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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198) (198/232)

198화

그러므로 이건 그가 먼저 해야 하는 말이었다.

“정해진 행동을 해야 끝나는 꿈을 꾸면서 생각했어.”

일견 맥락 없는 말에도 샤를리즈는 그를 잠자코 응시했다.

“어쩌면 이건 어딘가의 현실이 아니었을까.”

답이 존재함은 곧 선택을 완료했다는 뜻이다.

칼릭스는 “그래서” 하고는 말했다.

“이미 일어났던 일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어.”

칼릭스가 입술을 조금 말아 올렸다.

아주 짧은 시간이 흘렀다.

입을 연 샤를리즈의 얼굴은 변함없이 무감했다.

“일 년 전, 그러니까 제가 공작령으로 내려가기 전. 이전 생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샤를리즈가 말한 이전 생에 그는 없었다는 사실을 무심한 녹안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칼릭스를 바라보면 미래가 보이고, 신성력을 겪고 칼릭스를 보면 기절하고, 그러면 또 무언가가 보이고.”

샤를리즈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제가 간헐적으로 미래를 볼 수 있던 사람, 칼릭스, 그리고 저. 이렇게 셋은 수정 구슬을 보았을 때의 반응은 마찬가지로 신성력이 있는 다른 사람들과 달랐습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이었다.

마치 공간이 뒤바뀐 듯했다.

우레 같은 빗소리가 귓가에 요란하게 빗발치고, 싸늘한 공기의 질감, 그리고 무력감에 목이 졸리는 감각이 선연했다.

[대, 대공 전하! 아무리 대공 전하라 하시어도 이렇게 언질도 없이 오실 수는 없습니다. 교황 성하와 수석 신관님께서 계…….]

[내 손님이시다.]

시뻘겋게 번진 시야로 희끄무레하게 보이는 신관의 눈동자는 선명한 주황색이었다.

수 초만 흐른 것 같기도 했고, 수십 여분이 흐른 것 같기도 했다.

전자일 테다.

이 판단 역시 직감 덕택이 아니라 경험의 산물이었다.

“그렇다면.”

칼릭스는 이번에는 말을 다듬어 보려고 하지 않았다. 곧바로 발음한 말은 묘한 울림을 품고 있었다.

“셋만 다른 이유는 어떤 일을 함께 겪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네.”

“사샤면 모를까 로단테라니, 조금 이상합니다.”

그리고 샤를리즈는 나직한 탄성을 내며 덧붙였다.

“칼릭스의 말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칼릭스와 로단테는 만난 적도 별로 없으니까요.”

“샤를리즈.”

허용 범위 이상으로 쏟아지는 기억에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지만 칼릭스는 웃었다.

“내가 말한 건, 이번이 아니야.”

그야 그럴 수밖에.

잡힐 듯 잡히지 않던 꼬리를 드디어 움켜쥐게 되었으니까.

예기치 않게 일종의 조력자가 된 라우드에게 친절할 생각은 그럼에도 없지만 말이다.

* * *

또 기묘한 꿈속이다.

자신은 익숙한 남자에게 익숙하지 않은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아니, 사실은 스스로조차도 익숙하지 않았다.

[정말로 가능합니까?]

세상은 손바닥에 고인 물과 같았다.

그래서 그는 늘 손을 오목하게 고정해야 했다. 요동쳐 흘러내리지 않도록.

이 불편함이 달가웠다. 동생의 복수를 마치지 못한 그에게 평안은 오지 않아야 하므로.

[공녀뿐 아니라 정말로 엔젤도 살릴 수 있습니까?]

수면이 일렁이는 것처럼 시야가 흔들렸다.

로단테는 익숙하게 다시 손을 펼쳤다가, 거칠게 주먹 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물기가 이토록 별 볼 일 없었다.

[계획대로 된다면.]

뺨에 묻은 피는 신경도 쓰지 않은 남자가 메마르게 제 손바닥을 그었다.

[그럼 제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지금은 없어.]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그가 말했다.

[앞으로도 없다고, 확신할 수는 없겠군.]

[그 ‘앞으로’가 지금입니까, 아니면…….]

[말했잖아.]

남자가 날카롭게 웃었다.

[‘지금’은 없다고.]

대가 없는 친절을 겪어 본 적 없는 소년이 경계를 드러냈다.

[필요도 없는 저를 찾아온 이유가.]

[교황은 신의 대리인이고, 수석 신관은 예비 교황이라지.]

벽안이 그를 금세라도 꿰뚫을 듯 응시했다.

[그렇다면 신이 네 눈으로 보고 있지 않겠어.]

열없는 시선이었지만 그 기저에 도사리고 있는 근원은 분명한 분노였다.

“하아.”

로단테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침구를 꾹 움켜쥔 채 파르르 떨리는 손이 문득 얼굴을 쓸었다.

눈물로 흥건했다.

’아니야.‘

신전에 도착하기 전에 탈출했다. 엔젤도, 샤를리즈도 살아 있다.

그러니 이것은 어쩌면…….

이불을 제치고 로단테는 허겁지겁 일어나 종이를 끌어왔다.

여전히 떨리는 손으로 쓰인 글씨는 크기도, 굵기도 일정하지 않았지만, 내용만은 필요한 모든 것을 담고 있었다.

로단테는 그것을 쥐고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로, 로단테? 너 얼굴이…….”

아드리안이 잠기운이 가득한 눈을 크게 떴다.

“전서구가 필요해요.”

빨리. 빨리요. 로단테가 입술을 떨었다.

제 양 볼을 거칠게 갈긴 아드리안이 곧장 침대에서 내려왔다.

* * *

‘도와주고 싶었다고.’

마차를 타고 엘루이든 대공저로 오는 내내 곱씹은 문장이었다.

‘제목이 그따위라서 작가 놈이 나를 능멸하려는 줄 알았는데.’

종착지를 눈앞에 두고 돌부리에 발이 걸려 넘어진 기분이었다.

스스로가 바보 같았다.

‘거의 다 파악했는데, 그래도 모르겠다니…….’

의기소침해져 기운이 쪽 빠졌다.

대공저에 도착해 털레털레 걷고 있는데, 돌연 인자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공녀님 아니십니까.”

아마 내 눈은 먹잇감을 포착한 맹수처럼 빛나고 있었을 것이다.

집사가 약간 주춤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물러선 만큼 냉큼 다가가 물었다.

“집사는 나이가 많으니 혜안이 깊겠지.”

“나이는 많으나 혜안이 깊지는 않습니다만, 공녀님의 고민을 들어드릴 수는 있습니다.”

단번에 알아챈 것 자체가 혜안이 깊단 증거였다!

“누군가를 가장 도와주고 싶은 건 누구일까?”

물어놓고도 참 대책 없는 질문이었다.

통렬한 한숨을 뻑뻑 쉬며 생각했다.

‘말만 뚝 떼놨으니 집사는 부모라고 할 것도 같다.’

때마침 집사가 “글쎄요.” 하며 운을 뗐다.

헛웃음을 짓고 있진 않을까 싶었는데, 굉장히 진지하게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누군가를 가장 도와주고 싶은 누군가는, 누군가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아닐까요?”

“……나는 집사가 부모라고 말할 줄 알았어.”

“그런 경우도 물론 있겠지요.”

현명한 집사가 빙그레 웃었다.

이제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꿈속과 원작이 비슷한 듯 다른 이유를 말이었다.

그 순간을 살았던 개인의 시선으로 쓰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왜곡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로단테는 왜 사샤랑 아드리안과 다르지?’

물리적으로 머리를 굴리고자 시도해 봤지만 이마에 세로로 길쭉한 원만 빨갛게 남았다.

“저는 신념이 필요한 위대한 일은 할 수 없어도 아주 작은 이유로 커다란 일은 할 수 있는 사람인 것 같아요. 아니, 사람이었습니다.”

부친을 살려보겠다던 일이 이렇게까지 되었어도 꿋꿋하게 나아가고 있다.

‘그런데 답이 다 나온 문제가 해결이 안 됩니다.’라고 하려던 찰나.

칼릭스가 문득 웃었고, 이상하게도 칼릭스가 곧이어 할 말이 내 의문과 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설명할 수 없었다.

직감이라고 하기에는 거창하고, 내 바람이었다기에는 정말로 그랬다.

어쩌면 그저 우연일 수도 있었다.

“내가 말한 건, 이번이 아니야.”

집무실로 오기 전, 엘루이든의 마차를 내려다보며 했던 생각이 떠오른 것도 그저 우연일 수도 있었다.

죽음으로 끝난 생의 가운데에서 나는 다시 눈을 떴고.

그건 회귀와 다를 게 없다고.

* * *

황제가 신전을 의심한다.

천륜까지 거스르며 거머쥔 자리를 위협당하고 있으니 무엇이든 할 터였다.

언제고 하게 될 것이었으나, 라우드가 예감한 시기는 지금이 아니었다.

곧 그의 거취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도 모자라 행동에 나설지도 모른다.

‘필리엄 백작을 제거해야 했나.’

배신자는 즉결 처분이 그의 원칙이지만, 백작의 쓸모는 여전해 조금 미룬 것이 실책이었다.

당장 백작을 암살한다면 신성한 나무를 불순한 목적으로 이용했음을 실토하는 꼴밖에 안 됐다.

‘황제가 스스로 의심하게 됐을 리가 없고.’

텅 빈 나무가 등장한 것 자체는 놀랍지 않다. 필리엄 백작이 미리 빼돌려 두었던 것일 테다.

‘대공이 관여했을 테지. 공녀가 백작저를 드나들고는 했으니.’

라우드는 문에 부착된 마도구에 다소 거칠게 손바닥을 대었다.

마도구가 인식을 마치자 스산한 소리를 내며 문이 저절로 열렸다.

광활한 공간을 비추는 등불의 개수는 턱도 없이 적어 어스름했으나 내딛는 발걸음은 거침없었다.

그 안, 깊숙한 곳에 위치한 문은 보기에는 평범했다.

백금 걸쇠가 다름 아닌 성물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더는 평범하게 보이지 않을 테지만 말이었다.

그리고 그 안은, 더욱 평범하지 않았다.

근원에 가깝게 새하얀 결정체는 그 자체로 발광물질과 비슷해 조명이 필요 없었다.

결정체, 즉 성혈을 매섭게 노려보며, 라우드는 입매를 비틀었다.

“여기까지 왔어.”

공을 들여 이룩해냈는데, 조금만 더 하면 되는데.

시간이 부족했다.

“선황자도, 대공도 당장 포획하기는 무리가 있고. 그렇다면…….”

망국의 수호자는 어차피 아무 데도 필요 없다.

그의 입술이 깊은 호선을 그렸다.

“그렇다면, 필요한 사람이 써도 될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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