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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201화 (201/232)

201화

‘말도 안 돼!’

안토니오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잊을 수가 없었다. 저 독약으로 황제가 되었으니까.

[광영을 이어가기에 현 황제는 너무도 심약하지요.]

세상의 부조리함 앞에 무릎 꿇고 있던 때였다. 늦게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황위를 빼앗긴 현실을 원망하던 때.

저 말을 하며 나타난 사내가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말한 믿기지 않는 약효를 납득하게 된 까닭은 복용한 이후를 실제로 보았기 때문이다.

[약은 모두 폐기했습니다. 앞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제국의 영광을 위하여.]

마치 제국만을 위해 결단 내렸다는 듯 권력을 탐하지 않고 물러난 사내를 안토니오는 추적해 제거했다.

‘확실히 폐기한 것을 확인했다. 그러면, 제조 방법이 퍼진 건가?’

일그러지려는 얼굴을 애써 감추며 안토니오가 칼릭스를 힐끗 쳐다봤다.

‘형님의 마지막을 세세히 기억하기에는 어린 나이였긴 한데…….’

푸르른 벽안과 마주친 것은 그때였다.

고작 얼굴만 살짝 기울인 작은 동작이 이토록 위압적으로 느껴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안토니오는 그 시선이 제게서 거둬진 이후에도 굳어 침만 삼킬 수 있었을 뿐이었다.

“샤를.”

그 짧은 말소리를 필두로 온갖 소음이 쏟아졌다.

“설마 독살은…….”

“그런데 음료라면 저도 마셨는걸요.”

“잔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니에요?”

“그, 그럼 범인이 이 안에 있다는 뜻이잖아요!”

안토니오는 붉게 뜬 눈으로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응시했다.

‘피를 토하지도 않았는데 처음부터 독살을 말했다, 라.’

……하지만 공녀의 이상 반응에 곧장 독살을 생각하게 되는 것도 그럴 법했다.

‘리엔타 공작저로 암살자들이 대체 몇이나 잠입했던가!’

샤를리즈를 이용해 칼릭스가 벌인 판일지 아니면 어느 미친 작자의 소행일지 고심하느라 머리가 다 아팠다. 안토니오가 얼굴을 구겼다.

그리고 다소 뒤늦은 물음을 던졌다.

“칼릭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

퍽 자연스럽게 다시 확인한 샤를리즈의 머리카락 끝은 여전히 푸른빛이 돌았다.

내리감은 눈꺼풀은 그저 잠시 눈을 감고 있는 것 같았으나 칼릭스에게 기댄 채 힘이 빠진 모습은 아주 깊은 잠에 빠진 사람 같았다.

“글쎄요.”

짧게 대답한 칼릭스가 산산이 깨진 유리 조각을 무심히 내려다봤다.

답 하나 얻기도 쉽지 않았다. 안토니오는 분개해 입술을 악물었다.

‘분명 머리카락을 보고도 태평한 걸 보면 독살 시도인 줄은 모르나 보지. 그렇다면 선황제의 죽음도 급사라고만 알고 있겠군.’

짜증스레 시선을 휙 돌린 안토니오가 내심 안도했을 때였다.

“독살이 아니라면 무엇일지 짐작이 가지 않는데요.”

그리고 다시 올라온 눈은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흔들림 없었다.

“독살?”

안토니오는 당황한 속내를 감추고자 과장되게 얼굴을 구겼다.

“증거는? 증거가 있느냐?”

그 순간이었다.

“제가 증언할 수 있습니다.”

한 걸음 다가온 사람은 바로 라베트 로나터스였다.

가장 레이디다운 레이디라는 칭송의 주인공은 채신머리도 잊고 마구 달려온 듯 드레스 자락이 구겨진 채였다.

떨리는 입술이 한 번 다물렸다가 다시 열리고, 그 사이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일견 단단했다.

“공녀님께서는 음독하신 게 맞습니다. 제 부친이신 로나터스 후작께서 겪은 증세와 동일하니까요.”

“……뭐?”

로나터스 후작의 일은 당연히 안토니오도 알고 있었다. 자체적으로 조사한 내용이 나열된 보고서에 저런 말은 없었다.

외적인 변화였다. 놓치는 것이 더 이상하다.

“…….”

세작이 제 지척에 있음을 이제야 눈치챈 안토니오의 안색이 일변했다.

“연…….”

먹먹한 목소리를 가다듬고 안토니오가 외쳤다.

“연회는 중지한다. 모든 활로를 폐쇄하라!”

* * *

젊은 연인들의 탄생을 축복하는 의미가 있는 연회이니만큼 어린아이와 연배 있는 귀족들은 참석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그 덕택에 이 자리에 리엔타 공작이 없어 그나마 다행이지.’

저번에 수정 구슬 들고 별관을 기웃거리는 김에 공작에게 가서 말은 해 뒀다.

[연회에서 제게 무슨 일이 있다는 말이 돌더라도 다 무시하십시오. 저는 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요.]

그래도 실제로 본다면 그 심약한 위장에 타격이 가긴 할 테다.

‘로제타는 너무 놀란 것 같다…….’

‘공녀님!’ 하던 로제타의 비명 소리를 들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끙끙거렸다.

황제를 속여 넘겨야 하니 사방에 말하고 다닐 수는 없어 입을 닫았더니 미안하게 됐다.

“제가 증언할 수 있습니다.”

‘……라베트.’

똑똑한 라베트는 내가 말했던, ‘황제가 성혼할 수 없는 상황’이 이것임을 분명 알아챘을 거다.

그럼에도 조금씩 흔들리는 라베트의 목소리가 박혀 들었다.

‘부친의 상황을 떠올리게 하니 기분 안 나빠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직접 나서주기까지 할 줄은 몰랐어.’

강하고 다정한 라베트도 알고 있겠지만, 나는 당연히 독약을 먹진 않았다.

나는 해독약을 안다고 해서 내 목숨 가지고 위험한 일 할 수 있는 그런 대단한 사람 아니다.

[먹으면 머리카락 일부분이 염색되는 악이요……?]

헤이즐은 ‘어…….’ 하며 눈을 굴리고는 침울하게 말했다.

[저는 그런 위대한 약제사는 못 돼요. 실망을 드려 죄송해요. 공녀님…….]

[……이게 더 어려운 거야?]

복용하면 정해진 시간 동안 진실만 말하게 되는 약마저 개발하는 사람에게도 어려운 일이 있었던 것이다…….

튜베롯 독약을 어떻게 구해 봐야 하나 눈물을 머금었는데, 의외로 신수가 해결해 주었다.

[―여깄다!]

신수가 준 물을 어금니 사이에 끼워 두고 적기에 터뜨린 이후가 지금 이 상황이다.

암살자들이 애용하는 방식인지라 꼭 독약 터뜨리는 느낌이라 기분은 영 싱숭생숭했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칼릭스. 어딜 가는 게냐!”

“독약을 넘긴 사람을 이대로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어차피 로나터스 후작에게 사용되었던 것과 같다면 목숨에 지장은 없다는 뜻. 황궁의를 붙여도 소용없다.”

“그럼, 구경거리가 되도록 두라는 말씀이신가요.”

“눕혀 두고 네 옷으로 가리면 되지 않겠어!”

나는 속으로 평했다.

‘돌았군.’

하긴, 깨끗하게 지웠다고 생각한 과거의 잔재가 갑자기 툭 튀어나온 셈이니 반쯤 미칠 만도 하겠다.

“범인을 찾아낼 때까지 누구도 이 연회홀을 빠져나갈 수 없다!”

“알겠습니다.”

“지금 황제에게 항명하, ……뭐라고?”

“알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사위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억지 수준의 말을 흔쾌히 수락한 이유를 알 수 없으니 몸을 낮추게 되는 것이다.

황제도 ‘저놈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쯤을 생각하고 있을 테다.

“저도 이 일의 진범을 반드시 찾고 싶으니까요.”

내 몸을 안은 칼릭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선황제 폐하께서도 동일한 증상을 보이시고 승하하셨으니 말입니다.”

죽음과도 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 * *

“그러니 잠시만 참아.”

샤를리즈의 귓가에 입술을 누른 채 칼릭스가 속삭였다.

내리뜬 눈꺼풀이 올라가고 벽안이 드러나는 동작은 느리고 단조로웠으나 어쩐지 시선을 쉽게 떼기 힘든 면이 있었다.

복잡한 머리를 가라앉히고 안토니오는 조심스레 물었다. 정보를 더 주는 꼴이 되어서는 안 될 테니.

“선황제 폐하께서 같은 증상을 보이셨다고? 확신할 수 있느냐, 칼릭스?”

“신에게 제 심장을 걸어 맹세합니다.”

안토니오가 볼 안쪽 여린 살을 짓씹으며 고개를 홱 돌렸다.

“탐문을 시작하라! 일단은…… 시종들부터.”

칼릭스가 선황제가 작고했을 당시를 기억하는 이상 드러내고 진범을 찾는 건 안 된다.

시종 하나 처형해 눈가림할 생각을 하던 중, 특유의 고저 없는 목소리가 울렸다.

“폐하. 샤를리즈는 타인이 건넨 잔은 받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더 중차대한 사안이로군. 특정인을 겨냥한 것이 아닐 수도 있으니.”

“단순히 혼란을 야기하고 위축되게 만들기 위함일 수도 있겠지요.”

그러며 그를 응시하는 벽안에 안토니오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거칠게 쥐었다.

손바닥에 손톱이 박혀도 아픈 줄도 모르고 안토니오가 “그럴 수도 있겠어.” 하며 짓씹듯 대답했다.

“로나터스 영애. 해독제가 구비되어 있나? 같은 흉계가 또 발생할 수 있으니 말일세.”

“후작가에 해독제는 더 없습니다.”

“그럼, 제조 방법은?”

“알고 있습니다.”

“기사단장이 명일 후작저에 도착할 테니 그에게 전달하게.”

라베트는 칼릭스를 한 번 응시했다.

해독 방법을 알려준 사람이 샤를리즈였다. 그러니 칼릭스도 알고 있기를 바라며 던진 시선이었으나, 무표정한 얼굴에서는 어떤 대답도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쪽이 옳았다.

“이 자리에서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황제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것이 말하지 말라는 뜻이든 당장 말하라는 뜻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라베트는 샤를리즈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시든 튜베롯 꽃의 향기를 맡는 것. 그것이 이 독약의 해독 방법입니다.”

“…….”

상식이 통하지 않는, 말도 안 되는 효능의 독을 신전에서 보호하는 꽃으로만 해독할 수 있다.

튜베롯이 신의 날개라는 별칭을 괜히 가진 게 아니라며 태평히 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최소한 온갖 계략과 암투를 헤쳐 온 고위 귀족 급은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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