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제국의 겨울은 신기한 구석이 있다.
매서운 바람이 쌩쌩 불어대다가도 돌연 일주일간 날이 풀린다.
저러고 언제 따뜻했냐는 양 다시 추워지지만, 잠깐 겪은 봄을 기다리며 사람들은 이 혹한을 이겨낼 희망을 얻는다고 한다.
한때는 신전에서 이 기묘한 자연 현상을, 교황이 밤낮으로 신께 기도를 드려 얻은 축복의 기간이라고 속여 먹기도 했다던데 신권이 하락하며 그 핑계는 어느새 황제가 가로챘다.
교황이 아니라 신의 선물이라며 이 기간을 기념하고자 여는 축제가 봄의 제전이었다.
바로 그 짧은 봄이 지금 왔다.
이제나저제나 이날만 고대하던 로제타는 제 포부대로 소규모 연회와 티파티를 휩쓸고 다녔다.
[가주위에 오르면 참석하기 어려울 테니 실컷 해둘 거예요.]
‘이리안이 없어서 심심했던 모양이다.’
이리안은 적당히 번화한 영지로 내려가 열심히 바다를 화폭에 담는 중이다.
내가 후원하는 화가라며 시작된 관심을 이리안은 그녀의 실력으로 이어갔다.
“저기 리반이 보여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명당을 선점하겠다며 아침부터 사라졌더라니 자리가 꽤 좋았다.
“사샤 님!”
손을 크게 휘저은 리반이 얼른 달려와 칼릭스에게서 피크닉 바구니를 뺏어갔다.
나는 리반의 음흉한 심계를 눈치챘다.
그리고 칼릭스의 혜안에 감탄했다.
“사샤 님이 즐거워하실 얼굴을 떠올리니 시간이 이렇게 된 줄도 몰랐습니다. 사샤 님, 마음에 드십니까?”
“네. 고마워요, 리반.”
언제 히죽히죽 웃었냐는 듯 리반이 아쉽게 말했다.
“다행입니다. 그럼 저는 이만…….”
“집으로 가는 거예요?”
“그래야지요. 오붓한 시간을 방해할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사샤가 머뭇거렸다.
그러자 칼릭스가 허리를 조금 숙여 다정하게 속삭였다.
“괜찮아. 리반은 집에 돌아가지 않아.”
리반의 눈이 어두운 밤하늘을 가르는 번개처럼 번쩍 빛났다.
“함께 온 기사들과 피크닉을 즐길 거거든.”
“그럼 사샤 님. 저기로 가시, ……예에?”
“제이 경, 파커 경, 그리고 에릭 경이야. 심심하지는 않겠군.”
나는 친절하게 덧붙였다.
리반이 눈물을 보인다면 장난이라고 끼워 줄 생각이었는데, 그는 기사들의 위치를 확인하고는 냉큼 갔다.
“바로 옆에 있으면 듣기 싫은 말도 들리니 이 정도가 오히려 좋을지도…….”
그런 말을 흘리고는 말이다.
로제타만큼이나 오늘만을 기다린 주방장이 솜씨를 발휘한 도시락은 그야말로 휘황찬란했다.
종류도 많은 데다 하나같이 충격적으로 맛있어서 나는 자꾸 먼 산을 보게 됐다.
‘어, 그러고 보니?’
조성된 녹지는 가벼운 옷차림의 사람들로 붐볐지만, 무슨 일인지 반경 5미터 내로 리반 일행을 제외하고 아무도 없었다.
‘혹시 리반이 쫓아냈나……?’
슬쩍 리반을 훔쳐보고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방긋방긋 웃으면서도 심심한 듯 연신 주변을 둘러보는 모습이 눈에 박혔다.
‘사샤는 우리랑 다르게 사회성이 좋아서 친구를 좋아하는데.’
친절한 이웃처럼 슥 다가가 우리 애랑 놀지 않겠냐고 제안할 심산으로 티 안 나게 미소를 연습하던 순간이었다.
“앗.”
바삐 달려간 아이가 한참을 쪼그려 앉았다.
“벌레가 있을 계절은 아닌데 말입니다.”
“꽃을 보았나.”
동시에 중얼거리고 서로를 마주 보았다가 우리는 금세 다시 아이에게 시선을 두었다.
어제, 칼릭스는 미래의 조각 속 교황의 흉계를 듣고서도 담담했다.
[계약자로 사샤를 추측하겠군.]
[당연하지! 나는 한낱 인간 따위에게 쉽게 계약을 해주지 않는다. 그러니 영광인 줄 알아!]
[예에.]
여전히 담담한 시선은, 그러나 아이를 분명히 지켜보고 있었다.
몸을 들썩이던 아이는 어느새 일어나 쫄래쫄래 달려왔다.
숨을 몰아쉬며 환하게 웃은 사샤가 작은 달걀을 사이에 둔 것처럼 엉성하게 포개고 있던 양손을 조심스레 펼쳤다.
“선물이에요.”
그 안에 있는 것은 토끼풀 반지 두 개였다.
조그만 손으로 얼마나 열심히 만들었는지 어설픈 구석이 없었다.
“고마워. 사샤.”
눈을 몇 번 깜빡인 칼릭스가 말했다. 그의 능숙한 화술을 안다면 어쩔 수 없이 하는 감사라며 치부할 테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너무 좋아서 당황했군.’
사샤가 히히 웃었다.
“이건 샤, ……샤를 님?”
나는 이미 그곳에 없었다.
쏜살같이 달려갔다가, 쏜살같이 손을 움직이고, 또 쏜살같이 달려왔다.
그런데도 하나도 안 지쳤다.
체력 단련의 보람을 오늘 아주 톡톡히 만끽했다.
“사샤 것.”
어느새 검지에 토끼풀 반지를 낀 칼릭스는 빙긋 웃으며 반지를 뺐다.
자그마한 손바닥에 각각 크기가 다른 세 개의 반지가 모였다.
“꼭 가족 같아요.”
작게 말한 아이가 다급히 눈을 깜빡였다.
“바, 반지가요!”
“……가족 아니었어?”
나는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사회성 좋아서 친구 잘 만드는 아이 아니랄까 봐 사회가 정한 규범에 아주 철저했다.
어질고 좋은 황제가 될 싹이 보였다…….
“아, 아니에요. 가족 맞아요. 가족이에요.”
고개를 도리도리 저은 사샤는 예외를 인정해 주었다.
나는 말랑한 뺨에 입을 맞추며 속으로 아주 작게 속삭이고 싶은 말을 삼켰다.
여기가 완벽한 소설 속 세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형식은 따랐다 보니 일종의 복선이 될 법한 행위는 피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기껏해야 백 년밖에 못 사는데 하고 싶은 말도 못 하게 만들다니!’
나는 투지를 불태웠다.
어서 해치우고 말겠다고 말이다.
* * *
축제에 따라오는 것은 많지만 그중 하나로 황성의 연회가 있다.
그리고 오늘의 연회는 참석이 자율이었다.
“라베트.”
에리히가 머리를 마구 헤집으며 말했다.
“오늘 안 갈 수는 없어?”
황제가 이 연회를 가만히 넘길 리가 만무했다.
‘까딱하다 공개적으로 구혼이라도 하면…….’
“신의 은총에 감복하는 연회인데 가지 않을 수는 없어요.”
“야, 라베트.”
에리히는 속이 답답해졌다.
다른 사람들은 다 그냥 놀 생각으로 오는 거라는 말이 턱 끝까지 치달았으나, 입을 닫았다.
동생의 성정을 모르지 않았다.
대신 물었다.
“공녀님은? 공녀님은 별말씀 없었고?”
“네.”
라베트. 조금만 더 버텨 봐. 황제가 혼사를 이야기할 수 없는 상황이 오게 될 테니까.
편지는 불태웠지만, 다정한 위로는 마음 한구석에 소중히 간직했다.
라베트는 제 가슴 어귀를 손으로 지그시 눌렀다.
“공녀님은 참석하……, 하. 모르겠다. 아무튼 시간 되면 나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같이 입장해.”
“고마워요. 오라버니.”
에리히는 대답 대신 문을 쾅 닫고 나갔다.
머리카락 사이로 힐끗 보인 붉은 귀를 보았기 때문에 라베트는 조용히 웃었다.
“공녀님. 저는 괜찮아요.”
몇 번이나 편지 끝에 썼던 말을, 라베트는 중얼거렸다.
허공에 퍼진 말은 어디에도 닿지 못하고 사그라들었다. 스스로도 속이지 못하는 조악한 거짓말의 결말로 걸맞았다.
* * *
이 연회는 다른 연회보다 특화된 부분이 있다.
누가 봄을 축하하는 연회가 아니랄까 봐 풋풋한 연인들이 여러 쌍 피어난다는 것이다.
“황제가 공개 구혼을 할까요?”
“아마도.”
칼릭스가 나직이 수긍하며 내 미간을 손끝으로 살살 어루만졌다.
계속 팍삭 구기는 통에 보람이라고는 없는 일일 텐데도 칼릭스는 개의치 않고 계속했다.
속으로 한참 황제를 욕하다가 불쑥 말했다.
“교황은 계약자를 해치려고 하겠죠?”
사샤가 이 자리에 없어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연회의 특색이 특색인 만큼 어린아이는 참석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인지라 사샤는 대공저에 있다.
지금쯤이면 사샤만 모르게 펼쳐진 삼엄한 경계 속에서 공부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겠지.”
납치해 제물로 바치든 제거해서 신수와의 수호 계약을 강제로 끊든, 모두 다 힘든 일이다.
그렇다면 변수가 없는 제거에 무게가 실린다.
“그나저나 수호 계약을 맺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황제가 눈에 불을 켜겠습니다.”
칼릭스는 조금 웃었다.
“한참 전부터 그랬어.”
그리고는 평이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니 달라지는 건 없어.”
정말로, 아무 걱정도 할 필요 없다는 듯 말이다.
그래서 나도 대답했다. 사실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고.
* * *
“폐하. 입장하실 시간이 되셨습니다.”
안토니오가 회랑을 가로질렀다.
거침없이 내딛는 걸음처럼 표정도 자신만만했다.
로나터스가 계속 회피하고 있다고는 하나 더는 그럴 수 없을 테다.
‘로나터스의 병력이라면 꽤 쓸 만하지.’
후작이 병석에 누운 3년간 기사단의 손실은 거의 없었다. 3년의 공백을 메울 생각은 안 하고 감히 청혼을 거절하며 뻗대는 이유가 저것일 테지만, 이번 황후의 가문은 조용할 듯해 이것도 썩 괜찮았다.
여유롭게 축사를 마친 황제는 금백합이라는 별칭이 아깝지 않은 여자를 한눈에 찾았다.
눈이 마주치자 인사하려던 라베트에게 에리히가 눈치 없이 대화를 거는 광경을 본 안토니오는 코웃음 쳤다.
분위기가 점차 무르익었다.
서투르게 호감 어린 시선을 교환하는 이들도 있었고, 밀어를 속삭이는 연인들도 있었다.
그 가운데 안토니오는 성큼성큼 발을 뗐다.
길을 비켜주는 귀족들은 어리둥절하게 황제의 발길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 끝, 가만히 서 있는 라베트의 얼굴은 일견 잔잔했다.
황제가 한쪽 무릎 뒤를 굽혔다.
명백한 함의를 가진 동작에 나직한 탄성이 곳곳에서 터졌다.
“로나터스 영애. 나, 안토니오 베른 알로페는 신의 앞에서도 그대의 충실한 배우자였노라고 호언할 수 있는 삶을 약속하겠소.”
에리히는 붉게 충혈된 눈을 부릅떴다.
결국, 공개 구혼을 듣고 말았다.
‘공녀님. 공녀님께서는 어디 계시지?’
눈동자만 허겁지겁 굴리다 마침내 샤를리즈를 포착했다.
그녀는 술잔을 든 채 흥미롭다는 듯 그 꼴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녀님?”
에리히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힘없는 한 마디를 겨우 토해낸 순간이었다.
채앵―
황제의 구혼이 이루어지는데 감히 수군거릴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랬기에 고작 유리잔이 추락해 깨지는 소리를 이 자리의 모든 이가 들을 수 있었다.
“리엔타 공녀가…….”
그 뒤에 생략된 것은 이런 순간에도 저러다니 참으로 일관성 있다는 감탄이었다.
그러나 샤를리즈가 가슴께를 부여잡으며 허리를 숙이자 분위기는 반전됐다.
“샤를?”
다급히 다가온 대공의 어깨에 힘없이 머리를 기댄 샤를리즈가 크게 휘청였다.
불쾌하게 쳐다보던 안토니오는 안색을 달리하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흑마법을 감지하면 공녀는 혼절한다고 하였지.’
“공녀가 어째서 갑자…….”
채근하듯 언성을 높인 안토니오는 말을 끝맺는 것도 잊은 채 눈을 부릅뜨고 목울대를 울렁였다.
……샤를리즈의 머리카락 끝이 푸른빛으로 물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