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말문을 연 테오도르는 이내 후회했다.
‘내가 왜 그랬지.’
대공이 그들의 합의를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도 모르니 제대로 된 해명은 애초 어렵다.
그 전에, 해명해야 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 얼버무리는 것이야말로 가장 이상했으므로 테오도르는 짤막한 침묵 후 입을 뗐다.
“공통의 목적으로 서로 협조하는 관계입니다.”
“바나첼 후작.”
“예, 대공 전하.”
“무엇도 염려하지 않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미려한 얼굴의 남자가 짧게 웃었다.
다시 후원의 정경을 응시하는 눈은 진정으로 무심했다.
미술품을 감상하듯 느긋한 기색이었으나 웬만한 용건으로는 돌아 세우기 어려울 견고한 분위기였다.
물론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바스락.
시든 잎사귀를 밟은 소리가 들린 순간, 다소 지루해 보이던 듯한 벽안이 빠르게 화사해졌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야. 그보다 대화는 끝났어?”
“같은 용건으로 재방문하는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짤막한 대화 후, 샤를리즈가 테오도르에게 눈짓했다.
“미안, 후작. 오래 기다렸지?”
“아닙니다. 공녀님. 제가 일찍 도착한 것을요.”
“아니야. 내 부족함 때문에 오래 기다리게 했어. 음. 그런데 이를 어쩌지.”
샤를리즈가 번쩍 목 뒤를 젖혀 하늘을 쏘아봤다.
테오도르는 어쩐지 그 행동이 부자연스러운 것 같다고 생각했다.
눈을 내리깐 채 찻잔을 기울여 차를 마시는 대공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지만 말이다.
“잠깐 사정이 생겼어. 그런데 더 기다리게 하기는 미안하고, 먼저 가 있겠어?”
샤를리즈가 은밀하게 무언가를 건넸다.
“그리고 이거.”
엉겁결에 받아 든 테오도르는 뒤늦게 그것을 확인했다.
“…….”
채찍이었다. 가장 흔한 소지자는 마부일 것이다.
테오도르의 얼굴이 희미하게 일그러졌다.
그것을 눈치챘는지 아닌지 샤를리즈가 어서 가지 않고 뭐 하냐며 고갯짓했다.
특유의 뚱한 표정을 잠시 응시한 테오도르는 별말 없이 돌아섰다.
다만, 샤를리즈로부터 받은 물건을 쥔 손마디가 희었다.
* * *
테오도르 바나첼이 충분히 멀어졌을 무렵, 칼릭스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웃지 마십시오.”
“미안해, 샤를리즈. 이미 그랬어.”
이래 봬도 리엔타 공작저에서 한 손에 꼽히는 연기력을 보유하고 있건만 처절하게 무시당했다.
당신이 나보다 잘하냐며 반박할 수 없어 슬펐다…….
“같은 용건으로 다시 갈 일이 없다는 건, 목적을 이룬 건가?”
“흠.”
나는 주변을 샥샥 훑었다.
칼릭스가 순순히 실토했다.
“아무도 없어.”
“예? 검은밤의 기사도 말입니까?”
칼릭스가 유순하게 그렇다고 답했다.
뒷골을 잡은 나는 일단 가장 중요한 것부터 말하기로 했다.
“기사를 꼭꼭 대동해서 다니시라고 했잖습니까!”
칼릭스가 은근히 시선을 피했다.
“더 중요한 대화가 있지 않아?”
“이게 가장 중요한데 무슨 말씀이세요.”
“…….”
그러자 고운 눈매가 살짝 찌푸려졌다.
‘저렇게 주름이 생겨도 어여쁘겠군.’
“샤를리즈. 이 이야기는 더 하지 않는 게 좋겠어. 이러다가 토벌대에도 기사를 데려가지 않을 것 같거든.”
“무슨 그런 무서운 말씀을.”
같이 진지해진 나는 즉각 이 안건을 폐기 처분하고 대화의 궤도를 원래대로 틀었다.
“방문 목적은 이뤘습니다.”
“빠르네.”
칼릭스가 나직이 감탄했다.
곧장 입을 다시 열었다. 절대 뽐내고자 그런 게 아니다. 그 자리에 없던 칼릭스를 위해 세심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기 때문일 뿐이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 * *
샤를리즈도, 황제의 칙사도 돌아갔다.
그러나 라우드는 그의 침소나 기도실로 복귀하는 대신 여전히 응접실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산산이 깨진 조각이 하나로 모였다는 건, 즉 시간이 돌려졌다는 뜻이다.
그래, 오래된 성물이 아직도 그 정도 힘을 간직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수정 구슬이 나뒹굴었던 지점을 내려다본 눈이 이윽고 칙서를 향했다.
……그러므로, 샤를리즈 리엔타에게 최대한 협조할 것을 황제의 권한으로 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