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글쎄. 생각해 본 적이 없네.”
고심한 칼릭스가 느리게 말했다.
“선황제 폐하의 유지가 우선이었거든.”
그거라면 얼추 알고 있다. 아들을 부탁하고, 몸 사리며 살라는 내용이었다.
‘선황제는 안토니오의 야욕을 이미 알고 있었나 봐.’
황위에 오르기 힘든 어린 동생에게도 단단히 당부했다. 안토니오가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는 혈연의 목숨도 앗아갈 수 있는 종자라고 짐작하고 있던 거다.
그때, 칼릭스가 말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래. 돌려주고 싶다는 생각도 들어.”
한때 칼릭스가 바다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기를 간절히 고대한 적이 있었는데, 진짜 그랬다.
진짜 그렇다니 나는 속이 터졌다!
속으로 ‘아이고, 이 착해 빠진 사람아.’ 하며 가슴을 퍽퍽 두드리기 전, 나는 물었다.
이왕 두드릴 거 한 번에 해치우는 게 낫겠다는 생각의 발로였다.
“그럼 찬탈은 왜 결심하신 겁니까?”
“지붕이 크고 견고해도 빗발치는 빗줄기를 모두 막을 수는 없더군.”
결국 지키기 위해서라는 뜻이다.
원작에서도 근본적인 이유는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사샤도 사샤지만, 이리안을 황후랑 샤를리즈가 합작해 괴롭혀 댔으니…….’
숙연해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질문은 끝이야?”
“예.”
“그럼 이번에는 내가 질문해도 될까.”
나는 눈을 깜빡였다.
심연의 것처럼 깊으면서도, 동시에 표면의 것처럼 흔들리는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 * *
늦은 밤.
내게도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천장만 쳐다보는 날이 오게 될 줄은 몰랐다.
‘신물을 운운한 사람의 정체를 알고 있느냐고.’
[남자이고, 오래전의 존재에다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때 나는 말했다.
정체를 알고 싶다면 알아 오겠다고.
칼릭스는 궁금하지 않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공녀가 궁금하다면 그렇게 해.]
“흠.”
‘꼭 아는 사람이지만 사이가 무척 안 좋은 것 같은 느낌.’
그 남자는 인간이 아니니 아주아주 오래 살아서 칼릭스와 만났을 수도 있겠다.
“수정 구슬을 백 년만 빌려주면 안 되겠냐고 매달려 보려고 했는데, 좀 어렵겠군.”
눈앞이 흐려지는 게 눈물 때문인지 수마에 잠겨 들고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후자라고 치자.’
흑.
계속 눈을 감고 있는 사이 잠이 들었는지 눈꺼풀을 올리자 어느덧 해가 떠 있었다.
부스럭부스럭 일어나 멍하니 앉아 있던 도중, 테이블에 외따로 놓인 편지 봉투가 시야에 들어왔다.
‘저거 혹시…….’
후다닥 달려가 확인한 발신인은 과연 내가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맞았다.
[필리엄 백작가 소유의 선박에서 의문의 화재 사고가 발생합니다. 취급하는 물품은 모두 귀족들에게도 고가에 속하는 가격대뿐이니 완벽 범죄를 노린 절도로 의심한 백작은 직접 조사에 나섰고, 의문의 잿더미를 보게 되는 거죠. 전소되었다고 생각해 돌아섰지만 계속 마음에 걸린 백작은 다시 그곳으로 향하고, 그을린 나뭇가지를 발견합니다.]
[그때 내가 할 대처도 공녀님께서 생각하신 게 있으실 듯한데.]
[저번에 허가받지 않은 나뭇가지를 여럿 발견했건만, 이번에도 그렇다니 수상쩍지 않을 수가 없다며 경비대에 신고해 주세요.]
[그리하지요.]
[감사합니다.]
[그런 말씀 하실 것 없습니다. 이 정도가 뭐 어려운 일이라고요.]
필리엄 백작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내부 반발도 있을 테고, 고작 나뭇가지를 문제 삼아 신고한 백작에게 여러 말이 나올 게 틀림없다.
[정 마음에 걸리신다면 제 손녀의 샤프롱을 해 주시는 건 어떠십니까?]
……사실은 이게 가장 말이 많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런데 아리아도 지금은 나 꺼림칙할 테니 샤프롱 할 일은 없겠지.”
‘다행이군. 다행이야.’
필리엄 백작저는 드나드는 객이 원체 다양해 마차의 문장만 숨기면 슬쩍 출입하는 건 티도 안 난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미리 기다리고 있다가 툭 튀어나온 아리아와 얼떨결에 몇 번 대화하다 보니 좀 친해졌다.
어찌 보면 내가 자연스럽게 친해진 유일한 상대라고 할 수 있었다…….
이제는 사이가 엄청나게 멀어질 예정이지만 말이다.
[밖에서도 공녀님 뵈면 인사해도 돼요?]
[아니.]
[왜요!]
샤를리즈의 낯짝을 앞에 두고 보기 드문 기세에 나는 조금 위축되어 대답했다.
[내 평판을 한번 알아보고 결정해 봐…….]
사교계를 쥐락펴락하겠다는 원대한 꿈이 있는 아가씨이니 나를 알아서 멀리할 것이다.
추신. 수도 경비대로 사건이 이관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