얼마 안 됐어. 한……, 열흘? 이주? 보름? 한 달? 그나저나 너한테 아무 말도 없었나 보네.”

그러며 소년이 힐끔 그를 훔쳐봤다.

“보통은 좋은 사람 만나라며 떠나보내지 않나?”

소년의 힘이 지금보다 더 온전한, 즉 믿음이 강했던 시절. 소년이 잠든 곳 앞에서 무수한 사연들이 펼쳐지고는 했다.

덕택에 소설가로 데뷔한다면 화려한 성공이 예정된 소년이 들으라는 듯 혼잣말했다.

“어째 너는 돌고 돌아도 네가 더……. 뒷말은 하지 않으마.”

“그렇다면 더 좋은데.”

여상한 목소리에 별생각 없이 다시 힐끔 훔쳐본 소년이 흠칫했다. 날카로운 미소가 걸린 얼굴이 살짝 기울어졌다.

“나도 같았을 테니까.”

“그, 그래서 이거 물어보려고 부른 거냐!”

“신성한 나무, 기억해?”

특정한 이름보다는 별칭이 편했다. 이름은 항상 달라지는 법이었으므로.

“신성한 나무?”

잠시 눈을 굴린 신수가 돌연 눈매를 찌푸렸다.

“기억하고말고.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추측인데.”

“네 추측이 틀린 적 있었냐? 뭔데? 불안해지니까 얼른 말해!”

“그것을 이용해 너의 대리인이 황위 찬탈, 혹은―.”

단순히 황위가 목적이라기에는 과했다.

아주 오래전, 한때 존재했던 나라를 떠올리는 얼굴은 무심하기 짝이 없었다.

“재건을 획책하는 것 같더군.”

소년이 입을 애매하게 찡그렸다.

명색에 교황이라는 작자가 그 나무를 볼 수 있을 만큼 신성력이 약하다는 데 충격을 받아야 할지, 아니면 기꺼이 건국에 조력한 제국을 누군가 무너뜨릴 작정이라는 데서 분노해야 할지 갈팡질팡하던 소년이 버럭 소리쳤다.

“일단은, 걔는 내 대리인이 아니고!”

씨근덕거리던 소년이 털썩 허공에 앉았다.

“그럼, 내가 뭘 해야 하는데?”

“어렵지 않아.”

엄청나게 어려울 것 같은데. 입 속으로 꿍얼거린 소년이 눈을 화등잔만 하게 떴다.

그리고는 멍하게 중얼거렸다.

“뭐야. 엄청 어려울 줄 알았는데 정말 쉽네…….”

“어렵지 않다고 했잖아.”

“너 정말……, 이러다가 정말로 평범한 인간이 되겠다.”

허망한 표정의 소년을 바라보는 칼릭스의 눈매가 즐겁게 휘어졌다.

고대해 마지않던 것이었다.

* * *

“서, 성하!”

허겁지겁 달려오던 신관이 멈칫했다.

단잠에 한참 빠져 있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할 아주 늦은 시각.

교황은 그의 처소로 향하는 길목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성하께는 따로 계시가 내려왔었나 봐!’

이런 대단한 분을 모신다는 데서 기인한 뿌듯함을 애써 감추며 신관이 엄숙하게 걸음을 옮겼다.

“신탁이 내려왔습니다.”

신전의 가장 내밀한 곳, 그곳에 위치한 석판에 신의 말이 적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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