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샤를 님.”
주행 중인 마차는 근처에도 가면 안 된다는 투철한 안전 의식을 가진 사샤가 반갑게 달려왔다.
여전히 작디작은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아이의 어깨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사샤 몰래 졸졸 따라다니는 건가? 그런 건가?’
“아! 보세요. 샤를 님.”
‘보세요’ 앞의 ‘아!’는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계속 말하고 싶었던 거다.
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코를 슥 닦았다. 다행히 묻어나는 건 없었다.
“토끼풀이 바람에 실려 와서 반지를 만들었는데요, 시들지 않아요.”
선회한다. 어깨에 앉은 나비가 아니라 토끼풀이 신수였다.
사샤는 토끼풀 반지를 좋아하지만 이유 없이 꺾지 않는 아이다. 풀 사이에서 기다리다 기다리다 바람에 실린 척 날아왔다는 데 내 저녁밥도 걸 수 있다.
‘뚫리는 고통마저 참을 만큼 사샤를 좋아하는 거였어!’
“그래서 샤를 님께 선물 드리고 싶어요.”
사샤가 수줍게 웃었다.
“으응. 고마워.”
―잠깐. 나인 거 알면서 왜 받는 게냐!
‘맞다.’
―뭘 태평하게 ‘맞다’냐!
‘사샤가 주는 선물은 냉큼 받는 게 몸에 배어서 말입니다.’
―얼른 다시 애기 손에 넘겨라!
‘사샤가 애써 서운함을 감추려고 노력하는 얼굴을 보고 싶으신 거라면 해 보겠습니다.’
―…….
토끼풀을 손바닥에 올리고 터덜터덜 침실에 도착한 나는 일단 커튼부터 내렸다.
“교황이 계속 불러내려던 그 남자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에요?”
―뭐어? 그게 무슨 소리냐아?
“……신수님도 에반스 경과 비슷한 연기력을 보유하셨군요.”
놀란 심장을 침착하게 달래고 다시 눈매를 좁혔다.
“교황이 동화책의 형식으로 사람들이 기억하도록 하려던 그 이야기의 남자 주인공 말입니다. 좋아하는 건 뭐랍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
며칠 전. 나는 알았다.
샤를리즈가 미처 파악하지 못해 내게 알려주지 못한 부분에 관여한 제삼자가 있다.
“그 사람이 저를 계속 도와주고 있나 봐요. 성의 표시라도 해야죠. 호의를 떼먹으면 그게 어디 인간입니까.”
―뭐, 그렇기는 하다만……. 아, 아무튼 이만 가 봐야겠다. 호수가 외롭게 기다리고 있구나!
“잠, ……사라졌다.”
끙. 이번에는 이마에 붉은 자국이 남기 전에 손을 뗐다. 영 손해만은 아닌 덕택이다.
‘수정 구슬을 알려 준 사람이라서 혹시나 하고 찍어 봤는데 맞았나 보군.’
세계의 비밀이니 뭐니 하며 그런 쪽으로 신수는 말 엄청 아꼈으니까.
생기를 잃고 금세라도 바스러질 것 같은 반지를 조심조심 들어 보물 상자에 넣었다.
상자 뚜껑을 만지작거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저와 칼릭스가 없는 틈을 타 혼자 있는 사샤에게 접근해 호의를 사려던 흑심이 아니라 혹시 모를 가능성도 좌시하지 못했기 때문임을 압니다.”
아이에게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는 이유도 비슷할 것이다.
“그런데 말이에요. 저도 얼마 전에야 알았는데 너무 조심스러운 것보다는 무모한 게 나을 때도 있더라고요.”
상대가 소중해서 조심스러워지면 함께 할 시간만 줄어들고, 잃을 게 많아 조심스러워지면 사방이 덫으로만 보여 내딛는 걸음마다 주저하게 된다.
세상일의 아이러니함은 때론 가진 게 없는 사람이 우위를 차지하게 되기도 한다는 거다.
탁.
자못 경쾌한 소리를 내며 닫힌 보석 상자를 내려다보다 “맞다!”하고는 다시 상자를 열었다.
“교황이 알게 되었다고 자책하지 마세요.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제가 하는 바람에 자리를 피하실 수밖에 없던 것뿐입니다.”
그리고 알려져도 괜찮다.
교황에게만 조금 일찍 알려주었을 뿐이니까.
* * *
“신수께서 복귀하셨습니다!”
소년 신관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전설 속의 존재로 치부되기까지 한 신수가 호수를 벗어날 수 있을 정도로 힘을 되찾았다.
‘신전이 영광을 되찾을 것이라는 징표가 아닐까?’
성하도 저처럼 기뻐해 마지않으리라고 고개를 든 소년은 멈칫했다.
분명 자애롭게 미소 짓고 계셨지만 그 미소에는 어딘지 잔혹한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눈을 한 번 여닫고 다시 보인 얼굴은 성스럽기만 했다. 쉽게 잊지 못할 위화감은 그저 찰나의 착각에 불과하다는 양.
그럼에도 흘려넘길 수 없는 위화감에 소년은 여전히 머뭇거렸다.
“기쁜 일이네요. 자세한 사항은 대신관들과 상의해 보아야겠습니다. 이만 나가보세요.”
“예. 성하.”
소년이 꾸벅 허리를 숙이고는 나갔다.
“하.”
라우드가 마침내 탄식처럼 웃었다.
황제가 독을 요구했을 때, 처음에는 이 한심한 종자를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다.
그러나 이내 깨달았다. 이것이 그에게도 좋은 기회라고.
칼릭스가 죽으면 죽어서 좋고, 죽지 않아도 계약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을 테니.
연회 이튿날 새벽 대공저에서 행적이 끊긴 신수는 샤를리즈가 귀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호수로 돌아왔다.
신수는 계약자의 근거리에서 신성력 소모 없이 머무를 수 있다. 그러니 언뜻 보면 샤를리즈가 계약자가 아닌 듯하나,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다.
‘줄곧 선황자 옆을 지키고 있었으니 신성력 소모는 계속되고 있었겠지. 계약자 곁이라고 해도 소모만 중단될 뿐이지 회복되는 것이 아니니 계약자가 무사히 돌아온 상황에서 더 있을 이유가 없다.’
라우드가 입술을 말아 올렸다.
“일이 한결 쉬워지겠어.”
본래 총기를 잘 다룬다고 알려진 공녀는 궁술 대회에서 예상치 못한 두각을 드러냈다. 그러나 공녀의 재능은 도구가 필요하다는 커다란 맹점이 있다.
준비는 이미 마친 지 오래. 그러니 신경 써야 하는 것은 한 가지뿐이다.
‘황제가 아는 것이 많아.’
쓸데없는 말을 하기 전에 제거할지 아니면 두고 볼지 가늠하던 눈은 금세 흥미를 잃었다.
“쓸모없나.”
대공 독살 시도가 무산됐다. 황제가 어떤 쪽으로든 행동을 개시할 테니 지켜보고 결정하는 것이 나을 듯했다.
* * *
[폐하.]
횡설수설하는 그의 말을 자르던 목소리는 퍽 평온했다. 의외라곤 할 수 없었다. 칼릭스는 항상 그랬다.
그러나 이번은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만큼 유독 모욕적으로 느껴졌다.
다시 없을 기회라고 생각해 무리하게 자행한 일이 제대로 시도조차 되지 못했다.
황성에서 며칠 사이 세 번이나 독살이 시도되었다는 위험 부담을 감수하며 시도한 것인데도!
결단을 내린 끝에 시행한 일을 아무렇지 않게 피해갔다.
천박한 피가 흐른다며 애써 무시했던 어린 아우의 결점은 사실 저것밖에 없었다.
거센 격랑을 가까스로 누르고 있던 때. 칼릭스는 그 목소리로 심상히 말했다.
[저는 이 독살의 배후를 척결하려고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배후인 바로스 대신관은 이미 사망하지 않았어.]
[대신관이 배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경로로 독을 손에 넣었는지, 채 하루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시종을 어떻게 매수할 수 있었는지.]
갖지 못해 늘 갈구한 황실의 색이 그를 똑바로 향했다.
언제나 보기만 하는 것이 싫어 마침내 거머쥐었건만 이번에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모두 파헤쳐 보려고 합니다.]
“기어코 네가 이 자리를 탐해!”
칼릭스는 정당한 방법으로 황위에 오를 수 없다. 그러니…….
“선황자가 없어져야지.”
사실은 칼릭스를 제거할 자신이 없었다.
턱 밑까지 치달은 굴욕감을 삼키는 안토니오의 눈이 번들거렸다.
『“신전이 신탁을 밝히도록 만들어야겠군. 사샤가 신성력이 있다고 하고, 신성력을 제대로 다루는 법을 교육시키기 위해 신전으로 보낸다고 하면 돼.”
교황도 선황자의 신병을 원하고 있으니 일은 순조롭게 풀릴 테다.
신성력이 있어 신전에서 교육하겠다는 것을 어떤 구실로 막을 수 있겠는가.
사샤의 치하를 고대하는 제국민들이 많아져도 상관없다. 어차피 선황자는 제거할 테니까.
안토니오는 이를 세게 맞물었다.
그러나 이 일로 비롯될 말들은 쉽게 없어지진 않을 테다.
‘황실의 색을 갖지 못했으니, 황제는 선황과 달리 신성력을 보유한 후사를 보지 못하는 게 당연하지.’
‘그렇다면 대공은 가능할 수도 있겠어.’
―와 같은 이야기들.
그러나 칼릭스의 불경한 마음을 확신하게 된 지금, 저런 모욕은 기꺼이 감내할 수 있었다.』
* * *
무슨 투사냐?
떨떠름하게 눈을 끔뻑였다.
“그렇다고 합디다…….”
칼릭스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라도 내 형제가 저렇게까지 뻔한 작자라는 걸 알면 그런 기분일 것 같기는 하다.
‘라베트도 이랬으려나.’
에리히 같은 오라비를 두고도 훼손되지 않은 차분한 성정이 새삼 존경스러워졌다.
“교황보다는 신수가 더 높잖아요.”
나는 엄지를 세워 보였다.
“둘이 말해서 결판내라고 하죠. 설마 교황이 신수를 이겨 먹었다고 발표하진 않을 테니 말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신수의 자존심에 심심한 조의를 표하는 바다…….
“교황은 황제에게 공녀의 수호 계약 사실을 밝히고 신탁을 발표하기 전에 수호 계약을 끊어야 한다고 주장할 거야.”
눈썹뼈를 느리게 문지르며 칼릭스가 옅게 웃었다.
“독을 순순히 넘긴 게 수상하다고 생각했어. 되짚어 보니 속셈을 알 것 같더군. 공녀도 그랬을 것 같은데.”
“튜베롯 독을 마신 척하자고 제안한 건 접니다.”
“자책하지 않을게. 책망해야 하는 건 기회를 놓치지 않은 교황과 황제니까.”
몹시 좋은 자세였다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영특한 제자처럼 칼릭스가 유순하게 웃었다.
“그런데, 샤를리즈.”
테이블을 손끝으로 소리 없이 두드리는 입술에는 여전히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납치당할 생각이 있다고는 하지 마.”
“전혀 없습니다.”
어차피 또 사냥 대회나 열리겠지, 뭐.
‘그러고 보니 데칸드 백작저에 슬슬 가 보려고 했는데 어렵게 됐군.’
……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판매업자가 대대적인 사기 행각을 벌인 것이 들통나 인접국으로 망명했다지 뭔가. 유물을 성물로 속여 경매에 부치고 판매했다고 말일세.
그럼 이걸 제게 주시면 저는 성물을 뒷거래하려던 죄로 잡혀 들어가는 거 아닌가요……?
나는 엄연히 유물을 구입하였으니 문제가 생길 일은 없을 걸세. 내 취미가 조금 유명하기도 하니.
“아하.”
볼 때마다 속이 쓰리더군. 물론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야. 공녀가 관심 있게 보던 것이 생각나 보냈다네.
“예에……, 감사합니다.”
눈물을 슥 훔쳤다.
정체 모를 피가 묻은 흉흉한 물건이 내 손에 들어오게 됐다.
“레아가 청소하다 놀랄 수 있으니 어디 숨겨 두기나 하자…….”
맨바닥에서 갑자기 휘청이다 유물을 손으로 짚은 순간.
흰빛이 잠깐 반짝이더니 활이 내 손에 흡수됐다.
“뭐, 뭐야.”
허겁지겁 확인한 손바닥은 상처 하나 없었다.
“오.”
교황이 나를 족치겠다는 의지가 하늘을 찌른 이때 이 신묘한 물건이 내 수중에 들어온 것은 경험상 단순한 우연의 산물은 아닐 테다.
‘이거 혹시……?’
텅 빈 복도를 확인하고도 소리를 한껏 낮춰 소곤소곤 말했다.
“소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