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겉보기는 이쪽이 훨씬 괜찮네.’
나는 속으로 흡족하게 웃었다.
황성에서 이런 일이 생겼는데 신전이 가만히 있기는 어렵다.
파견된 신관이 순수하게 기도만 했더라도 ‘튜베롯으로 해독되는 독이건만 기도로 의식을 찾았다는 것은…….’ 하며 덮어씌울 의지가 만만했던 나다.
“신이 하사한 성수라. 그렇다면 교황이 친히 관리하고 있을 테지.”
황제가 보일 듯 말 듯 미소 지었다.
교황에게 황제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의 발현인지 아니면 신권을 땅 밑까지 처박을 속셈인지는 아직 불분명하나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단 건 확실해 보였다.
장밋빛 미래를 그렸을 황제가 뒤늦게 물었다. 황제 자리가 과분한 놈다운 우선순위 책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리엔타 공녀. 음독 당시에 수상했던 부분은 없었던가?”
“예. 잔을 선택한 건 저였고, 순서대로 고른 것도 아니었습니다.”
턱을 쓸며 잠시 고민한 황제가 다시 물었다.
“잔에 든 술을 바로 마셨나?”
당시 일을 떠올리고 있다고 표현하듯 얼굴을 찡그릴 필요는 없다. 워낙 초대형 구질구질 쇼가 있었다 보니 헷갈리는 게 더 이상했다.
“그건 아닙니다. 조금 걷다가 마셨으니까요.”
“잔에 수를 쓴 것이 아니라 그때 손을 썼을 수도 있겠군. 주의를 빼앗은 사람은 없었고?”
“당시 황제 폐하께서 로나터스 영애에게 구혼하시어, 잔에서 시선을 떼고 있긴 했습니다만.”
“아, 그랬지.”
아직 주범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았다. 제 목숨 끔찍하게 생각하는 인간이니 주범의 목적을 저지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라베트와 얽히기 부담스러울 것이다.
‘원래는 황위를 노리는 인간을 슬쩍 드러내서 황제가 결혼 생각을 못 하게 하려고 했는데 말이다.’
국혼 같은 대규모 행사는 목을 내놓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임시방편이지만 안토니오는 근시일 내 황제가 아니게 될 테니 상관없었다.
“아무튼, 공녀가 두 번이나 독살 시도에 노출되다니 마음이 편치 않군.”
이만 썩 꺼지라는 뜻이다.
피차 얼굴 마주하고 있기로는 나도 싫었으므로 번개 같은 속도로 화답해 주려던 찰나였다.
“아, 바로스 대신관의 죽음은 아직 함구해 주게. 독살 시도가 두 번이나 자행되었다고 한다면 혼란만 빚어질 테지.”
“…….”
저 말이 영 마음에 걸리긴 했는데.
황제의 선택지 중 하나를 그날 확실히 지울 수 있었다.
“황제가 신전으로 직접 향했어.”
칼릭스의 말을 들은 순간.
“…….”
그 어떤 근거보다도 확실한 심증을 가진 의심이 물안개처럼 피어올랐다.
* * *
해가 뜨기 직전의 가장 어두운 새벽.
칼릭스는 눈을 떴다.
익숙한 악몽에 시달린 얼굴은 담담했다.
꿈속과 같은 장소이기 때문일까. 순간 이곳이 현실이 맞는지 의문스러워졌다.
앞머리카락을 느릿하게 쓸어 올리며 칼릭스는 악몽 속에서 수도 없이 마주해 여전히 익숙한 침실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문을 연 순간이었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누군가의 옆모습이었다.
복도의 커다란 틈을 투과한 새벽빛을 머금은 머리카락이 희었다.
눈이 부셨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이곳은 현실이었다.
“일어나셨습니까?”
샤를리즈가 심상히 물었다.
잠시 웃는 것으로 시간을 번 칼릭스가 다정하게 되물었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거야?”
“얼마 안 됐어요.”
그러는 어깨가 서늘했다.
“해가 뜨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샤를리즈가 일출을 기다리는 이유를 미래를 보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다.
칼릭스는 “음…….”하며 눈을 내리떴다.
황제의 속셈은 몹시 맑은 수면과 다를 바 없다.
바로스 대신관의 죽음을 함구시킨 것. 오늘 당장 교황을 찾아간 것. 때마침 그가 황성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까지.
‘바로스가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이지 않고자 내 독살은 시간을 두고 시도했다고 할 테지.’
죽은 자는 말이 없으므로.
한때 독살 위협 때문에 식사량을 최소한으로 줄인 적이 있다. 샤를리즈는 건들지 않을 테니 이쯤은 어려운 것도 아니다.
“지금이라도 잠을…….”
칼릭스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이마를 덮은 결 좋은 흑발이 흔들렸다.
샤를리즈는 그녀 앞을 향했다가 저를 담은 벽안에 설명하듯 답했다.
“새벽 기도를 했습니다.”
기둥 턱에 둔 찻잔을 집어 드는 손동작이 과연 다소 느렸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물을 쏘아보는 시선은 여전히 예리했다.
“불면은 건강의 적. 잠도 못 자고 기도한 값, 반드시 돌려받고 만다…….”
혼잣말하듯 작은 크기였으나 말에 담긴 투지는 철철 흘러넘쳤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정지해 있던 칼릭스가 돌연 눈을 깜빡였다.
샤를리즈의 눈 밑을 검지 끝으로 조심스레 훑다 끝내 작게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많이 퀭합니까? 하루 만에 십 년을 늙게 한 것까지 받아 내…….”
“아니.”
샤를리즈의 눈가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그대로 작은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아니야, 샤를리즈.”
“저는 마음의 준비를 이미 해 두었으니 이렇게 주의를 돌리려고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방금 공녀는 가혹한 평을 내렸어…….”
샤를리즈가 흠칫하는 게 느껴졌다. 거리를 두고 있다면 전달될 수 없는 감각이 선명했다. 그래서 칼릭스는 조금 더 깊게 고개를 파묻었다.
“……사실 아주 좋았습니다. 멀리서 봐도 훌륭한 얼굴은 가까이에서 보니 더 대단했고―.”
계속 줄줄 말하던 샤를리즈는 끝내 “입술이 말랑말랑…….” 하다가 침묵했다.
칼릭스는 다시 웃었다.
안토니오는 저열한 속셈으로 이 처소를 내어 준 것일 테나, 안타깝게도 그 기대에 부합할 수는 없었다.
지금은 안토니오가 저런 성정의 인간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덕택에 제 의지로는 찾지 않았을 곳을 이렇게 딛고 서 있게 되었으니까.
다시는 이어지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에도 다음은 있다.
그것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로지 그 시간을 살아야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저를 비웃고 있는 거죠?”
“교황도, 황제도 역시 제거해야겠다고 생각했어.”
여전히 다정한 목소리로 칼릭스는 말했다.
“살아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잖아.”
“바로 그렇습니다!”
크게 고개를 끄덕이던 샤를리즈가 멈칫했다.
고개를 빼어 올리며 칼릭스는 물었다.
“생명을 경시한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래?”
“남 목숨 노릴 때는 본인 목숨 내놓을 각오를 해야 하니 이건 경시한 게 아닙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만은 알 수 있었다. 단호한 목소리와 달리 염려와 걱정이 담긴 녹안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이내 걷히고, 투지로 불타는 눈으로 샤를리즈가 말했다.
“역시 죽여야겠습니다.”
그 어떤 위로보다 크고 두터운 위로였다. 칼릭스는 가만히 웃었다.
* * *
정오의 햇살이 새어드는 집무실은 환했다.
안락의자에 앉은 안토니오가 쏟아지는 햇살 아래 지그시 눈을 감았다.
[바로스 대신관이 그가 성수라고 주장한 독으로 사망했다고요.]
[피차 돌려 말하지 맙시다. 나는 그 독이 필요하오.]
거기서 교황이 발뺌한다면 다소 귀찮아질 뻔하였으나, 그는 선한 얼굴로 “그런가요.”하고 대답했다.
‘하기야. 과거에 칼릭스를 죽일 작당을 이미 나누지 않았어.’
코웃음 친 안토니오가 이제는 제 손에 없는 그 약병을 떠올렸다.
독살 시도가 연이어 이어지는 판국이 마뜩잖기는 하나, 칼릭스가 황성에 머무는 지금이 두 번 오지 않을 천금 같은 기회라는 사실은 확실했다.
“선황자를 보호하기 시작한 것부터가 네 과오의 시작이다.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껏 그러했듯 네 목숨은 참아 주었을 것을.”
혀를 쯧 찬 안토니오가 턱을 쓸었다.
‘교황이 공녀의 목숨을 노린 이유는 묘연하나 엮을 구석은 있지. 요컨대 신성한 나무라든가.’
칼릭스를 성공적으로 제거한다면 교황도 쳐 낼 작정이었다.
오늘 아침. 안토니오는 로나터스 후작이 소유한 숲의 일부분이 다소 조악하게 벌목되어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세작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다고는 하나 ‘그럼 그렇지’하고 넘길 수 있을 턱이 없다. 집무실 한편을 장식하던 우아한 자기는 소각장행이 되었다.
‘튜베롯으로 해독되는 극독을 삼킨 로나터스 후작의 사유지에 신성한 나무가 있었다. 그리고 신성한 나무는 신성력이 있는 나무였다―.’
하나로 묶어 생각하라고 친절히 하나하나 흘린 단서라는 사실을 모른 채, 안토니오는 제 계획을 자화자찬했다.
“동지는 목적을 이루기 전까지만 존재하는 것이지.”
모든 것이 끝난 후, 비밀은 홀로 간직하는 것이 옳다.
안토니오는 술잔을 들었다.
이른 축배를 들어도 되었다.
이어질 소식을 기다리며 느긋하게 잔을 비우던 때였다.
다소 다급한 노크 소리가 여유로운 분위기를 가르고 울렸다.
“폐하.”
안토니오가 짐짓 엄숙한 목소리를 내었다.
“무슨 일인가!”
“엘루이든 대공을 겨냥한 독살 시도가 발각되었습니다.”
뒤숭숭한 분위기는 배후가 잡히면 가라앉을 것이라고 태평하게 점치던 안토니오는 그대로 굳었다.
‘시도가 발각되었다고?’
말인즉 실패했다는 뜻이다.
시종들이 쓸고 닦은 바닥에 유리 조각이 또다시 기어코 나뒹굴었다.
* * *
[음독한 체하는 것도 나쁘진 않았겠지만, 그러면 약속을 못 지키게 되니까.]
이틀 안으로 끝내겠다는 그 약속을 말하는 것이었다.
‘나, 도대체 얼마나 처량한 얼굴을 했던 거냐.’
마차 창문에 볼을 납작하게 댄 채 칼릭스와 잠시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그런데 말입니다. 교황이 허튼짓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나올 계획이었어요?]
[교황이 도움을 줄 것 같았어. 만약 없었더라면, 나를 황성에 더 둘 수 없도록 할 생각이었지.]
선량하게 웃은 칼릭스는 먼저 가라며 나를 배웅했다.
먼 산을 바라보는 사이 어느새 대공저가 목전이었다.
그렇다.
대공 독살 시도가 발각되기 이전에도 당사자인 나마저 황성에 머무를 이유는 없지 않느냐고 항의하던 리엔타 공작과 칼릭스의 합작품이 지금이다.
‘라베트도 지금쯤 후작저에 도착했으려나.’
나를 연이어 노린 것도 모자라 칼릭스도 겨냥했으니 다음 타깃은 라베트가 될 수 있다는 논조에 황제는 반박하지 못했다.
‘흠. 다른 사람들은 황성 안에서 백 년 만 년 살든 말든 나랑 상관없다.’
백 년은 조금 궁금하지만 만 년은 관심 없다.
마차가 정차하자마자 훌쩍 뛰어내린 나는 어정쩡하게 굳었다―.
‘어어?’
―가 마음을 달리 먹었다.
마침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