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편하게 하라며 칼릭스가 먼저 돌아가서, 어느새 어두워진 하늘 아래에는 테오도르와 나 둘밖에 없었다.
테오도르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나는 그러지 않았다.
‘감옥에서 나오면서 그러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속이 시원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만은 않네요.”
“당연하지. 후작의 방식은 너무 정숙해.”
“……제가 정숙하다기보다는……, 아닙니다.”
테오도르가 한숨을 쉬었다.
“공녀님은 허탈하지 않으십니까?”
나는 테오도르를 쳐다봤다.
그는 아무것도 없는 맞은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가 있는 것처럼 아래로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말이다.
“저는 허탈하고, 힘이 없던 그때의 제가 참 밉습니다.”
“너무 미워하지 마. 그 애가 열심히 살아서, 이렇게 가족의 원수도 갚았잖아.”
잠시 말이 없던 테오도르가 늦게 중얼거렸다.
“그런가요.”
“이런 기분일 때는 일찍 자야 하는데. 어서 돌아가.”
“잠이 들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인데요.”
“그렇다면 내가 도와줄 수 있어.”
손가락을 바짝 붙여 끝을 날카롭게 세워 보이자, 테오도르가 또 웃었다.
웃음이 헤퍼진 게 아무래도 정신이 빠져나간 증거 같다.
슬쩍 그의 목을 쳐다봤다. 어떻게 알았는지 테오도르가 제 목덜미를 내 시선에서 감추듯 손으로 가렸다.
“이럴 때는 보통 밤새 함께 술을 마시자고 하던데 매정하십니다. 그래도 공동의 목적을 가진 동지였는데 말이지요.”
그러더니 빠르고 신속하게 덧붙였다.
“저는 대공 전하와 공녀님의 순항을 기원하며, 두 분 사이에서 태어날 아이의 대부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오.”
확고한 목적이 있는 사람은 쉽게 죽지 않는 법이다. 내일 테오도르 바나첼의 부고를 받을 확률이 줄어들었다.
“대부 자리는 약속 못 하지만, 다른 건 할 수 있어. 다음에 뒤통수 맞는 일 생기면 내게 연락해. 바로 갚아주면 속앓이하는 시간은 줄어드니까 지금보다는 낫겠지.”
“이래 봬도 후작이라 혼자서도 잘 할 수 있습니다.”
테오도르가 피식 웃었다.
“알아. 그래도 둘이 하면 더 낫잖아.”
“……사실, 공녀님께서 도착하시기 전에 대공 전하께 공녀님과 제 사이를 변론하려고 했습니다.”
허공에서 그리운 시선을 천천히 떼며 테오도르가 눈매를 조금 찌푸렸다.
“왜 그랬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만 지금은 알겠습니다. 대공 전하의 오해를 사서, 공녀님께 내쳐지고 싶지 않아서였나 봅니다.”
그 얼굴을 보며 나는 무심코 생각했다.
‘흑막의 반대말이 뭐지?’
아무튼, 원작에서 악당의 편에 붙었던 불운한 남자가 물었다.
“뒤통수 맞지 않아도 연락드려도 되겠습니까?”
“……대부를 욕심내려면 보통 사이를 더 돈독하게 만들어야겠다고 다부지게 결심하지 않아?”
사람이 기껏 진지하게 물었더니 작게 소리 내어 웃은 테오도르가 여전히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네요.”
* * *
칼릭스의 집무실로 향하기 전.
나는 사샤의 방문을 두드렸다.
토독토독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문이 살짝 열렸다.
그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민 아이가 기쁘게 웃었다.
“샤를 님!”
나는 여전히 작은 체구를 한 품 가득 끌어안았다.
“이제 나쁜 꿈은 꾸지 않아?”
“네. 이제 없어요.”
“이상한 목소리는?”
“꿈에서만 들렸으니까 이것도 이제 없어요.”
“가장 좋아하는 친구는?”
귀 옆에서 아이가 쌔액 숨을 들이마셨다.
“샤를 님이에요.”
아이와 같이 엘루이든 대공저로 찾아간 첫 번째 날이 문득 떠올랐다.
‘마차에서 내려서 바래다줄걸.’
그때 제 발로 마차에서 혼자 나선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나도 모르게 사샤를 세게 껴안았나 보다. 아이가 걱정스레 물었다.
“샤를 님?”
“앞으로는 행복하게만 해 줄게.”
‘꽃이든 돈이든 권력이든 모두 사샤의 앞길에 깔아줄 테다. 적도, 위협도 모두 처단하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그것을 가져야 할 것이다.
한껏 비열하고도 못돼먹은 생각에 열중하고 있는데, 사샤가 몸을 꼼지락거렸다.
불편했나 싶어 팔을 내리려던 때였다.
“저는 오래전부터 행복했는걸요.”
“…….”
“리반이 준비해 준 일기장이 아주 두꺼웠는데요, 곧 마지막 장까지 다 쓸 것 같아서 새로 부탁해야 할 것 같아요.”
비밀 한 조각을 알려주듯 수줍게 아이가 말했다.
“그럼……. 앞으로도 지금처럼 살자.”
“네.”
언제부터였을까.
아이가 해사함과 비슷하게 웃는다.
어렴풋이 생각해 보곤 했던 미소는, 상상보다도 현실 속에서 훨씬 더 반짝거렸다.
* * *
칼릭스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대신 말했다.
“리닉스 공작의 뒷일은 내게 맡겨 줘.”
그가 가볍게 웃었다.
“이러려고 황족으로 태어났나 봐.”
나는 괜찮다느니, 내가 하겠다느니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명확하게 나누지 않아도 되는 사이였다.
“교황으로부터 받아온 성물이 이겁니다.”
“성물을 보고 질문하면 그 해답을 알려준다고.”
“예. 그런데 능력 밖의 것은 안 되나 봐요. 그냥 제 얼굴만 보여주지 뭡니까.”
“신전 밖으로 반출이 가능할 정도라면 강력한 성물은 아닐 테지.”
칼릭스가 성물이 담긴 함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그래도 성물이니 신성력이 있을 텐데 그다음에 나를 봐도 괜찮겠어?”
‘어…….’
그간 많은 일이 있어 잊고 있었다.
이 성물을 보고 답을 얻은 날, 칼릭스를 마주하고도 기절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이미 답을 얻고 칼릭스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번에도 괜찮을 것 같아요.”
칼릭스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나는 의문스럽게 중얼거리며 함을 열었다.
“신물이라서 다른 걸 수도 있겠습니다.”
“신물?”
“네. 신물이라고 하던데요.”
“누가 그렇게 말했는데?”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었다. 남자의 정체를 모르기 때문이다.
‘아주 옛날 옛적 인간이 아닌 남자가 그렇게 말했다고 답하는 수밖에.’
함에 담긴 수정 구슬을 꺼내 두고 고개를 든 나는 얼굴을 기울였다.
“알고 있는 물건이에요?”
칼릭스가 고요히 웃었다.
“응. 아주 오랜만에 보네.”
“교황이 빌려준 거라서, 돌려달라고 하기 전에 해치워야 합니다.”
나는 눈에 힘을 빡 줬다.
“이거, 제 목숨줄이거든요.”
이게 왜 목숨줄이냐고 묻는 대신 칼릭스는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어딘지 어지러운 듯해 걱정스레 쳐다봤는데 착각이었나 보다.
평연한 어조로 칼릭스가 대답했다.
“그래. 그러자.”
* * *
비슷한 시각.
리엔타 공작저.
한때 총사령관의 직무를 수행했던 인물들이 모두 모여 며칠에 걸쳐 진행된 회의가 파한 후, 황성에서 귀환해 여느 때처럼 저택에서 칩거 생활을 즐기던 공작에게 때아닌 손님이 들이닥쳤다.
바로 황제궁의 시종장이었다.
“이야기는 모두 끝마치셨습니까.”
“그래. 일단 오늘은 말이지.”
갑작스러운 방문에 죄송하다는 말로 서두를 연 시종장은 그 말이 빈말임을 증명하듯 몇 시간을 캐묻고 돌아갔다.
주된 흐름은 당연하게도 샤를리즈와 흑마법이었다.
[아버지. 저는 이런 말을 황제에게 하려고 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아버지의 연기력을 알고 있으니 마음 가는 대로 하십시오.]
많은 것을 물어볼 시간이 없음을 알았다. 하지만 괜찮았다.
어차피 궁금한 것은 오직 한 가지뿐이기 때문이다.
[샤를, 너는. 너는 괜찮은 게냐?]
[아버지. 이건 위험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살기 위한 선택이니 아무것도 염려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벨리악은 샤를리즈의 선택을 그 무엇도 염려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선황자 전하께서 아직 어리신 것이 걱정이로군.”
“대공 전하께서 건재하신데 무엇이 걱정이십니까.”
“그런가. 그렇군.”
애초 그는 평판이 바닥을 뚫은 자식을 둔 아비였다.
그러니, 권력을 잡기 위해 조카를 앞세워 황위를 찬탈한 섭정이 자식의 약혼자인 것은 간지럽지도 않을 것이다.
벨리악 리엔타는 정원 너머를 바라보았다.
장으로 시작해 인으로 끝나는, 한 번에 이어서 말할 수 없는 그 단어를 외면하며 말이다.
* * *
그는 눈꺼풀을 올렸다.
수정 구슬을 본 순간, 기억 하나가 돌아왔다.
[뭐가 문제지? 신물만 찾으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러면 해결돼.]
특유의 오만한 듯하면서도 장난스러운 미소는 아주 잠시 본 것만으로도 눈꺼풀 아래 아로새겨져 이렇게 불쑥 시야를 잠식했다.
환생을 반복하는 동안 그녀의 얼굴은 매번 조금씩 달라졌지만, 첫 번째 생은 샤를리즈를 많이 닮았다.
‘신수의 추측과 달리 신성력이 나를 보호하기 위해 기억을 지운 게 아니라면.’
세계의 균열을 파악하고자 했지만 어쩌면 당연하게도 실패했다.
그의 예상이 맞다면, 파악할 수 있는 존재가 없을 테다.
영생을 끝내기로 결심하고 곧바로 실행했으나, 그녀가 환생을 몇 번이고 반복할 시간이 걸렸을 만큼 힘이 지겹도록 많았으니까.
그러니 애초 균열은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정신이 붕괴하지 않도록 막은 게 아니라면, 이것도 설정해 둔 거겠지.’
기억할 수 없도록 말이다.
왜일까.
스스로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조처라기보다는 후자라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그건, 아마도 그 선택을 한 것이 자신이기 때문일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