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잠시의 침묵 뒤 라우드가 썩 매끄럽게 웃었다.
“저를 염려하여 한 말임을 압니다. 하나, 그들을 그 이유만으로 축출할 수 없음을 알아주세요.”
물론 겉가죽은 그런 표정을 하고 있다고 해도 속내마저 그렇지는 않았다.
‘도대체 속셈이 뭐지. 내부 분열을 야기하기 위함인가.’
상대가 흘리는 조각 난 말을 통해서만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는 사실이 불유쾌했다. 자연히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래서 조금 더 깊이 웃었다.
샤를리즈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비록 완곡한 어법을 통해서라고는 하나 저가 펼친 주장이 정면에서 부정당한 직후라고는 생각도 못 할 태연함이었다.
“제가 억측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군요.”
“음. 그렇게 말할 것까지는 아니고요.”
가만히 눈을 내리깐 모습은 일견 기가 죽은 것으로도 보이나, 그러고 있는 사람이 샤를리즈 리엔타라는 점이 간과하지 못할 부분이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하지만, 결국 라우드의 선택은 같았다.
샤를리즈가 이상한 말을 흘려 대공이 신전과 성물을 의심하게 되는 일은 반갑지 않다.
권역 밖의 인간이 감히 관여하는 것은 생각만 해도 불쾌해졌으므로.
“그럼 수정 구슬을 한 번 더 보는 건 어떨까요?”
“시간이 흘러 흑마법이 흩어졌을 텐데요.”
“미량은 남아 있을 수도 있고, 무엇보다도 이김에 저도 한번 확인해 보고 싶어서 말이에요.”
라우드가 뒤늦게 미간을 살짝 좁혔다.
“아. 공녀가 또 혼절할 수도 있겠네요.”
“저는 괜찮습니다.”
“그럼 지금 가져오라고 말하죠.”
교황의 명을 받은 소년 신관이 부지런히 움직인 덕택에 수정 구슬이 담긴 함이 금세 도착했다.
“확인하기 전에 소파로 자리를 옮기는 편이 좋겠습니다.”
라우드가 의자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자칫하다 공녀가 크게 다쳐 칩거하게 되면 아쉬운 건 그였다.
* * *
나타났다. 내 목숨줄.
나는 정교하게 제작된 목재 함을 애틋하게 바라봤다.
내가 냉큼 일어난 이유는 교황의 말을 수락해서라기보다는 수정 구슬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졸졸 따라간 것에 불과했다.
“음.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당시에도 본 직후 혼절한 것이 아니라 시간이 조금 흐른 뒤였으니 지장은 없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렇다.
나는 수정 구슬을 보겠다는 열망만으로 시방 내가 뭔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다.
“그런가요?”
끝까지 애를 태운 교황이 수정 구슬을 꺼냈다.
‘너를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는지 알려 줘.’
어떻게 하면 내게 와 주겠니…….
이제 그려질 대답을 티끌 하나 놓치지 않을 기세로 바라본 순간.
‘어어?’
수정 구슬이 환하게 빛났다.
의식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목격한 교황은 지독히도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람 하나 죽여 증거를 없앨 생각을 하고 있대도 이상할 것 없는 기세였다.
‘괜찮다.’
나는 내 목숨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설령 교황이 날 죽여 입막음할 생각이라고 해도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뒷일을 부탁하마…….’
* * *
라우드는 잠시 눈을 감고 있기라도 한 듯 흐트러짐 없는 얼굴을 내려다보며 얼굴을 쓸었다.
‘흑마법을 감지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해하더니, 그저 운이었나.’
아니면 대공이 공녀를 속이며 방패막이 목적으로 쓴 것이라든가.
“공녀. 만약 혼절한 척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 대가는 공녀 혼자 치르지 않을 겁니다.”
평범한 사람은 듣는 것만으로도 움찔할 정도로 싸늘한 목소리였다.
이번에도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엄숙한 자세는 흐트러지고, 다리를 교차한 채로 라우드는 나직한 숨을 내쉬었다.
거리낄 것 없어진 시선이 수정 구슬을 향했다.
‘대공의 신성력이 예상한 만큼만 된다면, 굳이 이 방식을 이어갈 이유가 없지.’
그가 원하는 것은 완벽한 재건이었다.
단순히 재건이 목적이라면 직계 황족과 성혈도 모자라 이 방식까지 사용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실존하지 않는 존재를 믿음을 통해 존재하는 것과 다름없도록 만드는 것 말이다.
‘태초의 용.’
신전 깊숙이 위치한 은밀한 보고에도 그에 대한 기록은 언제부터인가 끊겨 있었다.
대신 얻게 된 정보는 바로 이 수정 구슬이었다.
선대 교황들의 시선에서 비껴가 창고 신세를 면치 못한 구슬은, 그래. 이 목적이 아니라면 굳이 필요 없는 성물이었다.
‘아니, 이것이 성물이라고 할 수 있기는 한가.’
차라리 우습지도 않은 연정의 결집이라고 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다이브 백작에게는 마치 그만 볼 수 있다는 듯 말했으나, 실은 누구나 볼 수 있으니까.
용이 사랑했던 인간처럼 신성력이 없는 이들에게.
어느새 수정 구슬을 한 손에 쥐어 든 라우드가 눈을 가늘게 떴다.
시선이 닿는 그곳에는 그의 얼굴만 희끄무레하게 비칠 뿐이었다.
그는 샤를리즈에게 말한 것과 달리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미련 없이 시선을 뗀 라우드가 손을 위로 올렸다.
흑마법에 잠식된 성물이 스스로 깨져 힘을 잃는다는 건, 그럴듯한 이유가 될 것이다.
막 내던지기 직전.
“성하.”
포물선을 그리던 손이 멈췄다.
“황제의 칙서가 도착했습니다.”
“하하.”
라우드가 거칠게 혼잣말했다.
“거짓을 말한 건 아니지만, 네 말은 결국 거짓이 되었으니 이 뒷감당을 어떻게 할 생각인지 궁금하네.”
대답 없는 그를 신관이 한 번 더 애타게 불렀다.
“성하.”
“선객이 있으니 기다리라고 하세요.”
신 앞에 감출 건 없어야 한다는 목적 아래 의도적으로 방음이 부실한 공간이다.
수정 구슬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샤를리즈의 눈꺼풀이 올라갔다.
라우드가 입매를 비틀었다.
“그리고 공녀와 동행한 기사를 불러오세요. 공녀가 혼자 돌아가기는 다소 힘들 것 같으니.”
흐릿했던 녹색 눈동자는 몇 번 깜빡이는 것만으로 금세 또렷해졌다.
라우드가 애석한 얼굴로 긴 숨을 뱉었다.
“공녀의 추측이 어느 정도는 맞았네요. 성물에 안타깝게도 수작을 부린 자가 있는 모양입니다.”
“…….”
“성물을 정화하는 의식이 필요하겠어요. 흑마법에 물들어 있어도 가능할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이대로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에요.”
“그보다는.”
길지 않다고 해도 혼절했던 탓일까. 잠겨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게 주십시오.”
라우드의 눈에 불쑥 빛이 깃들었다.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저는 흑마법을 추적해야만 하고, 흑마법에 물든 물건은 쉽게 구할 수 없으니까요.”
연결하는 고리가 빠진 듯 불완전한 문장이었다.
성가신 대화에 저도 모르게 눈매를 찌푸린 라우드는 돌연 벼락같은 깨달음을 얻었다.
‘잠시만.’
감지가 아니라 추적이라고 했다.
“공녀, 그 말이라 함은.”
“흑마법을 감지하고 혼절하면, 무언가가 보입니다.”
“무엇이 보인다고요.”
라우드가 빙그레 웃었다.
“제게는 말할 수 없는 내용인가요?”
* * *
이번에는 의식이 이상한 세계로 날아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속칭 ‘꿈’ 속의 샤를리즈 몸에서 눈을 뜨지도 않았다.
나는 실존하지 않는 세상에 있었고, 그 세상의 정체를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여긴 교황의 바람 속이라고.
그래서 이제 알 것 같았다.
이전에 궁금해했던 의문 말이다.
왜 선황비는 데려가고 사샤는 길에 버려둔 걸까.
돌이켜보면 간단했다. 너무 간단해서, 그래서 오히려 생각이 닿지 않았을 뿐.
‘세상에 버림받은 아이를 구원한 행세를 해서, 맹목적으로 따르게 만들기 위해.’
신성력의 개화는 본인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므로.
안다. 교황은 그저 계획만 했을 뿐이다.
나를 깨울 해독제를 빌미로 리엔타 공작을 농락하다 자금을 빼앗지도, 그의 목숨을 앗아가지도 않았고, 사샤에게 죽는 것보다 힘든 삶을 살게 하지도 않았다.
현실이 된 건 없다. 상상은 본인 마음이다. 그런데.
‘우리 가지고 그런 생각한 거, 빡치는 것도 내 마음이다.’
환생을 깨닫기 전에 못되게 살아서 다행이다. 이제 와 착하게 산다고 죽으면 좋은 곳으로 갈 일도 없으니, 새벽에 베갯잇을 적실 일 없이 나쁜 짓 할 수 있겠다.
“공녀. 대답할 수 없는 물음이었습니까?”
“아시지 않나요.”
“내가 알고 있다고요.”
교황이 곱씹듯 중얼거렸다.
그리고, 테이블을 짚은 손이 실수인 듯 수정 구슬을 쳤다. 아래로 추락한 구슬이 깨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어차피 덤처럼 얻은 인생. 굽신거리며 구슬리느니 등골 서늘하게 만들어서 밤잠 설치게 하겠다.
“이런. 실수를.”
교황이 탄식을 흘리는 대신 웃었다.
“―이라고 해야 할 테지만, 공녀. 기억하세요. 이렇게 적의를 드러내봤자 공녀에게 좋게 돌아가는 일은 없으리라는 사실을.”
교황은 나를 겁박하고 있다.
‘겁먹었군.’
“이런 친절도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감사하다는 말씀은 드리지 않겠습니다. 피차 친절했으니 말입니다.”
교황이 미소를 거뒀다.
인상 더럽기로는 나도 어디 가서 뒤지지 않는다.
“그럼 이만.”
그리고 걸음을 뗀 순간이었다.
데구루루―
나는 조금 웃었다.
그 남자는 이것을 신물이라고 불렀다.
그래, 신의 물건을 한낱 인간이 망가뜨릴 수는 없는 법이었다.
* * *
엘루이든 대공저에 도착한 마차에서 내린 사람은 테오도르 바나첼이었다.
단순히 지체 높은 귀족의 저택에 드나들어 긴장한 것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지나치게 굳은 주군의 얼굴에 동석한 기사는 잠시 의문을 가졌으나 곧 지워냈다.
아무리 막 성인이 됐을 무렵 후작위에 오른 인물이라도, 대공을 대면하는 일은 긴장하지 않기가 힘든 것이었다.
혈통과 능력, 게다가 이제는 신의 비호를 받는다는 것까지.
“먼저 돌아가게. 대화가 길어질 것 같아.”
“기다리겠습니다.”
“귀택해.”
그리고 젊은 후작은 성큼성큼 멀어졌다.
뒤에서 지켜보는 기사의 심정은 안중에도 없이 테오도르는 떨리는 손을 주먹 쥐어 감췄다.
엘루이든 대공저의 내실에서 소규모로 진행되는 즐거운 만찬에 후작을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