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신탁이 발표된 직후.
황제궁 시종들은 각자 눈을 질끈 감고 헛숨을 삼켰으나, 정작 안토니오 황제는 의외로 침착했다.
“황후를 추대해야겠다.”
“예? 하오나……. 황후 폐하께서 서거하신 지 아직 반년도 채 되지 않았…….”
전례 없는 일에 아연해져 횡설수설 대답하던 시종장이 죄송하다며 입을 닫았다.
“짐도 알고 있네. 다만, 신께서 아직 잉태되지도 않은 후계를 축복하실 정도라니 그 대단한 아이를 제국을 위해 조속히 만나고 싶어.”
시종장은 생각을 정정했다.
침착한 게 아니라, 거대한 태풍이 몰아치기 전의 적막함 그 한순간에 불과했다.
“하오면, 염두에 두신 가문은 있으십니까?”
안토니오 황제는 턱을 쓰다듬었다.
황비가 아니라 굳이 황후라고 말한 이유가 있었다.
‘그래. 애초에 별 볼 일 없는 가문이란 이유가 있어 그 정도에 머무르는 게지.’
추풍낙엽처럼 우수수 추락한, 그가 황비감으로 생각한 영애들이 속한 가문을 떠올리며 안토니오는 입 끝을 올렸다.
공교로운 우연이 겹치자 배후를 의심한 게 아니라 수호를 받는다고 생각한 이 자아 강한 남자는 분에 넘치는 가문을 기어코 읊었다.
“로나터스가 괜찮겠지. 위대한 후계의 모친이 제 가문에서 나온다니 후작에게 더없는 영광이겠군.”
* * *
“뭐라고?”
―황제가 로나터스에 청혼서를 보낼 예정이라고 합니다.
“뭐라고?”
―아가씨.
“뭐라고?”
―……주인님.
나는 그렇게 노아와 혼돈의 통신을 끊었다.
그러고는 중얼거렸다.
“뭐라고?”
이 미친 황제가 기어이 일을 저지르려고 했다.
잠시 뒤.
노아에게 부탁했던 대로 아드리안의 전서구가 창문을 톡톡 두드렸다.
“잘 다녀오렴.”
……아드리안의 전서구가 어떻게 로나터스 후작저를 아는지는 지나가기로 하자.
‘가만히 뒀으면 에리히가 정말 납치당했을 수도 있었겠어.’
물론 가만히 뒀으면 그 전에 내가 죽었을지도 모르니 아쉽진 않다.
‘어쩌면 마침 잘됐는지도 모르지.’
아직 살려 둔 리닉스 공작을 마지막 패로 쓰기 아깝지 않은 때였다.
나는 지하 감옥에 있을 리닉스 공작을 생각하며, 바나첼 후작에게 서신을 썼다.
그리고 테오도르로부터 아침 일찍 답신이 돌아온 날. 나는 폭식했다.
세 끼는 굶어도 괜찮도록 속을 든든하게 채우기 위함이었다.
* * *
신탁을 지체 없이 발표하기로 결정한 사람은 몹시도 당연하게 라우드였다.
‘해석될 여지가 괜찮아.’
신이 ‘광영’이라고 말할 법한 치하를 이룩할 수 있는 인물이 누구일까.
지금 당장은 그를 떠올리는 이들이 없을 터이나, 이후 퍼즐처럼 딱 맞아 들어갈 터.
이것이 설혹 신의 뜻이 아니라 할지라도 상관없다.
신의 진노는 두렵지 않다.
그랬다면 애초에 신성한 나무를 사적으로 사용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흑마법사들을 운용하려고 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아룬펠 설산에서 신의 철퇴를 맞아야 했을 사람은 단연 그였으나, 그럼에도 무사했다.
라우드가 빙그레 웃었다.
‘어쩌면 정녕 신의 뜻일 수도 있겠지.’
신은 본디 잔혹하며 냉혹하다.
그렇지 않다면 신전이 이토록 추락하도록 두고만 보았을 리가 없다.
그러므로 그가 행하는 ‘과정’은 신에게 있어 선뜻 눈감아 줄 수 있는 수준인지도 모른다.
한참 청사진을 그리던 머리는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에 현실로 복귀했다.
“들어오세요.”
“성하. 리엔타 공녀가 성하를 만나 뵈어야겠다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리엔타 공녀가요?”
살짝 눈매를 좁힌 교황을 보며 소년 신관이 조심스레 물었다.
“예. 오늘 이른 시간에 서신을 보냈다고는 합니다만. 어찌할까요?”
공녀를 만나기는 해야 했다.
그러나 선뜻 수락하기에는 걸리는 점이 많았다.
‘일단은 흑마법을 준비하지 못했기도 하고.’
결국 라우드는 썩 애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안해서 어쩌죠. 하필 서류 업무가 있어 꽤 기다려야 할 듯한데.”
신관이 놀라 고개를 마구 저었다.
“서신만 보내 놓고 막무가내로 방문한 공녀의 잘못이 아닙니까. 돌아가라고 하겠습니다.”
“만날 수 있으면 만났을 텐데, 아쉽게 됐어요.”
그리고 조금 뒤.
신관이 곤란하게 됐다는 얼굴로 들어왔다.
“저어, 리엔타 공녀가 기다리겠다고 합니다.”
“…….”
‘무슨 속셈이지.’
급하지도 않은 서류를 내려다보며 라우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이 원한다니 그러라고 하세요.”
“예. 성하.”
그렇게 신관이 서둘러 나가고, 서류를 처리하던 라우드는 불현듯 탄성 소리를 내었다.
“아.”
언제 멈췄는지 모를 깃펜 끝에서부터 잉크가 동그랗게 번져 종이가 엉망이었다.
“성가시게 됐네.”
입으로는 그렇게 중얼거렸으나 행동은 태연했다.
잉크가 번진 서류를 서둘러 옮겨 밑의 서류들이라도 보전하는 대신 라우드는 첫 번째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 놓인 것은 망가진 성물과 마른 피가 묻은 조각이었다.
검 한번 쥐어 본 적 없는 손이 성물을 쥐어 들고 다른 손은 단단하게 굳은 점토를 떼듯 몇 번 움직였다.
성물은 공고했고, 날카로운 단면에 긁혀 생채기만 났을 뿐이었다.
그 생채기는 그가 일어선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 결국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부드러운 인상을 가진 남자의 턱관절이 찰나 불거졌다.
고작 샤를리즈 리엔타를 만나기 전, 성물을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한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성물에 문제가 없어 불쾌했다.
* * *
교황을 생각보다 일찍 만나게 됐다.
황족의 피가 흐르는 대공을 한참 기다리게 만든 전적이 있으니 사흘은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사흘 동안이나 한나절씩 쫄쫄 굶을 생각 하니 슬펐는데, 다행인가.’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갑작스럽게 찾아뵈어 죄송합니다.”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 기다린 건가요? 몸도 좋지 않을 텐데.”
‘그때 일을 캐묻고 싶은 눈치군.’
나도 그랬다.
“며칠간 회복에만 집중해 많이 괜찮아졌습니다. 더 빨리 찾아뵀어야 했는데 송구합니다.”
“죄송하다, 송구하다. 어떤 일인지 알아야 내가 답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제 약혼자가 성하께 무례를 저질렀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대공과 제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지, 공녀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에요. 그보다는 많이 괜찮아졌다니 다행이네요. 공녀가 갑자기 혼절해 저도 많이 놀랐거든요. 그런데…….”
교황이 꼭 ‘이런 말을 해도 될지.’라고 얼굴에 쓰인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그런데, 대공은 놀란 눈치가 아니더군요.”
“아.”
“꼭 공녀의 약혼자를 음해하는 듯해 기분이 이상하네요.”
“그런 의미가 아니시라는 것을 압니다. 약혼자가 놀라지 않은 건 제가 가끔 기절하고는 해서 그런 걸 거예요.”
“가끔 기절한다고요?”
교황의 얼굴이 기묘해졌다.
그러라고 한 말이긴 하다.
잠시 침묵한 교황이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공녀가 태중에 있을 적부터 걱정했건만, 그래도 건강하게 자란 줄 알았더니 아니었나 보지요.”
“사실 제가 급하게 찾아온 이유는 무례를 사죄하기 위함만은 아닙니다.”
나는 결연한 얼굴을 해 보였다.
“더는 제 안위를 우선해 비밀리에 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황제 폐하께도 말씀드렸습니다.”
노아와 괜히 황제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눈 게 아니다.
황제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노아가 ‘그러고 보니’ 하며, 그 절대로 성사돼서는 안 되는 극악무도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사실은 제가 흑마법을 감지할 수 있답니다.”
교황의 얼굴이 미묘하게, 그러나 확실히 굳어졌다.
* * *
“사실은 제가 흑마법을 감지할 수 있답니다.”
신성력으로 흑마법을 알아챌 수 있다고 황제에게 고한 사람이 바로 라우드 그였다.
그랬기에 알았다.
저게 가능할 리가 없다.
동행한 평신관 둘은 일상으로 돌아갔으나, 바로스 대신관은 단 한 번도 흑마법을 감지하지 못했다며 대신관 자리를 내려 두려고 해 사람을 성가시게 만들었다.
대신관으로 올릴 이들이야 많으나, 대공에게 무례를 저지른 바로스를 직위 해제시킨다는 것은 대공을 위시한 선택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죠? 토벌에 동행한 대신관도 감지하지 못했는데 말이에요.”
이번에는 속내를 감추고 적절한 표정을 지을 필요가 없었다. 정말로 의문스러웠으니까.
“사실은 제가 리엔타 영지로 내려가기 전, 흑마법의 표적이 된 적이 있습니다.”
벌써 거의 일 년 전 일이었다.
흑마법사 개인의 일탈 혹은 의뢰를 당장 기억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충격이 컸겠어요.”
“지나간 일인데요.”
덤덤한 얼굴은 정말 저 말이 진짜인지 의심하게 만들었으나, 공녀는 애초 표정 변화가 드물었다.
표정 관리라고는 할 줄도 모르는데도 심중을 읽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지금처럼 흑마법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전이었던 탓에 은밀히 치료하느라 완벽하게 떨쳐 내지는 못했습니다. 지금은 그 덕택에 칼릭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공녀가 흑마법을 감지한다고?’
의문에 잠겨 있던 라우드는 뒤늦게 깨달았다.
공녀가 갑자기 이 사실을 밝힌 목적이 분명 있을 것이라고.
짐작해 대안을 마련해야 했는데, 갑작스러운 고백에 몰두하느라 멍청한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말씀하신 대로 성하께서는 제가 태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그러니 제 목숨의 일부는 교황 성하의 몫.”
샤를리즈가 매섭게 테이블 위를 쳐다봤다. 아무것도 없는 곳을, 마치 무언가가 있듯 말이다.
“공녀.”
무언가를 예감한 라우드가 저도 모르게 마치 가로막듯 샤를리즈를 불렀다.
그러나 샤를리즈는 기어코 말했다.
“저는 그때 수정 구슬을 보고 혼절했습니다. 처음에는 문제가 없었으니 누군가가 그사이에 감히 사악한 술수를 썼다는 뜻이겠지요.”
녹안이 번뜩였다.
“그러니 그 작자는 교황 성하의 측근일 가능성이 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