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이렇게 되면 신전은 대량의 해독제를 손에 쥔 것이나 다름없다.
그것으로 이득을 보는 건 신전 측뿐이다.
비단 저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해독제는 그 독의 주재료로 만들 수 있다는 인식이 팽배한 탓도 컸다.
침묵이 마치 양감이라도 있는 듯 연회홀을 둔중하게 내리눌렀다.
감히 입술을 달싹이지도 못하는 군중들 사이에서 가장 먼저 입을 뗀 사람은 라베트였다.
“로나터스 후작저의 정원에 튜베롯이 피어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해독법을 알게 된 후 부친이 어렵지 않게 쾌유할 수 있었습니다.”
저 겉으로만 온건한 말은 로나터스 후작을 해칠 흉계를 꾸민 자가 후작가에 손을 쓰는 일도 가능했다는 뜻도 된다.
해독제를 주변에 늘여놓은 것은 그야말로 조롱으로밖에 보이지 않으므로.
안토니오가 미간을 좁혔다.
‘어째서 로나터스를 그렇게까지? 외골수 검사가 도대체 어떤 위협이 된다고!’
제 자리만 빙빙 도는 생각이 끊임없이 이어지던 때였다.
언제나 증오스럽도록 여상한 목소리가 사위를 갈랐다.
“이 시간부로 엘루이든은 결정적인 증언을 제공한 로나터스를 보호한다.”
마치 법조문을 낭독하듯 고저 없이 발음한 칼릭스가 문득 샤를리즈를 돌아보았다.
다시 정면을 직시한 눈은 무감했으나 직전에는 어떤 빛을 띠고 있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로나터스 영애. 큰 도움을 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네.”
“아닙니다.”
라베트가 고개를 숙였다.
다른 가문에 신변 보호를 요청한다는 것은 제 가문의 부족함을 드러내는 꼴밖에 안 됐다.
그러나 무려 황성의 연회홀에서 공작가의 유일한 후계를 겨냥한 독살의 주범이니 이 경우는 약간의 비웃음만 사고 말 터였다.
그럼에도 엘루이든 대공은 증인이라는 명목으로 보호를 말했다.
상황에 맞지 않지만, 라베트는 문득 생각했다. 공녀님은 저와 비슷한 상대를 만나신 것 같다고.
“유례없는 독이니만큼 동일범의 소행이라고 가능성을 열어둘 필요가 있겠습니다.”
칼릭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안토니오가 펄쩍 뛰었다.
“속단하기에는 이르다!”
이윽고 닿은 시선은 어딘지 묘했다. 제 발 저린 안토니오가 덧붙였다.
“그렇다고 동일범이 아니리라고 간과하는 것도 이르지. 로나터스 후작도 모자라 리엔타 공녀를 해하려고 한 게라면, 죄질이 몹시 좋지 않으니.”
짐짓 심각하게 되뇐 안토니오가 곁의 시종에게 물었다.
“황성에 당장 이 인원을 수용할 수 있겠나?”
잠시 아득해져 침을 꿀꺽 삼킨 시종이 속으로 헤아리고는 대답했다.
“예. 폐하. 가능합니다.”
귀족들은 끝내 미제로 종결되었던 저번 연회홀 사건을 떠올렸다.
불길한 시선을 은밀히 교환하던 때였다.
“포르테 경은 곧장 신전으로 향해 해독제 수급에 지장이 없도록 하게.”
안토니오는 턱을 문질렀다.
“범인을 색출하기 전까지는 모두 황성에 머무르게. 생활에 불편함은 없을 걸세.”
결국 이 말이 나오고 말았다.
* * *
“샤를리즈. 마차 안이야.”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알면서도 걱정된 건 어쩔 수 없네.”
작게 속살거린 칼릭스가 겨우 안도했다는 듯 웃었다.
나도 같이 웃어 보려고 했는데, 마음이 급한 탓인지 히죽거리는 괴상한 웃음을 짓고 말았다.
“라베트에게 보호를 약속해주시다니 감사합니다.”
“공녀에게서 들을 인사는 아니지만……, 기쁘게 받을게.”
라베트의 용기를 받아먹기만 했다면 라베트는 몰라도 에리히는 엇나갔을 거다.
‘그랬다간 그 망종이 리엔타 공녀가 본인한테 이런 명령을 내렸다고 어디서 나불거렸을지 모르는 일이지.’
모쪼록 해결됐다.
“황성에 붙잡다니 황제가 우리를 의심하는 걸까요?”
걱정은 되지 않지만 예의상 물어봤다.
칼릭스도 비슷한 투로 대답했다.
“의심이 많은 사람이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로나터스 후작의 일도 있으니 범인을 반드시 색출해내겠다는 다짐이 더 클 거야.”
“하긴. 후작가를 농락할 수 있는 데다 리엔타도 겨냥했으니 속셈이 무엇일지 불안하겠군요.”
그리고 나도 지금 엄청 많이 불안했다!
사샤의 안전은 문제없다.
내가 문제다.
사샤를 하루라도 못 보면 연못에 빠진 것처럼 마음이 시린데 한동안 못 보게 생겼다…….
눈을 감고 서글픈 숨을 내쉬었다.
“샤를리즈?”
따뜻한 손이 조심스레 볼을 감쌌다.
나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뇌까렸다.
“사샤를 못 볼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주 아픕니다.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눈앞에서 놓쳤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아려요…….”
눈을 감아 온통 어두운 시야 어귀에서, 다이아몬드가 번쩍였다.
‘이만큼이나 그리워하고 있었다고?’
어안이 벙벙해져 나도 모르게 덜컥 눈을 떴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 빛은 다이아몬드가 아니라 닫은 눈꺼풀마저 투과해 버린 미인의 위엄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그럼…….”
눈을 내리뜬 채 고심하고 있던 칼릭스가 웃었다.
“이틀은 견딜 수 있겠어?”
* * *
다음 날, 오전.
신전은 튜베롯 열 송이를 선뜻 제공한 것도 모자라 대신관도 보내왔다.
교황의 다독임에도 기도실에 밤낮으로 처박혀 기도만 하던 바로스였다.
대공과 안면이 있다는 이유로 차출된 그는 영 탐탁잖은 기분으로 황성을 걸었다.
마침내 도착한 장소는 대공이 황자 시절을 보냈다던 자그마한 건물이었다.
‘악취미잖나.’
그러니까, 선황제가 황위에 오르며 제 막냇동생에게 양보한 처소가 아니라 무희와 살았다던 그곳 말이다.
어쩐지 통쾌한 기분이 되어 지그시 건물을 바라보던 바로스는 교황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여기, 해독제입니다.]
[예? 해독제라면 튜베롯이라고…….]
[그래요. 정확히는 해독제는 아닙니다. 이 독에 한정되어 있지 않으니까요. 제가 기도실을 벗어나지 않았던 무렵, 신께서 제게 본연의 성수를 하사하셨습니다.]
그러며 교황은 묘하게 웃었다.
[바로스 대신관. 그대도 신전이 저 독의 생산에 기여했다고 의심하십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신께서는 미리 예감하시었나 봅니다. 하지만 세간의 눈은 여전히 우리를 좋지 않게 보고 있지요. 그러니 이 성수에도 의심스러운 시선이 모일 테나, 그럼에도 나는 위험에 처한 사람을 돕고 싶습니다. 해독제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요.]
감복한 바로스는 숨을 터뜨렸다.
[하지만, 공녀의 곁을 지키는 이들이 있을 텐데요.]
[그건 제게 맡겨 주세요. 바로스 대신관.]
교황이 그를 믿고 직접 내린 명을 기필코 완수하고 싶었다.
두 눈을 감고 잠시 기도한 바로스가 다시 걸음을 뗐다.
“오셨군요. 엘루이든 대공 전하께서는 알현 일정 때문에 자리를 비우셨습니다만, 대신관님을 안내하시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일이 잘 풀리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공녀에게 안내한 시종이 나가지 않으려고 해 잠시 문제가 있었지만, 이것도 어렵지 않게 해결됐다.
시종의 손에 난 상처를 본 덕택이었다.
“치유력이 공녀님에게만이 아니라 양분될 수 있습니다.”
“그럼 다른 시종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습니다. 한시가 급한 사안이 아닙니까. 지금도 공녀님의 몸에 파고든 독이 퍼지고 있을 테지요.”
시종이 머뭇거렸다.
“정 마음에 걸린다면 문을 열어두고 있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복도로 나간 시종의 위치를 바로스는 확인했다.
‘저 시종에겐 내 등이 보이겠군.’
한쪽만 관찰할 수 있는 구도가 지금은 오히려 호재였다.
침대맡에 놓인 의자에 앉은 바로스가 품 안의 약병을 꺼냈다.
공녀의 턱을 살짝 내려 작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약병이 기울어졌다.
* * *
같은 시각, 신전.
라우드는 약병을 가늘게 뜬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샤를리즈를 진정한 죽음으로 이끌 액체가 투명하게 빛났다.
그는 이 사태가 공녀의 계책인지 아니면 튜베롯 독을 아는 제삼자의 소행인지는 관심 없었다.
‘신수와 수호 계약을 맺은 사람은 대공, 공녀, 선황자 셋 중 하나일 터.’
긍지 높은 신수가 선황자가 아닌 다른 이유로 수호 계약을 맺을 리 없다. 그렇다면 답은 선황자 혹은 그 주변인뿐이다.
“하나씩 제거하다 보면 알게 되겠지.”
그런 의미에서, 바로스는 가장 적당한 패였다.
바로스가 대공과 척진 과거가 있느니만큼 개인의 원한이라며 선을 긋기 용이한 까닭이다.
그래서 선황자를 제거할 때 바로스를 사용할 생각이었다. 대신관이라는 위치는 본디 경계를 허무는 위력이 있으므로.
그러나 이번의 일로 라우드는 생각을 바꿨다.
로나터스 후작이 깨어났을 때. 그는 샤를리즈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 무렵 샤를리즈가 후작저를 드나들기는 했으나 그보다는 끈질기게 추적하던 후작가의 정보통이 운 좋게 결실을 맺었다는 쪽이 합리적이었던 탓이다.
“공녀는 약혼 이전부터 꾸준히 대공과 접했지.”
계약자로 선황자가 가장 유력하다고 여겼으나, 튜베롯 독약의 해독법은 극비다. 극소수만 아는 해독 방식을 알아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신수가 계약자도 아닌 인간의 명을 따를 리가. 그러니 어린 선황자는 아니다.”
라우드의 턱관절이 눈에 띄게 불거졌다.
세상은 합리적으로 돌아가지 않음을 알면서도 간과하고 말았다.
이 비합리적인 세상이 그에게 도움이 되었던 적은 한 번밖에 되지 않는데.
지금으로부터 9년 전의 여름.
오래전 자취를 감췄다고 알려진 힘을 우연히 느꼈던 그때.
그날의 일로 라우드는 동화책이라는 웃기지도 않은 형식을 차용하게 됐다.
“계획대로라면 그 신성력을 이용할 수 있었을 테나…….”
선황자는 개화에 실패했고, 대공이라는 변수가 나타났으며, 신성한 나무들이 불태워졌다.
신은 인간에게 역경을 주고 시험한다.
그 앞에 무릎 꿇을 사람은 그가 아니다.
라우드는 그것을 이겨내 원하는 결말을 손에 쥘 자신이 있었다.
* * *
라베트가 독을 해독하는 방법을 말함과 동시에 연회홀을 빼곡하게 뒤덮은 침묵이 선명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는지도 몰랐다.
‘이 정도 파장을 일으킬 사안을, 아드리안이 돌려서라도 말할 수가 있나?’
의심을 가진 순간.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얇은 유리 벽에 균열이 갔다.
비로소 알았다.
닫힌 시야 속에서 선연하게 반짝거렸던 그것은 나를 둘러싼 벽의 깨진 조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