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곤녀님!”
키가 꽤 자란 아인스가 뒤뚱뒤뚱 달려왔다.
‘역시 장군감!’
아인스가 내 다리에 머리 박치기를 시전하기 전, 아이를 후다닥 들어 올렸다.
“꺄하!”
놀이인 줄 알았는지 해맑게 웃음을 터뜨리는 아이를 받치는 내 팔이 바람맞은 사시나무처럼 부들부들 떨렸다.
“원 녀석도.”
다행히도 데칸드 백작이 아이를 데리고 간 덕택에 볼썽사나운 꼴은 오래 보이지 않았다.
“공녀도 유물에 관심이 많으니 수락할 줄 알았어. 그래서 감상에 불편이 없도록 미리 준비를 해 두었다네. 로단테 군도 함께 와 주어 고맙군.”
“제가 감사한 것을요.”
“하하하. 아카데미 입학시험에서 높은 등수를 했다는 말을 들었어. 축하하네. 아주 대단한걸.”
“그냥 높은 등수가 아니라 7등입니다.”
슥 첨언하고 다시 딴청을 피웠다.
잠시 내 옆얼굴을 바라보는 듯싶던 로단테가 감사하다며 겸손하게 대답했다.
데칸드 백작은 성물을 찾은 여정을 뿌듯하게 설명했고, 나는 아인스를 단단히 껴안은 백작의 팔을 힐끔힐끔 쳐다보았으며, 로단테는 그를 빤히 쳐다보는 아인스에게 웃어 주었다.
또다시 교수로 빙의한 데칸드 백작의 말을 나름대로 열심히 들어 보려고 해도 모두 스쳐 가던 중, 저 한 문장이 콱 박혔다.
“그래서, 꽤 거금을 주고 사들였다네.”
‘……어라.’
“경매에도 나오지 않는 비밀스러운 물품이라고 하니 공녀에게도 모쪼록 즐거운 시간이 되면 좋겠어.”
‘……어라.’
지금 내 눈은 분명 거센 풍랑을 마주한 나룻배 한 조각처럼 흔들리고 있을 것이다.
‘이거, 칼릭스한테 뭐라 말하지.’
[저 성물이 지금 공녀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예. 의도한 것처럼 지나치게 친절해서 우연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세상아…….’
괜히 주절거렸다는 민망함에 속으로 이마를 퍽퍽 치던 때였다.
“바로 이것이라네.”
어느새 간절해져 퍼뜩 고개를 든 나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화살이네요.”
“허허. 화살 형태라고 해야지.”
데칸드 백작은 상냥하지만 거스를 수 없는 미소를 보였다.
나는 즉각 시정했다.
“화살 형태네요.”
“저 가느다란 화살대 형태가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니 신기하지 않나. 철이 아닌 나무인데도 말일세.”
슬쩍 훔쳐본 로단테는 애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맞아?’
‘조금만 더 볼게요. 공녀님.’
……그렇다.
백작은 홀라당 넘어간 것이었다.
내 이불은 한동안 청소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먼지가 내려앉을 틈이 없어 더러워지지도 않을 테니 말이다.
“어때. 공녀가 보기에도 이 유려한 직선의 집약체가 대단하지 않은가? 성물로 인정받으려면 신전의 고위 신관에게 보여야 하는 통에 추측이라고 했네만 나는 이것이 성물이라는 확신이 들어.”
‘저렇게 좋아하는데…….’
반짝반짝 빛나는 백작의 눈을 슬그머니 피하며 성물의 탈을 쓴 장물에 시선을 고정했다.
다시 봐도 화살이었다.
‘그래도 왜 백작이 속았는지는 알겠군.’
맨몸으로 세월을 견뎠을 화살은 훼손이 거의 없었다.
“훼손이 거의 없고…….”
“그래. 그것이 참으로 신묘해!”
“어딘지 기품이 흐르고…….”
“곡선이 아니라 직선 위주인데도 우아하지.”
“촉도 깨끗…….”
순간 여기 아이가 있다는 것도 잊고 이거 피 얼룩이냐며 공중으로 떠오를 뻔했다.
“세월이 담겨 있는 유일한 부분이지. 이것도 마음에 든다네. 세월을 품은 성물이라니.”
백작이 흐뭇하게 웃었다.
홀로 눈물을 닦고 있던 때였다.
백작의 수강을 하도 들은 탓인지 구석으로 피해 있던 아인스가 돌연 외마디 탄성을 내었다.
“쌰!”
“선황자 전하의 존함을 함부로 부르면 안 된다. 아인스.”
아인스가 토실한 볼을 부풀렸다.
“오늘은 시간을 내기 힘드셨어. 다음에는 오실 테니 너무 서운해하지 마.”
사실은 사샤의 행보가 정치적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으므로 오지 못한 것이었다.
사정을 모르지 않을 데칸드 백작이 미안하다는 듯 코를 찡긋하고는 내 말을 정리해 전달했다.
“다음에 오신댄다.”
“꺄!”
그렇게 짧은 나들이는 내 마음에 상처만 남긴 채 끝이 났다.
흑.
* * *
교황의 수작을 알게 되고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단연 사냥제였다.
지겨울 만큼 많으면서도 단일 패턴.
그만 내 머리는 학습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흠.”
그러나 이번은 의외로 사냥 대회는 아니었다. 무기를 사용한다는 비슷한 틀을 갖고는 있었지만 말이다.
‘궁술 대회라니 찜찜하군.’
데칸드 백작이 보여 준 가짜 성물이 하필 화살이었던 탓이다.
‘혹시 그거 진짜로 성물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초대장을 빤히 쳐다보는 내 꼴이 영 수상쩍었는지 리반이 떨떠름히 물었다.
“공녀님. 혹시 참가하시렵니까?”
“고민 중이야.”
“리엔타는 수상 욕심이 없군요.”
“부상이 있어?”
몹시도 속물적인 질문에 대답한 사람은 칼릭스였다.
“해상 왕국의 다이아몬드가 최근 경매에서 낙찰되어 황성으로 반입되었다는 이야기가 파다해.”
“참가 안 합니다.”
일주일 후에 갑작스럽게 열린다는 대회에는 몹시도 훌륭한 부상이 걸려 있었다.
“주군께서는 누구를 적임으로 생각하십니까? 저는 파커가 어떨까 싶은데요.”
“엘루이든은 참석하지 않아.”
“예? 왜요?”
리반이 펄쩍 뛰었다.
“다이아몬드를 암시장에 팔아서 사용인들에게 보너스를 주셔야지요!”
나는 슬쩍 물었다.
“리반. 그대 너무 솔직한 것 아닌가?”
“생각만 한다는 게 말로 했나 보군요.”
새침하게 발뺌한 리반이 다시 집요한 눈을 했지만, 칼릭스는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나도 말없이 웃었다.
‘엘루이든이 빠진다면 우승은 리엔타가 할 수 있겠어.’
후후후.
음흉한 생각을 품은 시간이 흘러 대회 당일.
“이럴 수가.”
나는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내 승부욕―이라고 하자―을 익히 알고 있는 리엔타 공작이 궁술 대회 참가자 선발을 위해 연 토너먼트에서 우승한 기사가 갑작스러운 두통으로 참가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괜찮다. 샤를. 준우승한 기사도 있으니.”
“아가씨. 제가 반드시 우승하……, 으아악!”
준우승자는 평지에서 넘어져 다리를 접질렸다.
그다음으로는 손가락이 부러지고, 갑자기 눈을 부여잡으며 고통을 호소하기도 했다.
“이상하구나. 그래도…….”
“아버지.”
“으응?”
“제가 나가겠습니다.”
‘쿠궁!’이라는 글자가 양 뺨에 적히기라도 한 듯 공작의 낯빛이 순식간에 핼쑥해졌다.
“하지만 대회는 위험하다.”
“서로를 겨냥하지 않고 과녁을 향해 쏘지 않습니까.”
“활이 무척! 아주 무척이나 무겁다. 너도 보지 않았느냐?”
“인생보다는 가볍습니다.”
“어? 그, 그렇기는 하겠지만……. 그래! 내가 나가겠다.”
“이겨도 져도 여러 말이 나올 텐데요.”
‘여러 말은 언제나 나왔는데?’라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는 얼굴로 공작이 눈을 끔뻑였다.
“갑니다.”
“잠시만. 샤를! 샤를!”
앞으로는 이미 바닥난 평판이라고 알뜰히 이용하며 사는 대신 행동거지를 바르게 할 것을 다짐하며 결연하게 발을 옮겼다.
이윽고 대회의 막이 올랐다.
* * *
샤를리즈가 등장하자 귀족들의 얼굴이 아리송해졌다.
‘왜 기사를 두고 공녀가 직접……?’
저기에 각각의 변주가 있을 뿐 하는 생각 자체는 비슷했다.
“리엔타 공녀가 총은 잘 다뤘지요…….”
총과 활의 유의미한 공통점을 찾지 못한 귀족들의 얼굴은 다시 아리송해졌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리엔타, 승리!”
판이 끝까지 진행되지 않았음에도 깃발이 올라갔다. 상대측의 화살이 앞으로 정중앙만 꿰뚫는다고 해도 리엔타를 이길 수 없던 탓이다.
“이게 무슨 일이래요?”
“어떻게 공녀는 원거리 공격에만…….”
그야말로 몸서리쳐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과녁을 매섭게 응시하는 공녀를 더는 보지 못해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는 이들도 있었다.
‘꼭 사람을 노리는 눈 같잖아!’
동그란 과녁을 제 가문의 기사들을 건든 교황으로 비춰 보고 있으니, 저런 생각을 한 귀족들은 감이 꽤나 좋다고 할 수 있겠다.
한편, 그들처럼 어리둥절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리반이었다.
샤를리즈는 어리둥절해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 파죽지세가 다이아몬드와 교황의 목을 향한 집념에의 승리라고 고개를 끄덕인 지 오래였다.
“공녀님께서 원래 활을 잘 다루셨습니까? 이러다 정말 우승하시겠는데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으나 애초 대답을 바랐다기보다는 감탄의 일종이었으므로 리반은 그저 연신 헛숨만 내뱉을 뿐이었다.
“리엔타, 승리!”
칼릭스는 문득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희게 불거진 손마디를 짧게 바라본 벽안이 다시 경기장을 향했다.
[원래 활을 잘 다루셨습니까?]
기억이 또 하나 떠올랐다.
그저 스쳐 지나갔을 뿐인 말에 빛을 잃고 묻혀 있던 순간이 반짝였다.
‘제약이 풀리고 있나.’
특정 시간대까지만 유의미한 제약.
어느 순간부터 끝난 기이한 꿈.
[의도한 것처럼 지나치게 친절해서 우연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그렇다면 의도나 이유가 있을 텐데 짐작 가는 구석이 없습니다.]
손가락 끝에 걸릴 듯 걸리지 않았으나, 거리를 확연히 좁혔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샤를 님 정말로 대단하세요!”
사샤가 양 주먹을 꼭 말아쥐고 입을 앙다물었다.
“결승까지 하루에 속행하다 보니 공녀님의 체력이 걱정입니다. 그것만 아니라면 우승도 노려볼 수 있을 텐데 말이지요.”
“샤를 님은 그래도 우승하실 것 같아요.”
“그럼 저도 그렇게 믿겠습니다.”
그랬다. 이 대회는 무료함을 덜어주기 위한 대회라는 명목과는 달리 하루 만에 끝났다.
그것이 바로 샤를리즈가 짚은 의심스러운 지점이었다.
[대회를 개최하며 내세운 구실이 진짜라면 기간을 길게 잡을 텐데, 하루라니 수상쩍습니다.]
칼릭스는 제 오른손을 매만지듯 덮었다.
검은밤에 대응을 시작하라는 표시를 저도 모르게 할 것만 같다는 위기감이 든 탓이었다.
“준결승전을 앞두고 잠시 휴식이 있겠습니다.”
사샤가 어깨를 움찔움찔했다.
다급하게 달랑거리는 다리를 보고 칼릭스는 조금 웃었다.
“샤를리즈에게 가 볼까?”
“네. 네!”
사샤가 얼른 일어났다.
“시원한 물은 어디 없을까요? 샤를 님께서 많이 지치지 않으셨을까요?”
“그럼 음료와 디저트를 챙겨 가야 하겠구나.”
“샤를 님은 청포도 생크림 케이크랑 초코 딸기 케이크랑 딸기 크림 케이크를 가장 좋아하시는데 남아 있겠지요?”
걱정스럽게 눈을 굴리는 아이의 머리를 칼릭스가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위화감을 놓치지 않기 위해 첨예하게 날을 세운 기감 덕택인지 아니면 순전히 우연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시선 끝에 무언가가 걸렸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파악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시간이기도 했다.
“숙부님! 저기 케이크가 있어요!”
“다행이네.”
아무렇지 않게 웃은 눈이 기울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