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라.’
달필가 리반으로부터 얻어온 한 구절도 소용없었다.
“……세상아.”
정체 모를 피가 묻은 흉흉한 물건이 내 몸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 * *
비슷한 시각. 황제의 집무실.
“쯧.”
안토니오가 못마땅하게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직도 이 정도까지밖에 진척되지 않았다니 내 실망이 크군.”
그 앞에 선 사람은 황실 1기사단장, 일리든 포르테였다.
“다소 갑작스럽게 중간보고를 요청한 만큼 보고서가 허술한 것은 감안할 수 있었네. 하지만 내용마저 허술하지는 않았어야지!”
교황과의 거래에서 주도권을 하루빨리 잡고 싶어 트집 부리는 것에 불과했으나, 일리든은 깍듯하게 고개 숙였다.
“송구합니다.”
“경.”
보고서를 보고 다시 눈살을 찌푸린 안토니오가 마치 회유하듯 턱을 문질렀다.
“수사 결과를 추측으로 내는 과오는 벌여서는 안 될 테지만, 지금은 단서가 부족한 상황이지. 과정만큼은 저 방식을 차용할 필요성이 있지 않겠어. 신성한 나무가 가장 필요했을 사람이 누구겠나?”
“표적 수사를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표정과 말투만 깍듯하지 내용은 불민하기 짝이 없었다.
습관적으로 크리스털 조각을 움켜쥔 안토니오의 아귀힘이 스르르 풀렸다.
‘그래. 저런 종자가 세작 짓을 하진 않을 터이니.’
그러나 삐딱해진 기분까지 해소될 수는 없었으므로 한껏 구긴 얼굴은 그대로였다.
“황제의 충고를 그렇게 받아들일 줄은 몰랐네만.”
“송구합니다.”
기어코 날 선 시선을 던진 안토니오가 서랍을 거칠게 열어 꺼낸 것은 폭이 좁고 기다란 상자였다.
“사용되지 않은 신성한 나무의 일부라네. 이 사건에 신전이 관여되었을지도 모르니 신관에게 당장 보일 생각은 말게. 경이 소지하고 있도록.”
“예. 폐하.”
“나가 봐. 다음 조사는 부디 진척이 있기를 바라지.”
일리든은 황제의 집무실을 나섰다.
이제는 싸늘하다기보다는 서늘한 바람에 군청색 망토가 휘날렸다.
거침없이 내딛는 걸음과 달리 일리든의 심경은 다소 복잡했다.
[공녀가 신성한 나무에 본디 신성력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했다네.]
신성한 나무를 어디서 얻었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은 황제가 저 추측의 발화자는 굳이 언급했다.
일이 잘못된다면 책임 소재를 리엔타 공녀에게 물겠다고 발을 빼 두는 격이었다.
그가 기사단장위에 복직할 수 있도록 긴밀히 도와준 샤를리즈는 정작 어떤 것도 바라지 않았다.
뒤를 굳건히 지켜 주는 리엔타 공작도 마찬가지였다.
‘공녀님께 조심하시라고 말씀드려야 한다.’
일리든 포르테가 세작이 아니리라는 황제의 추측은 틀리지 않다.
다만, 일리든은 스스로를 변절자라고 생각할 뿐이다.
* * *
놀랍다!
사냥 대회 소식이 없다.
보물찾기 같이 밖으로 내돌리는 행사 소식도 마찬가지로 없었다!
심지어 연회 소식도 전무.
“혹시 교황한테는 사람의 남은 수명이 보여서 내 자연사를 기다리는 건가?”
내 수명이 짤막하긴 하다. 수정 구슬 덕택에 늘어나서 그렇지.
수정 구슬을 빡빡 닦던 손등을 징벌하듯 다른 손으로 매섭게 쳤다.
보드랍게 문지른 끝에 내 얼굴이 비칠 정도로 깨끗해진 구슬을 빤히 쳐다봤다.
“……물어보고 싶지만 참겠다.”
사사롭게 남용하면 패널티가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덜컥 들었기 때문이다.
오늘 본 ‘미래의 조각’ 탓이 컸다.
“이 세계의 신은 영 이상해서 좀 찝찝하단 말이지.”
입 안으로 중얼중얼거리며 수정 구슬을 다시 함에 쏙 넣었다.
‘교황을 어떻게 처리하냐고 질문했을 때 아무것도 보여 주지 않았기도 했고.’
비슷한 질문을 해 봤자 또 내 얼굴만 비치는 게 고작일 것 같다.
발신인 자리가 텅 빈 서신을 받게 된 것은 그 무렵이었다.
‘일리든이 또 신경 써줬구나.’
그 올곧은 성격에 편지를 쓰기까지 고뇌가 상당했을 테다. 상황 알려 달라고 닦달하는 못된 짓거리는 안 했지만 아무튼 나 때문에 마음고생 길을 걷게 되었으니 미안하게 됐다.
단숨에 독파한 편지를 불에 태우며 턱을 괴었다.
“위험 부담 안 지려고 안간힘을 쓰는군.”
황제 꿈속으로 들어가서 호통치고 싶다. ‘너는 자세가 안 돼 있어!’하고 말이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편지가 모두 탔다. 잿가루가 든 두 손을 공손하게 모으고 정원으로 나갔다.
“저번에 여기 줬으니까 이번에는 저기 가 볼까.”
적당한 위치에 일용할 비료를 주기 위해 바삐 걷고 있던 중이었다.
말에서 뛰어내린 누군가가 저택 현관으로 허겁지겁 달려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잊을 수 없는 얼굴이다. 바로 내 첫 러닝메이트였기 때문이다.
‘로르 경이잖아?’
내 얼빵한 시선을 느꼈는지 힐끗 고개 돌린 로르 경이 “아가씨!”하고 외쳤다.
아니. 외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탄식처럼 아주 작게 중얼거렸을지도 몰랐다.
손 안의 잿가루가 사그락거리는 소리마저도 이상할 만큼 크게 들렸으니까.
“공작 각하. 각하께서…….”
“아, 이거였구나.”
‘미래의 조각’은 미래만 보여 주진 않는다. 이번에는 현재도 아닌 과거였던 모양이다. 교황이 황제를 만난 건 어제였으므로.
그런데 조각이 과거를 보여 줄 수도 있다고 알려주는 계기가 이 일이었을 필요는 없잖아.
“하나, 폐하. 이용하기 위해서는 이용당할 수 있다는 각오도 해야 하는 법이랍니다.”
* * *
라우드는 찻잔을 다시 내려 두었다. 식은 찻물이 마치 극독처럼 씁쓸했다.
“공녀는 내게 고마워해야 합니다.”
망설임 없이 찻물을 바닥에 버리고 찻주전자를 기울였다.
“튜베롯 독을 음독한 척 행동한 것은 황제의 과오를 들추어 황위 찬탈을 순조롭게 하기 위험이었을 테지요. 하지만 황제가 바보도 아니고, 저가 연관되었을지도 모르는 사건을 제대로 조사할 리가 없잖아요?”
엷은 미소를 띤 입술이 재차 움직였다.
“그래서 칼자루를 그대에게 넘겨주었지요.”
황제가 감히 그를 편리하게 이용하려고 한다.
라우드는 그것을 참아주고 싶지 않았다.
* * *
샤를리즈가 공작저에 도착했을 때, 로비는 사용인들로 빼곡했다.
“아가씨.”
“범인은?”
“아직 파악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만약 외부 소행이 실패했다면 내부에서 노렸을 테지. 론처럼 이미 매수당했을 수 있으니 재직 기간도, 평판도, 위치도 구별하지 말고 조사해.”
“그러겠습니다.”
“노아 경.”
제가 데려온 기사의 이름을 짤막하게 발음한 샤를리즈가 계단을 올랐다.
집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노아가 샤를리즈의 뒤로 따라붙었다.
순식간에 도착한 3층 복도는 한적했다.
그들이 들어선 곳은 가주의 침실이 아니라 사용하지 않는 빈방이었다.
“각하께서 영지를 시찰하시고자 막 수도를 벗어나셨을 무렵 공격이 가해졌습니다.”
곧 겨울이 끝난다. 리엔타 공작령이 위치한 남부는 곡창 지대이니 영지 시찰은 매년 이 무렵의 정기적인 일정이었다. 하지만.
“노골적이네.”
샤를리즈가 입 끝을 올렸다.
“로나터스 후작의 사례와 너무 똑같잖아.”
사용된 독도 같다는 말은 굳이 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현 황제가 황자였을 시절 그의 목숨도 구명한 적 있는 실력자가 바로 벨리악 리엔타다.
그랬기에 가장 먼저 용의선상에 올라 조사받은 사람들은 호위 기사들이었다.
“진술은 일관됩니다. 돌연 사위가 어두워져 경계 태세를 갖추었으나, 위쪽에서 화살이 날아왔다고 합니다. 각하의 오른쪽 어깨에 박혀 있던 화살은 주치의가 환부를 치료하며 따로 보관해 두었습니다.”
“그래.”
샤를리즈가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언제나 담대한 주인께서 부친의 위기에도 의연하다고 생각할 수 없던 이유는, 그녀의 떨리는 손을 보았기 때문이다.
창문 너머를 쳐다보며 샤를리즈가 문득 말했다.
“이상하지. 마치 이건 바꾸지 말라는 것처럼 느껴져.”
맥락 없는 말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노아는 되묻지 않았다.
“부탁할게.”
“예. 아가씨.”
노아의 어깨를 짚은 샤를리즈가 방을 빠져나갔다.
노아는 샤를리즈가 쳐다본 창문을 돌아보았다.
신전이 위치한 방향으로 나 있었다.
* * *
“아가씨. 오셨습니까.”
가주의 침실에는 어느새 집사와 시녀장도 도착해 있었다.
분위기는 아주 침체되어 있지만은 않았다.
해독약을 알고 있는 독이었던 덕택이다.
싸늘한 샤를리즈의 얼굴도, 그랬기에 당연했다.
이 공격은 경고로 해석될 수밖에 없었으므로.
“신전에 협조 요청을 보냈…….”
“그럴 필요 없어.”
샤를리즈가 손으로 꺾은 듯한 튜베롯 서너 송이를 품에서 꺼냈다.
“들고 오기는 싫어서 말이야. 색이 이래서 꼭 조화를 바치러 오는 것 같잖아.”
줄곧 메마른 눈가를 유지하고 있던 집사가 눈물을 훔치곤 대답했다.
“맞습니다. 가주님께서는 분명 건강하게 깨어나실 테지요.”
“저희는 먼저 나가 보겠습니다. 아가씨.”
집사를 부축하며 시녀장이 주치의에게 얼른 나오라며 눈짓했다.
문이 닫혔다.
샤를리즈는 부친을 여전히 열없는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제가 독을 먹었던 것 때문이에요?”
그녀가 연회에서 음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공작도 안다.
그러니 이번을 말한 게 아니다.
“누가 날 살게 했는지 알았고, 누가 도와줬는지도 알았으니까 이제 다른 건 더 알 필요 없겠다고 생각했어요.”
‘미래의 조각’이 아예 보여 주지 않았더라면 눈치채지 못했을 이질감이 선명했다.
세상은 모두 다 알라고 하고 있었다.