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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203화 (203/232)

203화

달칵.

잠시 열린 문이 닫혔다.

“왔느냐.”

안토니오는 칼릭스가 도착하기 전까지 여느 때처럼 정무를 보고 있었던 척 들고 있던 펜을 내려 두었다. 꽤 평온한 얼굴을 해 보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이른 오전부터 저를 찾아오라고 말한 자체가 격한 초조함을 드러내므로 썩 의미 없는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공녀의 상태는?”

“로나터스 후작 영애가 언급한 그대로입니다.”

“그래…….”

안토니오가 혀를 까득 씹었다.

‘로나터스 후작을 죽일 생각이 없던 게야.’

표적의 목숨은 잘 붙어 있으나 의식은 없어야 이득이 되는 일.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

밤새 고민했으나 수확은 없었다. 그래서 해가 뜨기도 전에 기사단장을 불러 조사를 명한 차였다.

리엔타 공작이 일리든 포르테의 뒤를 봐주고 있다는 게 마음에 걸리기는 하나, 일리든은 그 대쪽 같은 성정상 세작일 가능성이 가장 낮았다.

애써 분기를 억누른 안토니오가 넌지시 운을 띄웠다.

“칼릭스 너는 로나터스 후작이 연루되었던 그 사건의 주동자와 이 일의 범인이 동일인일 가능성을 언급했지.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느냐?”

슬쩍 살핀 미려한 얼굴에 고민하는 기색이 스치는 것을 똑똑히 목격했다.

“추측이어도 좋다. 확실하지 않아도 말해 보아라. 황성까지 잠입해 공녀를 노렸다. 위급한 사안이니 조심성은 조금 내려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후일 칼릭스의 추측이 틀렸다고 결론 난다면 ‘위급한 사안인데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마땅하지 않겠어! 너는 그리도 생각이 부족하느냐!’ 할 인간이 바로 자신인 주제에 안토니오는 뻔뻔스레 말했다.

잠시 망설이듯 고개를 기울인 칼릭스가 마침내 입을 뗐다.

“동일인이라는 생각은 여전합니다. 다만.”

“다만?”

“필리엄 백작이 신고한 사건의 배후와 동일인 혹은 조력자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안토니오가 눈을 구겼다. 생각지도 않았던 사건과 연관성이 있다는 말에 선득해졌다.

채근하듯 쳐다보자 칼릭스가 순순히 입을 뗐다.

“로나터스 후작을 암살할 수 있었음에도 의식만 잃게 했다는 부분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하여, 이전에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안토니오는 움찔했다.

수상한 부분이 있었다고 한들 대귀족의 뒷조사를 사사로이 행했다는 것이 대수롭지 않게 말할 거리는 아니었다.

이미 몇 번을 겪었으나 그때마다 악을 쓰고 외면한 위화감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봤자 살생 하나 못하는 나약한 성정이지.’

안토니오는 악착같이 생각했다.

“후작의 사유 영토 중 수도에 인접한 숲이 있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습니다. 전날 숲으로 향한 기사가 가져온 것입니다.”

별 감흥 없이 나뭇가지를 내려다본 안토니오는 이어진 말에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필리엄 백작이 신고한 나무와 동일 품종으로 추정됩니다.”

“그래서 죽이진 않은 거였어.”

안토니오가 중얼거렸다.

당시 영애와 영식 모두 성년이 되기 전이었으며 모친은 사망한 지 오래였다. 의탁할 만한 어른마저 부재해, 욕심껏 재산을 나눠 가지려는 속셈만 그득한 것들이 주위를 에워싼 실정이다.

‘친인척들이 후작의 재산에 손댈 수 없도록 의식만 잃도록 한 게야.’

몰래 숲을 드나드는 것보다는 제 소유로 만드는 게 더 편하지 않았겠느냐는 생각이 일순 들었으나, 안토니오는 고개를 저었다.

‘일을 이렇게까지 키웠으니 언젠가 신성한 나무의 존재가 세간에 드러날 것이라고 짐작했겠지. 그러니 제 자취를 완벽히 감추기 위해 후작 명의로 남겨 둔 것일 터.’

안토니오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다면 후작이 의식을 잃은 후 3년간 벌목을 했을 테니 마차가 숲을 주기적으로 드나들었겠지. 밤을 틈탔다고 한들 목격자가 한둘은 나오기 마련. 그쪽을 조사하면 되겠어.”

혼잣말한 안토니오가 이만 축객을 내렸다.

제 목적만 해결하면 됐다는 함의가 가득한 동작에도 칼릭스는 표정 변화 없이 황제의 집무실을 나섰다.

안토니오의 예상과 달리 교황은 숲에 손대지 않았다.

아니, 댈 생각조차 없었다는 말이 맞겠다.

그곳에는 신성한 나무가 없으니까.

그러나 목격자는 나타날 것이다. 그러도록 만들 테니.

[황제에게 말하고 난 뒤, 그곳에 있던 나무를 적당히 베면 됩니다. 세작이 말을 흘려서 서둘러 처리했다고 생각할 테죠.]

그러고 샤를리즈는 이마를 거칠게 부여잡았다.

[생명을 경시하며 살아왔건만 왜 죄책감이 드는 걸까요! 목숨 소중한 줄 뼈저리도록 절감해서? 신성한 나무를 불태우라고 할 때는 이런 생각은 안 들었는데 말입니다.]

[때로는 세상에서 사라지는 게 옳은 생명이 있고, 그 나무가 그래. 존재해봤자 더 많은 비극만 초래할 테지.]

샤를리즈가 그를 힐끔 쳐다보고 중얼거린 말을 떠올리던 칼릭스의 얼굴이 조금 묘해졌다.

[그 얼굴로 비극을 말하다니 이것 참 보는 사람 생각 안 하는 비극…….]

“음…….”

그러나 샤를리즈는 이상한 말이나 행동을 할 때가 종종 있으니 이것도 연례행사라고 치기로 했다.

샤를리즈가 있을 방향을 바라본 벽안이 문득 가라앉았다. 짙은 밤바다 색을 닮은 눈동자가 느리게 여닫혔다.

[오시면 안 됩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괜찮다고 말하면 더 걱정될 수밖에 없어.”

하지만 칼릭스는 샤를리즈의 말에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은 그의 몫이었으므로.

* * *

바로스는 미간을 구겼다.

아까운 성수가 샤를리즈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기 때문이다.

‘하여간!’

의식이 없는 사람에게 대뜸 액체를 흘린 것은 자신인 주제에 바로스는 샤를리즈 탓을 했다.

베개에 얼룩이 남기 전, 바로스가 손수건으로 샤를리즈의 얼굴을 서둘러 훔쳤다.

‘턱을 더 당겨야 하나. 아니면 목을 조금 더 꺾어서?’

무려 신이 친히 하사한 성수였다.

공녀가 성수를 넘긴 게 맞다면 당장 눈을 떠야 마땅하다. 여전히 의식을 잃은 것을 보면 몽땅 흘린 듯했다.

소중한 성수를 혹여 흘리기라도 할까 봐 약병을 마개로 다시 막고, 바로스는 복도에서 이곳을 바라보고 있을 시종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였다.

공녀의 턱에 막 손끝이 닿은 순간이었다.

탁―!

하도 갑작스럽다 보니 오히려 얼떨떨해졌다.

바로스는 느리게 올라가는 속눈썹을 멍하니 보며 제 손등을 다른 손으로 매만졌다.

그리고 마침내 녹안과 시선이 마주쳤을 때.

서늘하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했다.

마치 아끼는 꽃에 기생하는 벌레를 보는 듯한 눈으로 그를 쏘아본 샤를리즈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뭐 하는 짓거리지?”

“고, 공녀님!”

과연 지켜보고 있었는지 시종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의식을 차리셨…….”

“왜 내 얼굴을 매만지고 있었느냐고 물었어!”

“히, 히익!”

그 말에 시종이 벌벌 떨었다.

“죄송합니다. 공녀님. 제 손에 상처가 있어 치유력이 양분될 수 있다는 대신관님의 말씀에 복도에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시종은 차가운 눈을 차마 바라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됐어. 대신관의 말을 그대가 어떻게 거스르겠나.”

“가, 감사합니다.”

지나치게 너그러운 처사에 시종이 눈물을 글썽였다.

그것이 제게는 너그럽지 않은 것임을 바로스는 눈치챘다. 공녀는 방금 책임소재 하나를 그에게 실었다.

“공녀님. 오해이십니다. 저는 공녀님을 치유하기 위해…….”

“저건 또 뭐지?”

샤를리즈의 시선 끝에 닿은 것은 약병이었다.

순간 낭패라는 얼굴을 한 바로스는 생각을 바꿨다.

‘차라리 잘 됐어.’

말도 안 되는 공녀의 오해에 해명할 수도 있을뿐더러 교황의 위엄을 드높일 수도 있으니까.

“아, 이것은 바로…….”

보란 듯 약병을 향하는 손이 자신만만했다.

그러나 약병을 먼저 잡아챈 손이 있었다.

“흠.”

두 손가락만 사용해 약병을 눈높이까지 들어 올린 샤를리즈가 입술을 비틀었다.

“공녀님. 그렇게 다루실 물건이 아닙니다! 바로 신께서 하사하신 성수란 말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그대가 마셔 봐.”

신전의 대신관을 한낱 시종과 똑같이 칭한 작태에 순간 분노가 치밀었으나 바로스는 침착하게 숨을 골랐다. 저 안하무인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공녀님께서 해독제 없이 이렇게 의식을 차리셨다는 자체가 증거 아니겠습니까? 사사로운 이유로 성수를 낭비할 수는 없습니다.”

“혀가 길어.”

샤를리즈가 지루하다는 듯 말했다.

“내가 직접 먹여 줘야 할까?”

바로스의 얼굴이 수치로 달아올랐다.

그가 다분히 감정이 가득 실린 손짓으로 샤를리즈에게서 약병을 뺏듯 가져왔다.

“신전에 귀속된 신자에게 오명을 씌우고, 성수를 낭비하도록 종용한 것. 오늘 일, 공녀님께서 반드시 책임지셔야 할 겁니다.”

“그대가 마신 다음 생각해 보도록 하지.”

샤를리즈의 매끈한 얼굴을 매섭게 응시하며 바로스는 마개를 열고 약병을 기울였다.

부러 꿀꺽꿀꺽 울대를 움직이고는 텅 빈 약병을 보여 주었다.

“자. 모두 넘겼습니다. 그러니 공……, 커억!”

속에 가득했던 홧홧한 열기가 목까지 치밀은 걸까. 그러나 손바닥에 묻은 것은 선연한 피였다.

“이, 이게 도대, 크윽!”

바로스가 바닥에 쓰러졌다.

마지막으로 눈에 들어온 샤를리즈의 얼굴은 여전히 무감했다.

* * *

느긋하게 때를 기다릴 여유가 없어 신수마저 제물로 써먹을 작정을 한 교황이다. 시간이 하염없이 흘러가면 초조함에 한 번은 반드시 성급하게 행동하리라고 생각했다.

‘……이, 이, 이거 뭐냐.’

나는 저 대신관이 나한테 먹인 것을 헤이즐의 약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진실만을 말하게 하는 것 말이다.

시든 튜베롯쯤이야 교황은 쉽게 구할 수 있을 테니까.

‘어쩐지 코가 안 간지럽다 싶기는 했는데.’

모든 독은 제조하는 과정에서 해독제를 마련해두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헤이즐도 약이 통하지 않는 약을 만들어 두었다.

그것을 미리 마셔 둔 참이었는데 말입니다…….

“대신관이 제게 독살을 시도했습니다.”

안 죽은 건 그렇다 쳐도 극독을 머금은 입안이 왜 괴사하지도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용하는 게 인지상정.

나는 비장한 얼굴로 눈을 치켜떴다.

“튜베롯으로 해독되는 독을 음독한 상황에서, 다른 독을 마시고 의식을 차렸다는 것은…….”

“그 독의 원료에 튜베롯이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크지.”

팔걸이를 거세게 움켜쥔 황제가 짓씹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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