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흑마법 말고 더 되겠냐.”
칼릭스가 교황을 의심하는 기색을 폴폴 흘리고, 내가 흑마법을 감지할 수 있다고 하는데도 교황은 집단을 해산하지 않았다.
아니, 해산할 수 없다.
“흑마법으로 금제를 유지하고 있으니까.”
진짜 수장이 교황이었다는 비밀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 죽어 없어졌다고 하나, 교황은 혹시 모를 가능성을 좌시할 수 없을 것이다.
‘결실이 목전인데 변수를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지.’
“흠.”
잠시 생각한 나는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깊은 호수의 자그마한 변화를 눈치챌 즈음은 실상 호수가 모두 바뀐 뒤다.
선황비가 칩거를 깬 것은 그 무렵이었다.
그녀는 가장 먼저 선황제가 안치된 곳을 찾았다. 표정은 밝지 않았으나 꽤 건강해 보였다고 한다.
“이렇게 교황을 자꾸 움직이게 만들어 미안합니다.”
안토니오 황제가 눈매를 살짝 구겼다.
“여유가 되는 사람이 움직이면 되는 것이지요.”
교황의 대답에 안토니오는 속으로 코웃음 쳤다.
‘달관한 듯 여유로운 체하나 엘루이든을 꺼리는 것은 교황도 마찬가지.’
선황비도 모자라 칼릭스도 제거하고자 한 게 그 방증이다.
비록 전자는 제대로 착수하지도 못하고 공중분해 되었으며, 후자 역시 실패했지만.
그러니까, 신전의 우두머리로 군림해봤자 교황도 별것 아니란 거다.
안토니오가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칼릭스 너는 대체 선황비를 어떻게 써먹으려고 하는 게냐.’
비밀이란 별 게 아니다.
누구도 진실을 입에 담을 수 없으면 그게 비밀이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완벽한 비밀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선황비가 흑마법의 피해를 보았다고 굳이 밝힌 게 수상쩍었다.
‘흑마법사를 토벌하기 위해 칼릭스가 수도를 떠난 그때가 바로 적기였거늘!’
선황비를 어찌나 꼭꼭 숨겨 두었는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다시금 아쉬움을 곱씹으며 황제는 닷새 전을 떠올렸다.
교황이 그를 찾아온 그날 말이다.
[리엔타 공녀가 흑마법을 감별할 수 있다고 제게도 말하던데.]
의문점이 많긴 했다.
[흑마법이란 간교해 마치 이지를 가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저번 토벌에서, 대신관도 흑마법의 꼬리를 잡지 못했지요.]
귀환하고 곧장 황제를 찾지 못한 이유가 그것이었다며 말하는 얼굴은 여느 때처럼 온유했다.
[제가 흑마법사를 찾을 수 있었던 것도, 지금은 사망한 리닉스 공작의 조언과 더불어 이전에 이미 은밀히 수색한 나날이 있던 덕택입니다.]
리닉스 공작은 사설 도박장 근처에서 흉측한 꼴로 객사한 채 발견됐다. 한 푼도 없음에도 버릇을 못 고치고 판에 끼어들어 그런 꼴을 본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칼릭스는 그 죽음에 리닉스 공작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 제 탓도 있다며 조의금을 넉넉하게 건넸다고 한다.
‘보호라니 우습지도 않지.’
유르겐 리닉스는 저것을 자본으로 또 사업을 시작해 볼 요량인 듯하나 이번에도 실패해 아까운 돈만 날릴 게 뻔했다.
뭐, 이제는 상관없는 가문의 사정이었다.
[수색이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신께서 여전히 제국을 굽어살피고 계신 모양입니다. 다만, 제가 수색을 시작한 때는 공녀가 이미 수도에 없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며 교황은 다소 난처한 기색으로 말을 아꼈다.
[공녀가 흑마법의 피해를 입어 치료하는 과정에서 제대로 치료하지 못해 흑마법을 감지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 부분이 걸리네요.]
[그 말이라 함은…….]
[대공의 환심을 사기 위해 거짓을 말한 것이라면 다행이지만, 아니라면. 왜 굳이 흑마법을 품고 있다고 말했을지.]
교황은 샤를리즈가 흑마법사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건……, 썩 괜찮은 모양새였다.
“묻고 싶은 게 있어 기별을 보냈습니다. 혹, 신성한 나무라고 일컬어지는 것을 아십니까?”
안토니오가 이번은 진심으로 눈을 찌푸렸다.
“이미 사용된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사용하는지, 어떤 목적으로 사용되는지 조사하고 있건만 진척이 없어요.”
“신전의 도서관에서 본 기억이 있습니다.”
라우드가 대수롭지 않다는 어조로 대답했다.
“신성 왕국의 멸망과 함께 신성력을 품은 무수한 식물들이 이 땅에서 사라졌음에도 그 나무와 튜베롯 꽃만이 생존했다고요. 그런데, 어째서 황제께서 친히 물어보시는지.”
“이제부터는 황실 1기사단이 조사의 주체가 될 텝니다.”
만약 이때 안토니오가 라우드를 바라보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위화감은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라우드의 표정은 조금도 미동이 없었기 때문이다.
샤를리즈의 주장이 진짜라고 하더라도 거짓으로 만들겠다는 작정으로 그녀가 흑마법사라는 의혹을 제시했을 때도 상황에 꼭 걸맞은 표정만을 짓던 남자답다고 할 수 있었다.
“신성한 나무가 갑작스레 등장한 것이 아무래도 수상해서 말이지요.”
“이 일에 신전의 협조를 요청하고자 함이라면, 당장 대답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 만남을 연 사람은 안토니오였으나, 끝을 지정하는 건 라우드였다.
“긍정적으로 고려해 보겠다는 말씀은 드릴 수 있겠군요.”
* * *
“에라이.”
이건 결코 친절하게 편지를 써 준 필리엄 백작에게 내뱉은 나쁜 말이 아니다.
“신전과 로나터스가 안 좋게 얽히면 손 떼지 않을까 했던 기대가 벌써 박살 났다…….”
사건이 황실 기사단으로 이관되었으니, 황제야말로 직접적으로 얽히게 되는 셈이었다.
적당히 위세 높은 귀족가가 황제의 요청을 무시할 수 있는 기간이 얼마나 되겠는가.
‘넉넉하게 잡아 석 달도 힘들겠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이마를 검지로 눌렀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또 서신이 도착한 모양이다.
“들어와.”
물리적인 수단을 통해 이번에도 꽤 좋은 생각이 툭 튀어나오기를 기대하며 손끝에 힘을 실었다.
“왜 그러고 있어.”
들어온 사람은 레아는 아니었으나 서신 한 장을 들고 있는 건 맞았다.
칼릭스는 머리통 무게를 힘겹게 받치고 있는 검지가 가엾어 보였나 보다.
서늘한 손바닥에 이마를 기울인 채 나는 토로했다.
“라베트가 이러다 결혼하게 될까 봐 걱정입니다.”
“로나터스 후작을 조금 더 믿어 봐.”
이럴 때 가장 만만한 건 역시 이혼을 전제로 한 계약 결혼인 법인데, 계약을 지킬 괜찮은 남자도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그 생각을 내가 중얼거렸는지 아니면 또 읽었는지 칼릭스가 적당한 사람을 입에 올렸다.
“바나첼 후작은 어때?”
“계약 결혼은 가장 나중 선택지입니다.”
나는 당장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자 칼릭스가 조금 웃었다. 턱을 손등에 괸 그가 가늘어진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뭐냐는 눈빛을 보내자 칼릭스는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음.”하고는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그럼 내게 오십 년 후 결혼을 전제로 청혼한 것도, 가장 마지막 선택지였어?”
“예.”
그때는 참 인생이 고달팠는데, 지금도 비슷하다는 게 참 서글픈 부분이었다…….
“……너무 즉답이라 왠지 상처받은 기분이야.”
장난스러운 말이었으나 모두 장난 같진 않아서, 나는 진지하게 위로를 건넸다.
“지금은 아니니까 상처 안 받아도 됩니다.”
“음, 고마워.”
칼릭스가 웃었다.
“지금도?”
그리고는 물었다.
“지금도 그래, 샤를리즈?”
눈을 깜빡였다.
‘생각해 보니 그렇게 고달픈 인생도 아니군.’
고개만 돌리는 간단한 일로 안구 복지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는 깨달음을 얻은 덕택이다.
나는 비장하게 대답했다.
“지금은 아닙니다.”
“그럼, 모든 일이 끝…….”
“자, 잠시만요!”
허겁지겁 칼릭스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이거 완전 데드 플래그잖아!’
내 행태에 놀란 듯 조금 눈을 크게 뜬 칼릭스에게서 조심조심 손을 떼며 경건하게 말했다.
“미래의 일은 미래에 말해야지, 미래에 못 할 것처럼 지금 말하면 안 됩니다. 그게 규칙이에요.”
“규칙?”
“몹시도 신빙성 있는 규칙입니다.”
‘그런 말 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나중에 죽는단 말입니다.’
심지어는 그 약속을 코앞에 두고 죽는단 말이다!
로제타가 이 자리에 있었으면 나랑 같이 칼릭스 입 막고 있었을 거다.
“그러니까 그때 말씀하십시오.”
가볍게 눈꺼풀을 몇 번 여닫은 칼릭스가 문득 웃었다.
“응. 그럴게.”
왠지 고개를 살짝 돌리고 손으로 부채질을 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지만 지금 저 얼굴을 봐야 한다는 의지가 승리했다.
똘망똘망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는데, 칼릭스가 나직한 탄성 소리를 내었다.
“그러고 보니 편지가 왔어. 발신인이 데칸드 백작이던데.”
데칸드 백작이라면 유물 수집광이자 아인스의 할아버지였다.
비록 제대로 만난 지는 꽤 되었지만 간간이 안부를 나누는 사이였기 때문에 편지 자체가 갑작스럽지는 않았다.
나는 도리를 아는 인간이므로 에리히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편지는 대체로 레터 나이프로 곱게 개봉하는 편이다.
이번에도 예쁘게 직선으로 가른 편지 봉투는 아래로 뚝 추락하고 말았다.
편지의 특정한 지점을 읽은 시점에서였다.
“샤를리즈?”
바닥에 떨어진 편지 봉투를 스친 시선이 내 얼굴에 닿았다.
나는 편지를 그에게 내밀었다.
“데칸드 백작은 유물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는데, 수완이 좋아서 그중 성물이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백작은 제 수집품 중에 성물이 있다는 건 매번 모르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한 유물이 성물로 추정되니 구경하러 오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미래의 조각도 영 쓸모없는 내용이었던 적은 드물었고요.”
“저 성물이 지금 공녀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예.”
나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의도한 것처럼 지나치게 친절해서 우연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그렇다면 의도나 이유가 있을 텐데 짐작 가는 구석이 없습니다.”
‘원래 이 세상은 샤를리즈에게 전혀 친절하지 않았는데.’
칼릭스는 고요했다.
눈을 내리깐 채 고심하면서, 나는 그에 의문을 갖지 않았다.
아무리 칼릭스라도 답을 찾을 수 없을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