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신전의 응접실에서 머리를 박아서 기절한 건지, 아니면 기절해서 머리를 박은 건지 그 답을 얻었다.
기절해서 머리를 박은 거였다.
그렇지 않고는 지금 현상이 설명되지 않았다.
물론 설명될 수 없는 것도 있었지만 말이다.
‘왜 이번엔 시차가 있던 거지.’
나는 다소 찜찜한 기분이 되어 이곳의 흐름에 몸을 맡겼다.
둘은 설산에서 엄청나게 티격태격하더니 그새 사이가 좋아진 모양이다.
[왜 더 먹지 못하는 거지?]
남자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번에도 그 나이에 죽을 셈인가? 네가 운명에 순응할 성격인 줄은 몰랐는데.]
‘그 나이?’
[이번은 생일이 저번보다 느려 몇 달은 더 살겠다고 생각했는데, 좋은 일인지 모르겠군. 그만큼 그대가 고생할 생각을 하니 미안해.]
[약을 먹을 생각에 그런 건 아니고?]
[그 생각이 아주 없지만은 않다고, 부정하진 않겠어.]
그녀가 약병을 툭 들었다 놓았다.
나는 그것을 군침 흘리며 보고 있었다…….
[다만, 이 맛이 익숙해 내려 두었을 뿐이야. 생각해 주는 건 고맙지만 이 약은 효과가 없었으니.]
……가 미련 없이 시선을 뗐다.
[배합 비율이 달라.]
다시 군침을 흘리려는데, 그녀가 문득 어깨를 으쓱 올렸다.
[나는 만족할 만큼 충분히 오래 살고 있는데 말이지.]
[너.]
[그러니까, 답지 않게 죄책감을 느낄 필요 없다는 말을 하고 있어.]
한 인외와 한 인간의 복잡한 관계는 관심 밖이고, 나는 저 배합 비율을 생색내며 말하기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었다.
[죄책감이 아니라 책임감이지. 네 반쪽짜리 영생은 내가 책임져야 할 몫이 되었다.]
[타이밍이 나빴어. 이래 봬도 내 왕국의 기사들은 능력이 좋거든.]
[능력이 좋아서 전멸도 하나 보지.]
그리고 남자는 냉소적으로 덧붙였다.
[신물을 추적도 할 수 없는 주제에 할 말은 아니지 않나?]
[부친을 설득하지 못한 내 탓이라고 해 두자. 신성한 ‘그들’께서는 비겁하게 급습도 하는 종자라고 집무실 앞에서 노래라도 불러야 했는데.]
남자가 기어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너는 상관없나? 네 삶의 끝은 고정되었고, 망각을 회수당했는데.]
[뭐야.]
그녀가 문득 웃었다.
[계속 나를 찾아올 생각이었나 보군.]
[…….]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이번에도 심연까지 들여다보는 듯 깊은 시선이었다.
그러나 저번과 차이점이 있다면, 남자의 이어진 말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수정 구슬을 되찾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건 이 이해할 수 없는 낯선 인물들의 이야기에 내가 휘말린 이유이자 목적이었다.
그래서 묻고 싶어졌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가늠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존재에게 말이다.
혹시, 교황에게 그 구슬을 사용하라고 현혹했느냐고.
* * *
분명 잠을 잤는데도 피곤한 기분이다.
나는 힘없이 몸을 뉜 채 눈을 감고 재차 수면의 세계로 떠날 채비를 했다.
준비는 완벽했지만 실행은 실패했다.
노크 소리가 몇 번 들리더니 문이 벌컥 열렸기 때문이다.
“공녀님. 공녀님!”
레아였다.
비척비척 상체를 반쯤 일으키자, 레아가 단숨에 달려와 침대 헤드와 내 등 사이에 베개를 끼워 넣어 다시 누울 수 없도록 만들었다.
“새벽에 신전에 신탁이 내려왔다고 해요.”
왠지 이번에도 조작된 신탁일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내용이 발표됐어?”
“네.”
‘설마 칼릭스를 신의 이름으로 척살해야 한다, 뭐 이런 건 아니겠지?’
내 표정이 썩어 들어간 것을 얼른 말하지 않고 뭐 하냐는 뜻으로 알아들었는지 레아가 단숨에 말했다.
“차기 황제의 치하 아래 제국은 광영으로 가득하리라고 말이에요.”
“오.”
나는 감탄했다.
‘분란을 만들면서도 빠져나갈 구멍이 아주 크게 있군. 의미심장하기도 하고 말이지.’
누구의 손이 닿은 게 분명한 신탁이었다.
그리고 난 그 누구로 추정되는 인물에게 즉각 달려갔다.
“응. 내가 했어.”
―쟤가 하라고 했다.
신탁 조작단이 실토했다.
“황제보다는 교황을 조준한 신탁입니까?”
“음.”
칼릭스가 작게 웃었다.
“대답으로는, 그래. 맞아.”
황제는 한참 어린 동생에게 견제할 가치도 없는 취급을 받기 싫었다면 알아서 잘 살아야 했다.
<죽어 선대들에게 책망받을 걱정은 덜었어. 바이에르의 책무는 황제 개인보다는 본국의 발전에 뿌리가 있으니 말일세.>
리엔타 공작저를 떠나온 첫날. 바이에르 공작으로부터 받은 서신이 생각난 건 결코 ‘문득’이나 ‘그러고 보니’가 아니다.
“얼마 전, 아룬펠 설산에서의 일이 있었으니 교황으로서는 감회가 새롭겠지. 형님은 저번 신탁의 내용으로 조급해지겠지만…….”
칼릭스가 문득 말을 멈췄다.
숙련된 화가가 그린 것처럼 완벽한 형태의 눈매가 조금 좁혀졌다.
나는 뒷말을 완성해 주었다.
“역시 설산에서의 일이 있었으니 함부로 움직일 수 없을 테지요.”
“……응.”
―그런데, 너 왜 그렇게 실실 웃고 있냐? 그 신탁이 그렇게 마음에 들었던 게야? 큼. 사실, 쟤는 두루뭉술하게만 말했고, 내용 자체는 내가 직접 썼다.
“신탁 때문이 아닙니다.”
“그럼?”
“제 숙원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후후.’
나는 비열하게 웃었다.
실로 남의 물건을 빼앗아 올 만한 인간이 지을 법한 미소라고 할 수 있었다.
―너, 혹시……. 아니다.
신수는 말을 하다 말았고, 칼릭스는 특유의 고요한 시선으로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흔쾌히 덕담을 말했다.
“좋은 일이네. 공녀의 숙원이 반드시 이루어지기를 바라.”
―네가 바랄 것도 없겠다. 이루고 말겠다는 열망이 드글드글하구만……. 뭐, 모쪼록 나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마.
“응원 감사합니다.”
그렇게 나는 도적질을 하기 전, 응원을 받았다.
* * *
사교계의 살롱과 클럽은 신탁 이전과 다름없는 듯하였으나, 겉보기로만 그럴 뿐이었다.
마치 백조처럼 물밑으로는 바빴다.
금방 발표된 신탁에 관한 이야기를 정신없이 주고받느라 말이다.
“역시, 선황자 전하이실까요?”
“모르는 일이죠. 아직 황제 폐하께서 젊으시니까요.”
“혹시 대공 전하일 가능성은요?”
“대공 전하든 선황자 전하든 중요한가요. 어차피 그 두 분은 한 세력 아니에요?”
그건 그렇다고 대답하는 귀부인과 비슷한 말을 하는 신사도 있었다.
“다들 기억하나? 아룬펠 설산 말일세.”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역시 나는 대공 전하가 맞는 듯싶네.”
무릇 권력가와 관련된 이야기는 단 하루만으로도 뜨겁게 달아오르기 충분했다.
그리고, 그 이튿날.
샤를리즈는 로나터스 후작저를 찾았다.
“어서 오세요. 공녀님.”
라베트가 환하게 웃었다.
“한 번 더 물을게. 정말 괜찮겠어?”
“저는 공녀님께서 부친의 의식을 찾아 주셨을 때부터, 그리고 부친께서는 공녀님께 드리기 위해 용의 둥지에서 물건을 빼돌리기 전부터 이미 공녀님의 편이었답니다.”
샤를리즈는 내심 흠칫했다.
고아한 귀족 영애 그 자체였던 라베트가 선택한 단어 하나가 귀에 박힌 탓이었다.
“라베트. 공부가 많이 힘들었니……?”
“가주 위란 배워야 하는 게 많은 자리지요.”
겸허하게 웃는 라베트의 뒤로 에리히가 슬그머니 나타났다.
응접실에 도착하고, 담소를 나누던 라베트가 아쉽게 자리를 뜬 후 샤를리즈는 곧장 물었다.
“뭐야.”
에리히가 커다란 봉투를 슥 밀었다.
“변명이지만, 어제 들은 말을 정리한 부분은 시간이 촉박했던 터라 다소 조잡합니다.”
‘늘 그랬는데.’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은 이유는, 원대한 숙원을 위한 위대한 한 보를 내딛기 전 부정 타지 않으려는 잔걱정에 불과했다.
“수고 많았어.”
‘진짜로 보고서만 받고 끝일 줄이야. 시간 낭비했군.’
그래도 라베트를 본 건 좋았다.
샤를리즈가 미련 없이 곧장 일어섰다.
“자, 잠시만요. 공녀님.”
“뭐야.”
별생각 없이 힐끔 시선을 내린 샤를리즈는 크게 흠칫해 얼른 눈을 치켜떴다.
에리히가 볼을 붉히고 있었던 것이다.
“늦었지만,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죄송하다는 말씀도요.”
누구나 조작하는 신탁은 위대했다.
“이제 와 그럴 필요 없어.”
제때제때 하지 늦은 건 받을 생각 없다는 뜻이었는데,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에리히의 목울대가 비 맞는 호수처럼 넘실거렸다.
끝내 고개를 푹 숙인 채 에리히가 한참 뒤 겨우 말했다.
“저를 용서해 주시고, 제 과오에 유념하지 않고 부친을……. 공녀님은 정말 좋은 분이십니다.”
견디지 못한 샤를리즈가 후다닥 탈출한지도 모르고 말소리가 몇 차례 더 허공을 공허하게 떠돌았다.
* * *
에리히 놈이 조사를 열심히 했다.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보고서를 읽으며 나는 인정했다.
“에리히는 하인이 체질 같은데 너무 좋은 집에서 태어났다.”
애가 좀 멍청해서 시종까지는 어렵다.
나중에 루카스가 자라 성인이 된다면, 그때는 루카스에게 일을 의뢰해야겠다.
‘후후후.’
나는 그때까지도 살아 있을 테니까.
신이 나 상체를 쭉 늘린 바람에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폭력 신수…….’
[―……신수는 도둑질하지 않는다.]
[그럼 당당하게 가져, 아, 아! 내가 잘못했어요! 신수는 도둑질 안 해!]
어제 칼릭스와의 대화가 끝난 후, 돌아가려는 신수를 붙잡고 한 부탁은 단칼에 거절당했다.
[―그래도 신전의 비밀 통로는 알려 줄 수 있다.]
그때 나는 눈물을 훔치며 괜찮다고 답했다.
신수에게 사정없이 옆구리를 찔리다 보니 생각난 게 있는 덕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