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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199화 (199/232)

199화

“잠시만!”

“우리 사이에 더는 잠시라는 말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자, 잠시만 기다려 보아라! 잠시만!”

“그 입에서는 매번 기다리라는 말만 나오는데 왜 늘 기대하게 되는지.”

“느낌이 온단 말이다!”

눈을 반짝 빛내며 자리에 얼른 앉았다.

신수는 가슴을 지그시 누른 채 골똘히 생각에 잠긴 눈치였다.

‘한때는 도마뱀 형체도 유지 못 해서 돌멩이였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렇게 씩씩한 소년으로 자라나다니 감개무량하다.

이제 더 쑥쑥 자라서 본체를 유지할 힘도 어서 되찾아 내 소원을 들어줬으면 좋겠다.

“너 표정이 이상하다.”

떨떠름히 곁눈질한 신수는 아예 시야를 봉인하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가 거의 곧바로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는 외쳤다.

“알았다! 내 생사여탈권을 노린다는 신호다!”

나는 입가를 슥 닦았다. 다행히 손등에 묻어난 것은 없었다.

“그 신호, 학습할 수는 없습니까?”

“신의 은총이느니. 너는 안 된다. 아무튼! 나를 노린다니까!”

“저런…….”

“한낱 인간이 감히 신수를! 결단코 가만두지 않겠다! 헛된 생각을 한 머리는 둘로 쪼개고, 안식은 허락하지 않을 테다! 망각의 축복을 제거한 채 수백 번의 환생 동안 제 죄를 뼈저리게 뉘우치도록 하겠다는 말이다!”

소년이 허공으로 둥둥 떠오르며 속사포로 열을 냈다.

저렇게 열심히 말하는데 대충 듣기는 미안해 주섬주섬 주워듣다 보니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망각의 축복을 제거한 채 수백 번의 환생이라.”

무심코 중얼거린 순간. 신수가 돌연 크게 외쳤다.

“그, 그런데 감히 누가 저러는지는 모르겠어!”

“교황 말고 달리 있습니까?”

그렇게 간단하게 말하지 말라고, 신수의 생명 앞에서는 그 어떤 자그마한 가능성도 좌시해서는 안 된다고 일장 연설한 신수는 슬쩍 말했다.

“그럴 것 같기는 해.”

“설마 인간이 신수를 잡을 수는 없을 테니 너무 걱정 마세요.”

“나는 걱정하지 않는다.”

신수가 콧김을 씩씩 뿜으며 호기롭게 일갈했다.

‘그렇군’의 의미를 담아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물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한 질문은 이렇게 넘어가는 겁니까?”

[교황이 시간을 돌려 물건을 수리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특정 물체 말고, 전체의 시간을 되돌리는 일도 가능합니까?]

신수의 생명 앞에 의문이 더 중요하냐고 또 펄펄 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조용했다.

신수가 두 눈을 감았다 떴다.

방방 날뛰던 꼬마는 어디로 가고, 세월이 층층이 고인 깊은 눈이 나를 향했다.

“그것은 네게 중요하지 않다. 이후로도 모른다 한들 이전처럼 달라질 것이 없고, 안다고 해서 네가 손댈 수 있는 것도 없다.”

“그래도 알아야 합니다.”

“왜?”

“만약 제 생각이 맞다면, 저는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무척 많습니다.”

신수는 물었다. 네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누군가를 가장 도와주고 싶은 누군가는, 누군가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아닐까요?]

집사의 말이 옳다.

‘후보군이 적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오래 고민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자초했다고는 하나 가여운 인생이었다. 나만큼은 그녀를 애처롭게 여겨야 했다.

그녀 덕택에 이 삶을 얻었을 나는 말이다.

원작의 강제력이 없었던 건, 이야기가 바뀌기를 바랐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샤를리즈의 사후도 원작에 쓰여 있는 게 의아하긴 하지만, 정신 제대로 차려서 살라는 의도라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야.’

죽으면 공작이 폐인 신세가 되니 목숨줄 잘 붙잡으라고 말이다. 그녀는 알았을 거다.

자신에게 효과가 좋으리라고. 사실은 부친을 굉장히 애틋하게 여겼으니까.

……아는 것치고는 제 목숨 민들레 홀씨보다도 못하게 여긴 게 한두 번이 아니지만, 넘어가기로 하자.

‘아, 아무튼 앞으로는 아주 매우 몹시 바르게 살아야지.’

언젠가의 나를 가장 사랑해 준 사람을 진창에서 꺼내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고 끝까지 욕하며 흰 눈 뜨는 사람이 있다면 시원하게 포기하겠다.

‘다른 사람들 마음을 주무를 수 있으면 내가 신이지.’

입 밖으로 내면 신전으로 질질 끌려갈 불순한 생각을 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신수가 지나치게 조용했다.

슬그머니 확인한 낯빛이 걱정으로 아주 어두컴컴했다.

왜 그러냐는 눈빛을 보내자 그가 대답했다.

“있었다. 교황은 가능해.”

앞뒤가 싹둑 잘린 불친절한 말이었으나 이해하기 어려움은 없었다.

“……목숨줄이란 게 생각보다 질기더라고요.”

교황에게 목숨을 숱하게 위협받은 선배로서, 그만 세모꼴이 되어버리고 만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 * *

신수가 돌아가고 얼마 되지 않아 톡톡 소리가 들렸다.

‘아드리안의 전서구네.’

작은 새는 어째 한껏 지친 기색이었다. 먹이를 주자 허겁지겁 해치운 새가 누가 잡을세라 후다닥 날아갔다.

“혹시…… 같은 새라서 그런가.”

반사적으로 볼에 두 손을 허겁지겁 대었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

‘신수는 아무래도 기력이 쪽 빨렸나 보군.’

머쓱하지 않다. 스스로를 지키는 일은 늘 진지하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

“로단테잖아?”

늘 단정한 필체가 어쩐 일로 끝이 날카로웠다.

제 불안함이 단순히 꿈으로 표현되었을 수도 있지만, 느낌이 좋지 않아요.

빗금이 처져 있으나 유심히 본다면 읽을 수 있는 불안정한 글씨체를 손끝으로 쓸었다.

미래일까요?

그 옆, 새로운 문장은 비교적 느리게 썼는지 꽤 또박또박했다.

미래일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요.

줄곧 가졌던 의문 하나가 있었다.

‘왜 셋만 수정 구슬을 보았을 때 반응이 달랐을까.’

비록 정확히 어떤 시간대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 셋은 같은 일을 겪었다.

그건 아주 커다란 일이었을 테다.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을 만큼.

“그럼 미래는 아니겠네.”

무심코 중얼거린 나는 종이를 한 번 더 바라봤다.

시야 끝에 걸린 것은 꿈속의 칼릭스가 했다던 말이었다.

지금은 아니라고 하셨었어요.

[내가 말한 건, 이번이 아니야.]

가냘픈 촛불로 시작된 불길은 금세 쪽지를 먹어 치웠다.

[이후로도 모른다 한들 이전처럼 달라질 것이 없고, 안다고 해서 네가 손댈 수 있는 것도 없다.]

‘글쎄.’

이번 생을 살며 알게 된 게 있다.

모든 건 가봐야 안다는 거다.

미리 하는 걱정도, 안도도, 과도한 대비도 의미가 없으므로 나는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기로 했다.

미래라서 다행이네. 바꿀 수 있잖아.

한참을 고민하다 쓴 문장은 거짓이되 거짓만은 아니었다.

엔젤이 설령 위협을 받는대도 계속 여기에 발붙이고 있도록 꽉 붙잡을 테니까.

녹인 밀랍이 굳기를 기다리던 때였다.

‘……엔젤.’

엔젤에서 시작되었다던 기이한 편지를 보낸 사람은, 그런데 누구였을까.

* * *

신전의 구조는 복잡하며, 대신관조차 출입이 불가한 구역이 있다.

미로처럼 꼬여 있는 길을 모두 외우고 있는 사람은 교황과 수석 신관 고작 둘이지만, 이번 대에는 오직 교황뿐이다.

지키는 사람이 없는 비고의 문이 열렸다.

유일한 이해자가 웃었다.

“이번에는 준비할 시간은 주지 못하겠습니다.”

애석하다는 어조로 혼잣말한 라우드가 푸른 원석에 손을 뻗었다.

“이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진심이었다.

호수에 의탁해 가까스로 연명한다고 해도 신수는 신수였으므로 건드리기 저어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도 신의 안배겠지요.”

그러나 결정했다. 결정했으므로 망설임은 없었다. 머뭇거리지 않고 단단히 잡은 원석이 손 안에서 매끄럽게 감돌았다.

“자. 모습을 드러내세요.”

얇은 입술이 올라갔다.

활로를 새로이 모색하자, 암초에 걸린 배처럼 막혀 있던 일은 순풍을 탄 듯 물살을 가르고 나아갔다.

‘대공의 방해 공작은 꽤 성공적이었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다.’

의식이 잔악한 심상에 잠겨 있었기 때문일까. 그는 다소 늦게 알아챘다.

“음?”

원석의 정체는 신수의 심장이었다. 신수가 직계 황족에게만 반응하게 된 초석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 비화를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교황들뿐이었다.

신수에게 심장을 돌려주려던 초대 황제를 용납할 수 없던 2황자는 부친을 암살했다. 이 기회에 여린 성정의 형을 제치고 황제가 되기로 결심한 야심가는 마치 저주처럼 끔찍한 최후를 맞았다.

그렇게 심약한 황태자가 신수의 심장을 신전에 기탁하게 된 것이었다.

후대 황제들은 몇 번이고 되찾아가려고 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잊혀졌다. 마치 빛의 신수, 그 자체처럼.

‘그런데 어째서.’

어느새 입술은 비틀린 채였다.

다시 한번 신수의 심장에 신성력을 흘려보냈지만, 이번에도 반응은 없었다.

몇 번을 더 같은 행위를 반복한 라우드는 마침내 헛웃음을 지었다. 검날처럼 첨예한 빛이 어린 눈동자가 심장을 노려봤다.

“이미 있었군.”

신수의 계약이 종료되는 상황은 두 가지다.

계약자가 죽거나, 계약 기간이 지나거나.

계약 기간은 계약자가 죽을 때까지가 보편적이니 결국은 한 가지라고 할 수 있었다.

“숙원은 늘 고행이 함께 하는 법. 제가 이 과업을 이룩할 수 있도록 지켜봐 주소서.”

스산한 눈동자가 눈꺼풀로 가려진 얼굴은 퍽 성스러웠다.

* * *

“…….”

찻물을 주룩 흘리지 않을 수 있던 건 내 입에 들어온 것은 놓치지 않는다는 집념의 승리였다.

‘뭐 애초에 내 목, 노렸었고.’

그간 읽은 위협이 몇 갠데 새삼 세상이 무너져 내릴 것도 없다.

“샤를, 어디 아파?”

“예? 아니요?”

“손이 떨리고 있어.”

“…….”

다시금 찻물을 삼키며 결의를 다졌다.

‘익숙해져봤자 안일해지기만 할 뿐. 이 긴장감, 나쁘지 않아.’

“괜찮……냐?”

어느새 나타난 신수가 손을 꼼지락거렸다.

교황이 제 심장에 몇 번이나 쾅쾅 노크해 댔으니 모를 수가 없긴 했겠다.

“그, 목숨줄이라는 게 생각보다 질기다고 하더구나?”

나는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신수의 손을 낚아챘다. 그리고는 겉만 앳된 얼굴을 지그시 응시했다.

“야, 얘가 왜, 왜, 왜 이래!”

신수가 마치 도움을 청하려는 듯 칼릭스를 돌아봤다. 그는 미소 띤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다부지게 말했다.

“이젠 너 살고 나 살고입니다.”

“머?”

“우리는 운명 공동……. 븝!”

“얘, 얘가! 뭔 말을 하는지, 원. 하, 하하!”

“체, 으븝!”

“쉿. 쉿! 알아들었다고!”

신수가 한껏 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그렇다니 입 아프게 말하지 않겠다.

이만 손을 치우라는 눈빛을 보냈는데도 신수는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운명 공동체로의 길은 험난할 듯하군.’

괜찮다. 한시적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계약 기간 나 죽을 때까지 아닌데.’

“잠시만. 너 눈빛이 수상하다.”

“오.”

의외로 잘 맞을 것도 같았다!

아무튼 그렇게 암운인 듯 암운 아닌 암운은 내 머리 위로 드리웠다.

‘안 쫄았다.’

먹구름은 반드시 물러가는 법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달갑다고도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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